[147화]
가르칸 공화국 군 진영.
노이멀 총리는 현재 크멜 공작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본래라면 초전(初戰)에서 유리한 노이멀 가문의 검술이 먹혀서 자신이 우위였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크멜 공작은 노이멀 가문의 검술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불리하다고 생각한 노이멀 총리가 비장의 수단을 쓴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아버님의 작품인 히드라의 이빨에 의해서… 크멜 공작이 죽을 때가 됐을 텐데 말이야.”
‘히드라의 이빨’. 대연금술사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작품.
대처법을 알면 파훼되는 것과 반대로 모르면 그야말로 치료법이 없는 극악한 ‘독’. 사실 본래 개념은 독이 아니지만 상대에게 쓰면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영락없는 ‘독’과 같았기에 그렇게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그래도 역시 상대가 상대인 만큼 ‘독’을 맞춰서 쓰기가 어려웠던지라 다소 무리해서 어깨부터 복부까지 이르는 큰 상처를 입은 그녀였다.
하나 이 정도 상처에 ‘특급 기사’라 불리는 크멜 공작을 확실히 죽이게 된다면 수지맞는 장사였기에 그녀는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
“드라켄 장군이 죽은 게 아쉽지만 뭐, 소원대로 전장에서 최고의 상대에게 죽었으니 여한은 없을 거고, 원수도 갚았으니 리자드맨들도 할 말이 없겠지. 후우~ 그러면 이제 다음은…….”
크멜 공작의 죽음이 확정 났으니, 이다음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노이멀 총리는 미리 판을 짜기 시작했다.
제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유일한 특급 기사라고 자부하던 그가 죽은 만큼 이후에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크멜 가문의 북방엔 볼레아 왕국이라는 야만스러운 약탈 국가가 있어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며, 제국 내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잘만 하면 내전도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우리는 그 혼란 속에서 쉽게 이익을 챙기면 되는 법이지. 후훗… 전쟁에선 패배했지만, 국가 계획에선 승리한다는 게 이런 거려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도 웃긴 일이었지만, 이미 항복 서류를 보내긴 했으니 형식상의 패배도 패배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은 잠시 정비를 한 다음 바니로 백작가를 꼭두각시처럼 이용해서 다시 남부 영지들을 통일하고, 이번 패배 형식의 승리에 대한 보수를 이리저리 요구하면서 계속해서 내정 간섭을 해 나갈 생각이었다.
‘듣자 하니 식량 절반을 불태운 다음에 각 군대가 현장에서 추수해서 먹어 치웠다는 이야기도 들리던데… 후후, 상황이 더 좋게 돌아가는걸?’
책략을 위해 스스로 불태운 절반은 지원해 주기로 했지만 그 이상은 지원하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이상은 2배 이상의 가격을 받고 팔면 오히려 가르칸 공화국으로서는 남는 장사였다.
아니, 좀 더 배짱부려서 3배 가격으로 팔아도 이미 절반의 식량을 공짜로 지원해 준 가르칸 공화국에게 뭐라고 할 수 없으리라.
‘뭐, 긴축 운영을 통해서 극복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넘어오거나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영지민들을 우리가 수거하면 그만. 인력은 인력대로 쓰다 버릴 곳이 넘쳐 나니…….’
그 어떤 상황이 되어도 모두 가르칸 공화국의 이익이 되니 행복한 일이었다.
제국의 혼란은 결국 주변국의 이득이 되고, 그 이득을 계속 얻고 나아가서 가르칸 공화국의 수장으로 대륙을 제패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나 세상일은 늘 그렇듯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
설사 그것이 수학의 공식처럼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신의 변덕에 의해서 갑자기 ‘1+1=2’가 ‘1+1=3’이 되는 경우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쿠룩! 초, 총리님! 큰일 났습니다. 쿠룩!”
“무슨 일이지? 갑자기 적군이 자살 돌격이라도 하러 오는 건가? 그러면 엄청 반가운 일인데…….”
“그게! 크멜 공작이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쿠룩!”
“…뭐?”
오크 병사가 들어와서 알린 사실은 노이멀 총리에게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다.
‘히드라의 이빨’이라 불리는 이 독은 대처법을 제대로 모르면 절대로 나을 수 없는 독이다.
그리고 그 대처법은 보통 방법이 아니라, 사실상 ‘히드라의 이빨’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마력을 공급하는 것인데, 정확하게 이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것을 만든 아버지인 베오날드와 노이멀 총리 자신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살아났다고?”
“쿠룩! 정찰을 한 엘프 부대의 말에 따르면! 쿠룩!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초상집이었던 분위기가 갑자기 확 좋아지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히드라의 이빨이 어떤 맹독인데! 아빠가… 아빠가 만든 최고의 역작인데! 그래, 위장인가? 우릴 속이려고 위장하는 걸 거야!”
“쿠, 쿠룩, 처음엔 그걸 의심했는데…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쿠룩! 그걸 위장할 거라면 군대가 다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쿠룩! 지금 부대가 그대로입니다.”
“…믿을 수 없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가야겠어!”
워낙 큰 충격에 감정의 동요가 컸던 탓인지 노이멀 총리는 위엄 있던 어조와 말투까지 바뀐 것도 모른 채 아픈 몸을 이끌고 급하게 텐트를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타고 빠르게 진영을 떠나 피비린내와 시체 썩은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전장을 가로질러 크멜군의 진영 근처에 도달한 그녀는 안력을 집중해서 진영 주변을 살펴보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병사들이 기뻐하고 있고, 동요를 감추려는 기색도 없어. 게다가 모두가 다 같은 반응을 저렇게 연기할 수 있을 리 없는데……. 그러면… 정말로 살아났다는 거야? 히드라의 이빨은 그렇게 만만한 독이 아닌데, 대체 어떻게……?’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호위를 위해 튀어나온 엘프 기사들이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아섰다.
“…저, 총리님? 적진에 너무 가까이 가셨습니다. 기다리십시오.”
‘큭!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크멜 공작은 대체 뭐 하는 작자지? 노이멀 가문의 검술을 알고 있는 건 어차피 500년 전에 살아남은 우리 노이멀 가문의 사람이나 기사의 후손이라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본 그녀로서는 충분히 혼란과 공포에 빠질 만했다.
크멜 공작이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은 어떻게 가능성을 점쳐 볼 여지가 있지만, ‘히드라의 이빨’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독이었다.
대연금술사이자 자신의 부친인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명작. ‘독’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누구도 대처법을 예상할 수 없어 적을 기만하는, 독이 아닌 독이라는 의미의 걸작이었다.
‘…일단 진정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우선 알아보고 대처하면 돼. 누가, 어디서, 어떻게 히드라의 이빨을 알아내서 대처한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우연히 시도하다가 대처법을 알게 된 건지, 그리고 완치가 된 건지 아닌지… 아직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진정해.’
가능성을 검토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노이멀 총리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크멜 공작과의 싸움에서부터 뭔가 계속 어긋남을 느꼈던 데다, 자신이 절대적 진리로 여기던 지식과 아버님의 유산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불쾌감이 계속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녀는 이후에라도 반드시 크멜군에 일어난 전모를 알아내리라 맹세하고, 변수를 고친 뒤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물러나기로 했다.
***
같은 시각, 크멜 공작의 천막.
“내… 가… 살아 있… 는 건가?”
힘겹게 눈을 뜬 크멜 공작은 온몸에 느껴지는 탈력감과 어지러움에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에 물었다.
그의 주변에는 한참 이것저것 하는 베오날드와 함께 공작의 가신과 기사들이 모두 모여 그가 눈을 뜬 것을 기뻐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베오날드를 호출해서 상태를 보게끔 했다.
“공작님이 눈을 뜨셨네! 자네, 어서 보게!”
다급히 부르는 가신들의 외침에 베오날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공작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곧바로 침대로 향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네놈이… 왜… 여기에?”
눈앞에 나타난 베오날드의 얼굴을 보고 놀란 크멜 공작은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키려 했지만, 베오날드는 즉시 그 힘없는 손을 잡고 내린 다음 충고하듯 말했다.
“이야기하려면 깁니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까 그냥 계속 주무십시오. 자는 게 최고의 치유입니다. 그리고 지금 체내의 모든 오러가 소진된 상태이지만 마나 호흡법은 절대 하지 마시고, 오러도 끌어 올리지 마십시오. 살고 싶다면 말입니다.”
“자네가… 날 살렸나? …어떻게?”
“다 나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의 군대는 공작님이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멀쩡해지니까 걱정 놓으시고, 한숨 더 푹 주무십시오.”
“아니… 나는 당장… 일어나야…….”
“지금 잘못 움직이면 평생 검을 못 휘두를 수 있습니다. 독에 당한 걸 간신히 살려 놓은 만큼 몸이 약해지고 고장 난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더 망가지면 절대 못 고칩니다.”
베오날드의 엄포에 크멜 공작은 일어나려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몸의 힘을 빼고 다시 누웠다.
전생에 황제는 물론이고 제멋대로인 황실의 사람들과 황실 기사단 놈들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베오날드였기에 어떻게 하면 그들을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선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었다.
일단 그들은 평소 단련도 하고 오러도 사용하는 만큼 보통 사람보다 튼튼하고, 또 아파 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크게 다쳤을 때도 멋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짐승처럼 날뛰려는 그들에겐 그래도 하나의 약점이 있었으니, ‘검’을 휘두르는 기사로서의 아이덴티티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검을 못 휘두른다는 건 이제 더 이상 기사가 아닌 그냥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었기에 아주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끄으으응…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나? 전황은? 라웰스… 남작?”
“거, 걱정 마십시오, 공작님. 병사들은 그때 이후로 많이 잃지 않았고, 그 망할 가르칸 공화국 놈들은 그날 전투 이후 항복 의사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전쟁으로 번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필시 놈들은… 공작님이 죽을 줄 알았던 거겠지요. 하지만 이 친구 덕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런가……?”
“예. 그러니 부디 몸조리 잘하신 다음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공작님이 무사히 일어나시기만 하면! 무조건 저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 군. 후우우우~”
그렇게 라웰스 남작의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크멜 공작이었다.
자신이 쓰러진 뒤에 혹시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물론 가문의 병사들과 기사들을 잃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사기 저하로 인한 피해 말고는 아직 크멜군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항복이라……. 정말 간교하기 짝이 없군. 그 노이멀 총리라는… 잡종 년.”
“애초에 독을 쓴 시점에서 정말 악독하고 비겁한 년입니다! 존재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 망할 노이멀 년은 반드시 잡아서 살아 있는 게 괴롭다고 생각할 만큼의 고문을 죽을 때까지 해 줘서…….”
“옳소! 옳소!”
“맞습니다, 공작님! 그 망할 잡종 년을 붙잡아서!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쨍그랑!
다들 의기투합해서 노이멀 총리에 대한 험담과 분노를 태우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한참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에 완벽히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고, 모두의 시선이 몰린 곳에서 베오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능청을 떨었다.
“아~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그만… 하하하.”
그렇게 말한 그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고는 다시 약을 제조하는 일로 돌아갔다.
‘히드라의 이빨’은 마력만 보충하면 대처가 되었고, 몸에 남은 반점은 자연 치유에 기대어도 회복할 수 있다.
하나 하루라도 빨리 공작을 낫게 하는 것이 베오날드의 일이었고, 위기를 넘겼으니 발데리안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는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약을 만들고 있었는데 계속 자신의 가문에 대한 모욕이 들려오니 자신도 모르게 그만 발끈해서 일부러 병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솔직히 이건 정당방위이지. 그나저나… 누굴까? 정말 궁금해지는군.’
‘노이멀’을 지칭하곤 있지만 자신의 혈족일지 아니면 단순히 사칭하는 자일지 궁금했던 베오날드는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중에 항복 회담을 하는 곳에 몰래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