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한참 크멜군, 제국 수도군과 가르칸 공화국 군대가 항복 전 마지막 총력전으로 시간을 보낼 무렵, 발데리안군의 진영은 평화로웠다.
승리한 군대였기에 일단 다들 분위기도 좋았고, 또 적의 시신에서 갑옷과 부장품을 잔뜩 챙겨서 제대로 한몫 잡기도 했고, 이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생기긴 했지만 가장 큰 건 역시 적당한 양의 술이 허락됐다는 점이었다.
물론 기사들과 귀족들은 몸값 협상을 비롯해서 머리 아픈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바쁜 입장이었지만, 이게 바로 그들의 의무였기에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한가롭게 마갑주를 개수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을지 연구에 힘쓰는 중이었는데, 하이디를 통해서 ‘마갑주’의 위력을 알게 된 다른 기사들이 벌써부터 베오날드에게 와서 질문을 하고 난리였다.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건가? 아니, 가격은 어떻게 되나?”
“프레임은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으로 된 거라서… 엄청 비쌀 겁니다.”
“쩝, 영주님 정도나 되지 않으면 무리겠군.”
“물론 더 싼 것도 만들 생각입니다. 목표는 발데리안 가문에 모두 보급하는 거죠. 그것을 위해서 지금 이렇게 테스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가? 그때를 기대하도록 하지.”
그렇게 오늘로 벌써 몇 번이나 한 건지 모를 대화를 주고받은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정비에 힘썼다.
하이디와 셀리나가 옆에 나란히 앉아서 베오날드에게 도움을 주면서 작업은 계속 진척되어 갔다.
순조로이 작업이 되어 가는데, 셀리나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이걸로 큰 공을 세우시게 되었는데… 발데리안 백작님에게 뭘 부탁하실 건가요? 솔직히 하이디 경의 공이지만, 이 마갑주는 베오날드 님의 작품이잖아요.”
“뭐가 되었든 발데리안 가문에서 중임을 맡게 되겠지. 이 마갑주 일도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영지를 받는 것보단 발데리안 가문 내에서 일하는 게 더 적성에 맞을 거다.”
“오… 그쪽에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요?”
‘그야 받아 봐야 코딱지만 한 영지를 받을 건데, 그걸 어디다 써. 인구도, 영토도 한계가 있을 텐데… 차라리 발데리안 영지를 움직일 수 있는 쪽이 더 편하지.’
베오날드를 작은 영지에 박아 두는 것은 포클레인으로 화분의 흙을 푸는 거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나마 체급이 되는 발데리안 가문에서 일하는 게 그의 능력을 펼칠 수 있고, 또 입장상 편하기도 했다.
자신이 작위를 가지는 것보다는 이미 대귀족인 발데리안 가문의 위세를 이용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니 말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게… 분명 발데리안 가문에서 해 올 ‘하나’의 계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였다.
“후우~ 자네 입장이 아주 편해 보이는군.”
“오셨습니까? 선배… 님이 아니라, 도련님이군요.”
“그래, 아주 바쁜 처지이지. 아무튼 축하하네. 아주 큰 공을 세웠구만. 기사의 수급 50개, 이게 보통 가치가 아니지.”
“그건 하이디 경을 칭찬하십시오.”
“어차피 자네가 그녀의 스승이자 주인 아닌가? 그녀의 무예를 봐준 것도 자네고, 그 마갑주인지 하는 마도구를 제작해 준 것도 자네이니 말이야. 정말 우리 가문에 복덩이가 제대로 들어왔어. 하하핫.”
한참 일을 하던 케드론이 합류해서 베오날드의 옆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래도 가문의 후계자인 만큼 전후 처리에 집중적으로 관여하면서 배워야 했기에 많이 힘들었으리라.
그리고 자연스럽게 베오날드에 대한 이야기도 가주와 했을 것이고, 발데리안 가문에서 빼앗길 수 없는 인재 1순위로 가치가 확 폭등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네만…….”
“혼약 이야기겠군요.”
“간파당했나?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르나?”
“당연한 과정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인재를 붙잡아 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베오날드 자신도 자주 써먹던 방법인 만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케드론은 베오날드가 눈치채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딱히 정실로 맞으라고까진 안 하겠네. 다만 우리 가신들이라든가 다른 기사들에게 우리가 자네를 총애할 명분이 필요해서 말이지.”
“가문의 유물, 블랙 드레이크 토벌, 마갑주 개발… 거기에 이번 전쟁의 전공까지 있는데도 부족합니까?”
“그래서 더욱 그렇지. 능력으로 경쟁이 안 되는 놈들이 결국 물어뜯을 건 하나뿐이지 않겠나? 자네의 유일한 결점 말이지.”
“혈통… 말이군요. 후훗.”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지만, 정말로 귀족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이라고 또다시 말하게 되어 버린다.
그가 다른 곳에서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계속 지적될 부분이기도 했는데, 유일하게 막을 방법은 명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발데리안 가문의 가족이 되면 적어도 발데리안 가문의 영향력이 있는 곳에서는 아무도 언급할 수 없는 금기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 취향을 알려 주게. 미리미리 배우자를 알아봐야 하거든. 아, 물론 정실까진 아니어도 되네. 일단 약혼이라도 맺어 놓는 게 서로의 입장으로서는 좋을 테니. 이 정도면 우리도 많이 양보한 셈인데, 어떤가?”
‘으음… 조금 곤란한데 말이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베오날드로선 발데리안 가문과 결혼하는 것이 꺼려졌다.
전생에 그는 발데리안 가문의 주인으로서 발데리안 가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에 500년 전에 이미 자신의 딸을 가주인 케르웰의 후계자와 결혼을 시켜서 돈독한 혈맹을 맺어 둔 것이었다.
‘즉, 알고 보면 이 녀석들은 그 케르웰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내 후손이기도 하다는 거지. 그런데 거기에 내가 다시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건…….’
하나 500년간 쭉 같은 혈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없고, 거기에 혈통의 순수성은 이미 500년간 피가 섞이면서 옅어졌을 테지만, 그래도 베오날드는 께름칙했던 것이다.
물론 꼭 필요하다면 해야 할 일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근친 비슷한 혈통 보전을 하면 꼭 자신의 부친이었던 그 망할 벨릭스 폰 노이멀이 떠올랐기에 베오날드는 더더욱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 안 되면 하는 수밖에 없지. 여기까지 해 놓고 발데리안 가문을 버릴 순 없으니 말이야.’
결국 제국 중추에 들어가려면 발데리안 가문의 힘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발데리안 이상의 좋은 혼사처를 찾아야 했는데, 지금 이 제국에서 발데리안 가문보다 위세가 뛰어난 곳은 크멜 가문과 황실밖에 없을 정도로 선택지가 좁았다.
‘젤시 황녀가 있긴 하지만… 무리지, 무리.’
기껏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자신을 믿고 황실을 뛰쳐나와서 재능을 빛내고 있는 그녀에게 혼약을 강요할 순 없다.
그래서야 그 망할 벨릭스와 똑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기에 베오날드는 금방 고개를 돌리며 생각을 지웠다.
“으음~ 제 취향이라면 뭐, 전 일단 딱히 외양을 보지 않습니다.”
“주변에 그렇게 미녀를 두고 있는데?”
“제가 보는 요점에 맞기 때문에 정원에 받아들인 겁니다. 아, 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죠.”
“그래서, 바라는 게 뭔가?”
“‘재능’. 분야는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가진 여성을 원합니다. 그것만 충족된다면 인종의 구별, 나이, 아인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성격은 조금 보겠지만, 절 굴복시킬 정도의 재능이라면 기꺼이 그 성격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베오날드의 황당한 발언에 케드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성 취향을 물었는데 대체 왜 ‘재능’이 나오는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키나 외모 같은 것을 보았을 건데, 케드론은 당황한 눈빛이었지만 그가 늘 이랬다고 생각하면서 간신히 멘탈을 잡고 확인의 과정을 한 번 더 가지기로 했다.
“그… 정말인가?”
“예.”
“…아인종이라고 해도 범위가 넓은데, 어디까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지능이 있으면 됩니다. 말이 안 통하면 그냥… 짐승이겠지만요.”
“자네, 이건 엄연히 결혼에 대한 걸세. 정말 그걸로 좋은가?”
“예. 그거면 됩니다. 심플하고 깔끔한 조건이지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베오날드의 조건에 직접 이야기하는 케드론은 물론이고,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하이디와 셀리나도 기겁한 표정으로 베오날드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조금… 충격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저 같은 걸 사랑해 주시는 것도 납득이 가네요.”
“무슨 말이에요? 이 관리 안 해도 찰랑거리면서 생기가 넘치는 금발, 뽀얀 피부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단지 체구와 키가 커서 호불호가 좀 갈릴 수 있지만, 충분히 미인이잖아요. 이 기만자 같으니!”
“엑? 아… 그… 죄송합니다.”
뒤에서 나누는 기괴한 만담을 베오날드도 들었지만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사람마다 취향과 기호가 다른데, 자신의 것이 어떻든 누가 말하든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뭔가?”
“제 경우는 ‘재능’만 있으면 웬만한 건 다 OK이지만, 상대측에서 절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녀가 아무런 부담 없이 거절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으으음… 보통은 반대이지 않나? 아무튼 알았네. 그 점을 꼭 고려하도록 하지.”
이미 앞에서 놀랄 부분이 너무 많아서인지 뒤에 베오날드가 덧붙인 요구는 수수하게 받아들이는 케드론이었다.
그 뒤로도 이 전쟁 뒤에 있을 정세 이야기나 케드론이 자신의 마갑주를 만들어 달라는 말에 베오날드가 프레임에 들어가는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의 가격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또 기겁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멀리서 병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오는 것을 발견한 두 사람이었다.
“케드론 도련님! 긴급 소식입니다!”
“무슨 일이지?”
“현재 남쪽에서 전투 중인 가르칸 공화국과 크멜군, 제국 수도군의 싸움에서 긴급 소식이 왔는데 그게…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가르칸 공화국 군을 향해서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에서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라는 듯 케드론은 벌떡 일어나면서 놀랐지만, 베오날드는 예상했다는 듯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착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 역시 정치적 입장 때문인가 보군. 나도 뭔가를 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겠지.’
“놀라우시겠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유일한 특급 기사인 크멜 공작이… 그… 그… 가르칸 공화국의 지도자 노이멀 총리라는 하프엘프와 일대일 대결! 크멜 공작님이 우위를 잡으셨으나 그 잡종 엘프 년이! 비겁하게도 신성한 대결 중에 독을… 독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크멜 공작은 현재 쓰러지셨고, 간신히 구출해 냈지만 지금 중태라고 합니다!”
전령의 입에서 나온 ‘독’이라는 단어에 이번엔 케드론은 물론이고 베오날드도 살짝 놀람을 표현했다.
사실 기사님들이 말하는 기사도니 어쩌니 하는 건 둘째 치고 전쟁터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상대는 기사가 아니기에 그런 것에 저항이 없었을 거라 별스럽지 않았지만, 문제는 누구에게 썼냐는 것이었다.
‘…특급 기사에게 통하는 ‘독’이라고?’
특급 기사. 인간을 초월한 인간인 기사들 중의 정점이자 최강의 인류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오러의 제어와 숙련, 검술의 힘, 육체의 완성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초인’. 그들에게 독이라는 건 그저 하찮은 발악에 지나지 않으며 보통은 오러와 호흡만으로 독의 힘을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직접 혈관에 구멍을 뚫어 내보내거나 태워 버리는 등등, 인간 같지 않은 짓으로 독을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에 특급 기사급 존재에게는 독이라는 단어가 먹히질 않는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래서 지금 중태에 빠졌는데, 신관들도 무슨 독인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피부에 보랏빛 뱀의 비늘같이 생긴 반점이 올라오는 이상한 증상이……. 아무튼 이대로 있으면 죽을 거라고 다들 난리입니다!”
‘보랏빛… 뱀의 비늘 반점이라면……!’
“자, 자네, 어딜 가나?”
익숙한 증상에 머리가 번뜩인 베오날드는 하던 일을 놔두고 갑자기 말을 타고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특급 기사를 쓰러뜨린 ‘독’의 정체. 긴가민가했지만, 증상을 들으니 어떤 것인지 확신이 서는 그였다.
‘보랏빛 뱀의 비늘’ 반점에서 더 많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특급 기사도 쓰러뜨리는 그 독은… 바로 베오날드의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