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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43화 (143/259)

[143화]

그리고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과 반대로 발데리안군의 희생은 약 20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심지어 여기서 입은 피해도 대부분 밀밭에 불을 지르고 제때 빠져나오지 못해서 휘말린 멍청이라든가, 공을 서두르다가 적 기사 혹은 적 병사들에게 포위당해서 죽은 멍청한 놈들뿐이었다.

“대승리군요.”

“이딴 놈들 상대론 이겨도 별로 즐겁지 않네. 흠…….”

“하하하, 그거야 그렇죠.”

승리한 이후 베오날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묵묵히 전장 정리에 힘쓰고 있는 하이디를 바라보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반응하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갑주에 대해 떠올린 것이리라.

“아무튼 이긴 건 이긴 거고, 어디 저 친구에게 자네의 작품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군.”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죠. 하이디! 잠시 이리로 오거라!”

“예! 베오날드 님!”

전투가 끝난 뒤의 전장 정리까지가 전쟁이었기에 여전히 ‘마갑주’를 입고 있던 하이디는 베오날드의 부름에 잽싸게 달려와서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그녀의 마갑주는 밤새도록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가득했고 손상도 꽤 심각했다.

덧댄 블랙 드레이크의 가죽이 찢어지고, 술식을 새긴 갑옷 판이 부서지고, 일부 부위는 프레임이 보이는 등등… 거창하게 말한 것치고는 한 번의 싸움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커 보인 것이다.

“으음… 손상이 심각하군. 한 번 싸웠는데 이건 심하지 않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하이디, 네 전공이 어느 정도지? 병사는 빼고 기사급만 쳐서 몇 명이지?”

“한… 50명 정도 됩니다. 하급, 중급의 세세한 구별이 되지 않지만 말입니다.”

“50명? 그,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니, 혼자서 50명을? 기사급만 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을 하는 발데리안 백작이었지만 하이디의 눈빛엔 거짓이라곤 일절 없어 보였다.

게다가 혹시나 싶어 참전했던 다른 기사들을 불러서 진술까지 들어 보았다.

“적 기사들을 막으려고 가니까 죄다 시체로 가득하더군요.”

“제가 봤습니다. 혼자서 백장미 기사단과 맞서 싸우더군요. 물론 치열했지만, 결국 하이디 경이 이겼습니다.”

“그리폰을 탄 기사는 한 명뿐이니… 부정할 수가 없지요.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상급 기사급 인재를 데려오신 겁니까? 백작님.”

기사들과 병사들의 진술을 들으니 더더욱 놀랄 일의 연속이었다.

너무 큰 전공이면 다른 이들이 시샘할 가능성이 있어서 진술에 거짓이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감히 ‘상급 기사’급 기사의 전공을 속이려 들었다간 후환이 두렵기에 다들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국 발데리안 백작은 그녀가 정말로 홀로 50인의 기사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 크흠! 50명… 게다가 그중 심지어 백장미 기사단 20명을 한 번에 상대했다면… 크흠! 흠! 뭐, 엄청난 공훈이군.”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님. 허어~ 그러면 뭐, 납득 가능하군요. 이렇게 손상된 게 말이죠.”

“사실 초반에 혼란스러울 땐 쉬웠지만 그분들도 역시나 기사였던지라. 명예롭게… 그리고 치열하게 싸웠었습니다.”

말을 하며 하이디는 백장미 기사단의 최후를 떠올렸다.

승산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가문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하이디를 쓰러뜨리려고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전쟁을… 싸움을… 우습게 보지 마라. 쿨럭!’

‘……!’

기사단장은 자신의 몸을 희생양으로 삼아 하이디의 창에 스스로를 관통시키곤 그대로 붙잡아서 움직임을 봉쇄했고, 다른 기사들도 하이디를 죽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서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을 해 왔다.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인 하이디는 안색이 파래질 정도로 당황했었고, 영락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마갑주’였다.

“정말로… 이 갑주가 아니었으면 전 아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겁니다.”

‘오러를 실은 검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이 가죽… 설마?’

‘제길! 어떻게 이런 일이!’

그와 동시에 백장미 기사들의 분함과 절규의 순간이 훤히 떠오르는 하이디였다.

단장의 희생을 딛고 드디어 이 괴물 같은 기사를 잡나 싶었지만, 그들의 오러를 실은 검은 블랙 드레이크의 가죽에 막히거나 설사 가죽을 뚫었더라도 위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술식이 새겨진 갑옷 판에 막혀 버렸던 것이다.

“일반적인 갑옷이었으면… 전 다섯 번은 죽었을 겁니다.”

“…라고 합니다. 아무튼… 보자, 블랙 드레이크의 비늘 가죽을 철판에 붙인 게 신의 한 수였군요. 둘을 붙여 놓은 덕분에 이런 시너지가 날 줄이야. 오오오…….”

베오날드는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 것에 눈을 빛내면서 갑주의 판을 하나 떼어 내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블랙 드레이크의 비늘 가죽도 충분히 튼튼한 것이지만 결국은 가죽. 오러를 실은 검에 맞으면 가죽 특성상 찢어져서 벌어지기 쉬운데, 그 아래에 대 놓은 술식을 새긴 철판 덕분에 더욱 견고해진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준다라. 이 원리는… 응용해 볼 만하겠군요. 흐음… 단순히 술식을 새기기 위해서 철판을 쓰고, 가볍게 하기 위해서 붙인 건데…….”

전생에선 워낙 돈이 많아서 이런 한계까지 짜내는 불필요한 절약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런 걸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새로운 발견을 해서 기분이 매우 좋은 베오날드였다.

“이거 더 좋은 개선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흠흠…….”

“크흠!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더 자세히 하도록 하세. 할 일이 매우 많으니 말이야. 물론 자네와 하이디 경의 공훈도 절대 잊지 않겠네. 그러니 나중으로 넘기세나.”

“예, 그러지요.”

전쟁에서 이기고 난 뒤가 더 할 일이 많았고,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 대부분의 병력들이 사기가 떨어져서 각자 자기 영지로 흩어진 상황. 이대로 두면 재편성할 수도 있으니 빠르게 항복 서류를 받아야만 했다.

기사들의 시신을 미끼로 하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각 영지로 전달하고 협상해야 하는 만큼 매우 바쁜 일정이었다.

“후우~ 우리 쪽이 쉽게 이겼으니 이제 그 망할 크멜 공작과 제국 수도군만 잘해 주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불안해지는데요.”

“전령을 보냈으니, 소식이 돌아올 때까지 해야 할 일부터 하겠네.”

“저는 그럼 마갑주의 수리와 보수를 비롯해서 개선안 연구나 마치도록 하죠. 그럼…….”

베오날드가 물러나자 곧바로 발데리안 백작은 다른 가신들을 불러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2배 차이의 병력을 단숨에 이겨 내고 군대를 해산시켰고, 각 영지들에게 항복을 받으면 사실상 전쟁은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재편성할 여유를 주지 않고 항복 서류를 박아 버려서 더 이상 반항을 못하게 하면 병력이라고는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와 바니로 백작 직할군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 쪽 승전보를 빨리 전하고, 가능한 한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많은 영지에 시신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항복하라고 전하게. 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공격을 가겠다고 하고 말이야.”

승전한 발데리안군의 소식은 곧바로 계속해서 대치하며 소모전만 하고 있던 크멜군, 제국 수도군 연합과 가르칸 공화국 군대에 전해졌다.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 연합은 발데리안군의 승전에 이제 전쟁의 판도는 완벽히 자신들에게 넘어왔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한편 가르칸 공화국 진영에서는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 것에 당연히 기분 나빠 해야 했지만, 노이멀 총리는 예상했다는 듯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이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어중이떠중이급 남부 군대로는 쇠락했다곤 해도 ‘그분’의 최정예였던 발데리안 가문의 군대를 못 이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진 것 같네요. 그래도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추수 후 야습 한 번에 깨졌다고 합니다.”

“추수? 참 나… 전쟁 중에 대체 무슨 짓이람? 어이가 없어서~”

세세한 내막까진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노이멀 총리는 그저 어처구니없어할 뿐이었다.

어쨌든 결론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바니로 백작의 5만 군대가 깨져 버렸으니, 가르칸 공화국으로선 더 이상 헛된 싸움으로 병력을 낭비할 수 없는 처지였다.

“쩝, 이러면 재미없는데… 으음~ 이렇게 해 볼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노이멀 총리는 곧바로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에게 보낼 전갈을 쓰기 시작했다.

해당 전갈의 내용은 휴전 협정을 제안하는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그녀는 한 가지 술수를 쓰는데, 5만의 대군을 물리친 발데리안 백작가에 대한 칭찬을 가득 적는 것이었다.

일종의 이간책(離間策)으로, 발데리안 가문과 크멜 가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온 계책이었다.

“보자~ 이렇게 해서 전쟁을 끝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번 전쟁의 최대 공로자가 발데리안 가문이 되어 버리면~ 후훗~”

‘상대가 허접하긴 했어도 서류상으로 보면 2배나 되는 병력을 신묘한 전술과 전략으로 이겨 낸 명장으로 칭송받을 만하기도 했고,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라고 하고 지금 백기를 들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크멜 공작과 제국 수도군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참고로 이쪽 전선은 현재 가르칸 공화국 군대 3만 대 5만 5천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무능해 보이게 되면 황제든 누구든 이 정치적 떡밥을 잘 이용해 먹을 것이다.

“어차피 발데리안군은 지금 할 일이 있어서 바쁘니 이곳에 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거고, 그러면 거기다가도 항복을 보낸다고 해야겠네요. 후후훗…….”

무릇 전략이라는 것은 상대가 낚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공훈, 정치, 승리와 패배 뒤 얻을 것과 잃을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야 상대를 자신의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자신에게 이 모든 지혜와 지식을 알려 준 부친에 대해 생각하며 노이멀 총리는 전갈을 마무리하고서 곧바로 크멜 공작 측에 보냈다.

“…이 망할 년이 지금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노이멀 총리의 노림수는 완벽하게 크멜 공작의 가슴에 꽂히게 되고, 그는 혈압이 심히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전갈을 찢어 버렸다.

더 자세히 읽어 볼 필요도 없는 명백한 도발로 항복 의사는 위장인 게 틀림없다는 걸 금방 알아챈 크멜 공작이었지만 이 떡밥은… 솔직히 말해서 안 먹을 수 없는 떡밥이었다.

“빌어 처먹을! 망할 발데리안 놈! 그동안 펑펑 놀다가 황제의 전령이 오자마자 단 하루 만에 5만이나 되는 적을 찢어발기다니! 바니로 백작 아래엔 어떻게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건가?”

“애초에 그 자리에 발데리안군이 아니라 우리가 있었어도 찢어발겼을 겁니다. 공작님, 진정하십시오.”

“후우… 그렇지. 진정해야겠지.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아.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나쁜 건 아니지만… 발데리안 놈의 콧대가 얼마나 높아질지 정말 걱정되는군.”

질에서 차이 나지만 2배 차이의 병력을 쓰러뜨린 건 사실이고, 지금 이 시간에도 주변 영지들의 항복 서류를 받아 내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황제에게 가져가면 결국 큰 공훈이 되어 앞으로 정치적 포지션의 유리함을 가져갈 수 있는 반면, 자신들은 기껏 전쟁하러 와서는 소모전만 하고 아무런 이득도 못 건지는 사태가 되는 게 불쾌한 크멜 공작이었다.

“으으으으음…….”

“공작님, 일단은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쟁은 둘째 치고… 겨울이 오면 볼레아 왕국 놈들이 내려오잖습니까? 어차피 원래 전쟁의 명분이었던 식량 안정화는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밀밭 절반이 불탔고, 심지어 저 위쪽엔 더 많은 밀밭이 타 버리고, 거기에 발데리안군이 전략상의 행동으로 추수까지 해서 식량으로 썼습니다. 빨리 올라가서 겨울은 물론 내년 봄, 여름까지 대비해야 합니다.”

“으으으으으음!”

크멜 공작은 분함에 몸을 떨면서도 부관의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분노해서 제국 수도군이랑 총력전을 벌여서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하면 모를까, 병력만 소모해 버리면 이득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렸지만 크멜 공작은 금방 냉정해질 수 있었고, 인간은 타협할 줄 아는 생물이었다.

“잘 알았네. 그래, 미래가 가장 중요하지. 그런 만큼… 지금 우리는 전공(戰功)도 필요하네. 우리는 무가(武家)이지. 크멜 가문, 검의 명가, 기사의 명가, 제국을 지키는 방패 중 하나. 그 명성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네.”

“그, 그러면…….”

“하나 자네 말대로 미래도 생각해야겠지. 그러니 내일… 이 전쟁, 처음이자 마지막 총력전을 개시하겠네.”

총력전. 모든 병력을 투입해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를 일컫는다.

서로 간만 보던 소모전에서 벗어나 데리고 온 모든 병력을 투입해서 싸우는 전투.

가능하면 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았지만, 그렇게 되면 무가로서 쌓은 명성이 크게 손상되기 때문에 최소한 싸워서 이길 수 있는데 시간이 모자랐다고 하는 모습 정도는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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