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그날 저녁.
해가 지고 난 뒤, 바니로 백작의 진영에선 오늘도 추수를 마친 병사들이 모두들 지친 몸을 뉜 채 빨리 전쟁이 끝나길 빌거나 술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이런 고된 추수 작업을 하고 난 이후에는 독한 술을 마시며 떠들썩하게 보내야 제맛인데, 지금 저 반대편에 적군이 있으니 그러지 못하고 야숙을 하면서 쉬어야 하는 신세였다.
“저저저! 염병할 자식들, 언제까지 놔둘 건지. 참 나! 미쳐 버리겠네. 윗분들 생각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야. 멀쩡히 추수철 다가온 밀밭을 절반 태워 먹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저놈들이 우리 밀밭을 홀라당 털어 먹고, 그걸로 생밀빵까지 구워 먹네?”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거지! 젠장!”
똑같이 추수를 해도 발데리안군에게는 약탈품이니 그냥 제분해서 병사들에게 구워 먹게 하는 반면, 바니로 백작 휘하의 군대들은 얄짤없이 곡식을 그 영지의 주인에게 바치고 군 보급품을 받는 식으로 노동의 대가를 얻었다.
한데 어느 시대나 그렇듯 군용 식사는 더럽게 맛없거나 먹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었고, 하루 종일 고된 노동으로 지친 그들에게 주어지는 식사는 보급용으로 쓰이는 벽돌만큼 딱딱한 빵과 소금에 염장한 고기로 끓인 스튜였다.
한데 반대편 진영에서는 아주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매일매일 풍겨 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아~ 전쟁할 거면 그냥 하든가~ 아니, 우리 병력이 더 많다며? 왜 가만히 있는 거래?”
“아무튼 빨리 잠이나 자러 가자. 이제 다 어두워졌네. 에휴~ 내일도 일찍 일어나서 일해야겠지.”
“맞아, 맞아. 불침번 서기 전까지 잠이나 자 둬. 아침에 또 못 일어날라.”
“젠장! 집이 바로 코앞인데 밖에서 이 모양이라니! 젠자아아아아앙!”
그들은 결국 투덜거리기를 마치고는 텐트로 돌아갔다.
계속 떠들어 봐야 일개 병사인 그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피로한 몸을 눕히고 잠이나 자기로 한 것이다.
강은 적들이 차지하고 있기에 씻는 것도 자신들은 마음대로 하지 못해 더더욱 처량한 신세였다.
“불이야!”
그렇게 잠이 들려는 그들에게 난데없이 들린 화재 소식. 막 잠들려던 그들은 급히 신발을 신고 무기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외침이 들린 곳으로 향하자 내일 추수하기로 한 밀밭을 새빨간 화염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건조한 가을이긴 했지만 특히나 조심했기에 불이 날 이유가 없었는데, 활활 타오르자 사방에선 난리가 났다.
“아이고! 저기도 불타 버리네. 이거 어째?”
“아니, 불이 어떻게 난 거야?”
“빨리 영지에 연락해서 물! 물을 가져와야…….”
구구구구구궁!
“와아아아아!”
어스름한 밤을 밝히는 화재의 불, 거기에 대기를 울리는 묵직한 진동음과 함성. 전쟁을 알리는 소리들이었다.
바니로 백작 휘하의 병사들은 즉시 무장을 하고, 십부장과 백부장들이 병력을 소집해서 기습에 대처하려고 하지만 화재에 대한 대응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와중에 기습을 당한 것이라 속수무책이었다.
“젠장! 어떻게 이런…….”
“이걸 어떻게 해야?”
“일단 다들 진정해라! 다들 모여! 모이란 말이다!”
지휘관 격들인 기사들이 나서서 제대로 통제를 해야 했지만, 실전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혼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조직적인 훈련과 상황 대처에 따른 매뉴얼이 전혀 없는 군대로서는 한 가지 일에도 대응하기가 쉽지 않은데, 밀밭의 불과 적군의 기습 둘 다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약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님.”
“그러니 2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은 게지. 한 번 싸웠을 때도 우리 전열에 흠집도 안 나지 않았더냐?”
‘…상대가 너무 약하네.’
혼란에 절규하며 불타오르는 바니로 백작군의 진영을 바라보는 발데리안 백작, 케드론, 베오날드는 각기 다른 감상에 빠졌다.
일단 작전 내용인 기습은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상대랑 싸울 생각이 없는 척하면서 대치하긴 했어도 발데리안군은 경계와 화재에 대한 대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다.
일단 국경 밖에 적대 국가를 두고 있고, 게다가 500년의 난세의 혼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은 발데리안 가문과 너무나 격차가 큰 것에 충격이 컸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궁지에 몰린 쥐에게 물려서 상처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이래선 자네의 야심작이 활약 못하지 않겠나?”
“아뇨. 그건 또 별개의 문제죠. 아무튼 보시지요. 어두운 밤이라서 더 잘 보이는군요.”
고오오오!
밀밭을 태우는 붉은 화염의 빛이 비추고 있지만 해가 져서 여전히 어두운 밤. 베오날드가 가리키는 곳에선 황금의 섬광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블랙 드레이크’의 가죽을 씌운 검은 갑주이지만 그 틈새로 황금의 오러가 찬란히 빛을 발하면서 어둠을 갈랐고, 거기엔 무장한 그리폰을 탄 하이디가 적 기사들을 노리면서 마음껏 적진을 활보하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의 무(武), 이식(二式)-마랑질주(魔狼疾走).”
늑대의 형상이 깃든 신속의 창격. 블랙 드레이크의 뼈와 소재로 만든 대형 창이지만 전혀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싸우는 그녀는 주로 고급스러운 텐트와 천막, 깃발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휩쓸고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적들을 격파해 나갔다.
“괴, 괴물……! 크악!”
하이디는 공포에 질린 적군을 향해 자비 없이 창을 찔러 넣었다.
기사로서 전쟁터에 선 이상 어설픈 감상은 금물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마갑주의 성능을 확실히 체감 중이었는데, 강철판의 두께를 줄이고 블랙 드레이크의 소재로 덧대서 방어력은 더 올라가고 무게가 줄어든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이젠 알테리오를 타고 다닐 수 있어. 그래도 달리는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꾸우?
“아무것도 아니다. 알테리오, 계속 가자. 베오날드 님의 승리를 위해!”
꾸아아아아아악!
히이이히히히힝!
그리고 이어지는 알테리오의 포효에 또다시 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말을 겁먹게 하는 알테리오만이 가지는 이 가치는 아군 기사들과 함께 편성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혼란 상황에서 투입하니 그 효과는 시너지를 내고 있었다.
말들은 대부분 기사의 텐트에 매여 있었는데, 알테리오가 포효하며 질주하자마자 요동치면서 도망치려고 발악했던 것이다.
“더 이상 네놈이 설치게 두지 않는다, 이 괴물아! 우리 백장미 기사단이 상대해 주마!”
‘드디어 제대로 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나왔군.’
어느 조직이든 자기 할 일에 충실하며 우직한 자들이 있기 마련. 자신들을 백장미 기사단이라고 소개한 새하얀 백마 위에 갑주를 입은 기사 20명가량이 한참 군영 내를 헤집고 다니는 하이디를 막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기꺼이 상대해 드리겠소! 다만 괴물은 심하지 않소? 나 또한 주군을 섬기며 최선을 다해 싸우는 기사요!”
“흥!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싸우는 자가 어찌 기사도를 입에 담는단 말이냐!”
“전쟁의 도리 앞에선 비겁이란 단어는 그저 변명일 뿐! 승리하고 싶다면 어서 덤비시오!”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전원, 돌격!”
20명의 기사가 일제히 검과 창을 들고 오러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하이디 또한 검은 갑옷에 황금빛 오러를 번쩍이면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단을 상대로 홀로 돌진하며 창을 휘둘렀다.
“죽어라! 아무리 네놈이 괴물이라고 한들 검에 찔리면 죽… 크억!”
“크어억!”
“끄아악!”
용맹하게도 가장 전열에 섰던 기사 셋이 하이디를 향해서 방향을 나누어서 돌진했지만, 그녀가 휘두른 거창에 마치 낙엽이 쓸리듯이 말과 함께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뒤따르던 기사들은 기겁하면서도 정면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좌우로 나뉘어 빠져나가서 그녀를 포위했다.
“정면이 안 되면 측면과 후방을 노리면 된다!”
“죽어라! 이 괴물아!”
‘계속 괴물! 괴물! 내가 어떻다고!’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살기를 띤 채 다가왔지만 하이디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계속 괴물이라고 부르는 백장미 기사단에 대한 분노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녀는 알테리오의 옆구리를 발로 살짝 두드려 신호를 주었고, 알테리오는 알았다는 듯 한쪽 날개를 펼치고서 제자리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듯 뛰어올랐다.
“아니! 어, 어떻게 저런 도약력이?”
‘원래 하늘을 나는 게 그리폰이니까!’
포위망을 만들어서 돌진해 오던 기사들은 오히려 벙찌는 상황. 그리고 그들은 공격하기 쉽게 모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하이디는 그대로 자유낙하의 힘과 함께 오러를 모아 집중해서 지상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황실 기사단의 무(武), 일식(一式)-사자분신(獅子奮迅)!”
“크으윽! 이런 젠장!”
콰아아앙!
눈치 빠른 기사들은 기수를 돌려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 시간에 하이디와 알테리오는 땅에 도달했고, 오러의 폭발에 뭉쳐 있던 기사들은 그대로 쓸려 나가떨어졌다.
백장미 기사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리 많은 전쟁터를 돌아봤다고 할 수 없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광경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뭐냐… 넌 대체…….”
“도망간다면 쫓지 않겠습니다. 이미 전황은 기울어졌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
점점 더 크게 번지는 화염, 그 속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들. 5만이나 되는 대군은 결국 화공을 끼얹은 기습 한 번에 지리멸렬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하이디만 고려하는 게 아닌 듯 백장미 기사들은 슬쩍 단장의 눈치를 보았지만,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는 단호하게 검을 뽑아 하이디에게 겨누면서 말했다.
“웃기지 마라. 기사 된 자, 승산이 없다고 등을 돌리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건가? 발데리안이나 크멜 같은 명문가가 아니고서야 내가 도망치면 내 남은 가족과 가문의 수치가 된다.”
“애초에 저도 발데리안이나 크멜의 기사가 아닙니다.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나을 것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그 갑주라든가 쓰는 창, 발데리안 가문의 것이 아니긴 하군. 그럼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아주 좋은 주인을 두고 있나 보구나.”
“예, 저에겐 정말로 최고의 주군이십니다.”
“…그런가? 그러면 너는 그분께 충성을 다하라. 나는 나대로… 우리 가문과 명예를 위해 기사로서 충성을 다할 테니! 자! 간다!”
백장미 기사단장의 외침과 동시에 남은 14명의 기사들이 하이디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들은 이미 죽음의 각오를 다진 눈빛을 하고 있었고, 하이디 또한 작지만 엄연히 무가(武家)의 딸이었기에 그 심정을 이해하고는 황금의 오러를 포효시키면서 창을 고쳐 잡고 알테리오와 함께 돌격했다.
그렇게 5만 대 2만 5천이 대치하고 있던 발데리안군과 바니로 백작군의 전투는 단 한 번의 화공을 포함한 기습과 약 반나절의 싸움 끝에 2배나 되는 병력은 결국 수수깡처럼 무너지고 대부분이 각자 자신의 영지로 도망치게 되었다.
발데리안군이 다음 날 시신을 모아서 사망자 수를 집계한 결과 그 수가 약 7천에 이르렀다.
숫자만 보면 그리 큰 피해가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안엔 무려 기사의 시체만 약 300구가량 끼어 있었고, 포로로 잡은 귀족과 기사들 또한 수십에 이르렀으니 사실상 바니로 백작군을 완전히 붕괴시킨 거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