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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41화 (141/259)

[141화]

“발데리안 백작님, 현 전쟁 중인 상황에서 너무나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데 지금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는지요?”

“허허, 알고 있습니다. 가르칸 공화국 놈들이 비열하게 개입을 했다고 하지요? 뭐, 그래도 제국의 유일한 특급 기사인 크멜 공작이라면 너끈히 이겨 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5만 병력의 발을 묶는 것만 해도 벅차서 말이죠. 허허허.”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전쟁은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디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허허허.”

가벼운 주고받기로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양측이었고, 황제의 전령은 예상대로 발데리안 백작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곳에 왔을 때부터 병사들은 전투 준비나 긴장감이 있다기보다는 곡식을 탈곡하고, 빵을 구워 먹는 등등 뭔가 한산한 모습이었기에 그런 예감이 들었는데, 실제로 확인하게 되자 황제가 답답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다이나 왕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준비하는 발데리안 가문의 군대라면 저쪽 허수아비 5만과 싸워 이기거나 뚫고서 합류하는 건 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의 경과는 쉽게 단정해선 안 됩니다. 본래 단기전인 전투가 지금 길어졌고, 또 가르칸 공화국의 개입까지. 변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적극적으로 싸우실 생각이 없다는 겁니까?”

“이미 5만의 발을 묶는 역할만 해도 병력의 2배 값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뭘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겁니까? 괜히 무리해서 가문의 전력만 깎이면 그거야말로 언어도단이지요.”

겉으론 다혈질처럼 보이는 발데리안 가주였지만, 전쟁과 가문의 명운이 걸리면 누구보다도 능글맞은 능구렁이가 될 수 있는 자였다.

귀족 가문답지 않은 점이 많았지만, 이 점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분명한 귀족 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무언가 이 사냥개에게 던져 줄 만한 뼈다귀가 있어서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있긴 합니다만, 사실 폐하께선 오히려 조건을 듣고자 하심이라서 말이지요.”

“허~ 조건을 듣고자 함이라. 그렇다면… 이쪽에서 바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 달라는 거군요.”

현대의 말로 하면 ‘선 제시’라고 줄여서 말할 수 있는 문답 과정을 밟는 이들이었다.

황실 측에서는 현재 적절한 유효 카드가 없기에 먼저 발데리안 가문 측에서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방향성을 잡은 것이었다.

애초에 파벌과 노선이 달라서 뭔가 혈통이라든가, 다른 메리트를 줄 수 있는 게 적다는 게 문제였다.

“음, 바라는 것을 말하라고 하셔도 말입니다. 약조라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보장’이 기본적으로 되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도장을 찍었다고 해서 계약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 내의 사안이 교환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보장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아, 알고 있습니다, 발데리안 백작님. 황실에서는 가능한 것이라면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말씀해 보시고 서로 타협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고 말입니다.”

“그럼 어디 말이나 해 보지요. 최근… 우리 가문에 봉인되어 있던 유물의 봉인을 풀었습니다. 한데 거기에서 나온 자료에 의하면 우리 가문 영지에 있는 그 ‘성지’인지 나발인지 하는 곳에 가문의 유산이 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아, 그 교단의?”

“예, 교단이 관리하는 그 영역이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적으로… 수백 년 전 저희 가문은 과거 통일 제국을 다스렸던 ‘언급해선 안 되는 그자’의 부하였으니 말이죠.”

“아아… 으으음…….”

“뭐, 말이나 해 보라고 해서 해 본 겁니다. 크흠!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저는 제장들을 모아서 작전 회의를 해야 해서 이만. 크흠!”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라는 의사의 간접 표현을 하고 먼저 일어서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그거 외에는 다른 건 교섭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해 버린 그는 이걸로 의사 표현을 마친 거나 다름없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전령은 우선은 황제의 의사를 물어보기 위해 재빨리 발데리안 백작의 요구를 적은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

전쟁 25일 차.

드디어 발데리안 가문에서 고대하던 교대 병력이 도착했다.

부상자와 최전열에서 싸우느라 지친 병사들을 위주로 교대해 주는 것과 식량, 무구와 같은 물자 운송도 겸해서 내려온 1만의 병력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발데리안 백작은 예상보다 빨리 온 교대 병력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허, 이거 꽤나 서둘러서 왔군. 아무리 급하다곤 해도 내려온 병력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뻗는 건 질색인데 말이야.”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다소 서둘렀습니다.”

“쩝… 그렇게까지 좋지 않은 건 아니지만. 크흠! 아무튼 병력들을 쉬게 하고, 돌아가는 병력 인솔도 잘 부탁하네.”

“예, 알겠습니다, 백작님. 아, 그리고 가문의 유물을 해독해 낸 베오날드 님이 지금 같이 와 있습니다.”

“뭐라? 마도구인가 뭔가 만든다던 친구인데… 지금 어디에 있나?”

병력들을 인솔해 온 기사의 말에 놀란 발데리안 백작은 즉시 베오날드에게 향했다.

대체 왜 이 전장에 왔는지 의문이기도 했고, 유물 문제라든가 블랙 드레이크를 잡은 것을 비롯해서 물을 게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자네,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아, 백작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물의 봉인을 해제해 줘서 아주 고맙네. 한데 마도구인지 뭔지 만든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전쟁터로 온 겐가?”

“블랙 드레이크를 잡았다는 소식 들으셨지요? 어느 정도 완성도가 나오기도 했고, 실제 전쟁에서 효율이 있는지 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놈의 고기입니다. 당연히 발데리안 가문의 주인이신 백작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마법으로 보존해 놨으니 바로 드시면 됩니다. 또 이건 놈의 가죽으로 만든 담뱃갑입니다. 검은 가죽에 어울리도록 루비와 황금을 써서 장식을 더 돋보이게 했습니다. 아랫사람의 성과는 윗사람의 성과이기도 하며 소문이 이미 퍼졌을 텐데, 가주님이 그 증거를 갖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니까요.”

“어, 으으음… 그렇지. 좋군.”

적절한 이유를 말하면서 선물까지 내밀자 발데리안 가주의 표정이 금방 풀렸다.

특히 담뱃갑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는데, 블랙 드레이크의 윤기 나는 비늘의 무늬가 살아 있는 가죽에 금과 루비로 장식이 되어 있으니 화려하면서도 야성미가 느껴지는 게 그의 취향에 쏙 들어맞은 것이다.

‘얼굴이 풀린 거 보니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윗사람 취향을 맞춰 주는 일은 전생 때부터 아주 익숙한 베오날드였다.

간신이란 결국 능력 외의 아부와 적절한 선물을 통해 상대의 호감을 사서 무례나 권력의 허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선물을 받은 발데리안 가주는 한껏 기분 좋은 표정으로 본격적으로 베오날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으음… 그렇군. 이게 그 ‘마갑주’라는 건가? 그런데 듣던 거랑 달라 보이네만?”

“아, 이건 ‘프레임’입니다. 갑주의 뼈대라고 볼 수 있죠. 여기에 여기 보시는 갑주 판을 씌워서 완성하는 겁니다.”

“흠… 그렇군. 그럼 꽤나 커지겠는걸?”

“사람을 둘러싸야 하니 사람보다 크지요. 그리고 갑주까지 씌워지니 크기는 조금 더 커집니다. 아무튼 지금은 블랙 드레이크의 소재를 여럿 쓴 덕분에 더 많은 개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강철로 대야 하는 부분을 가죽으로 씌워서 갑주의 두께를 줄여 무게를 줄이고, 질 좋은 기름과 힘줄을 통해서 프레임 사이사이에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서 마모도를 줄이고, 또 블랙 드레이크의 마정석을 조각내어 프레임에 박아서 각 술식의 오러 소모량도 줄이고… 그다음엔…….”

“자, 잠깐! 그렇게 말해도 난 다 못 알아듣네! 아, 아무튼 기사에게 입히는 거라는 얘기지?”

속사포같이 이어지는 베오날드의 설명이었지만 태반을 못 알아들은 발데리안 가주는 손사래를 치면서 요점에 대해서만 확인하고자 했다.

“예, 맞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마법 인챈트가 걸려 있는 갑옷이지요. 더 많은 술식을 담고, 그것을 통해서 더 강력한 ‘기사’를 전투에서 더 안전하고 위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개념입니다.”

“으으음…….”

“아시다시피 재능 있는 기사 한 명을 육성하기 위해선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갑니다. 그런 만큼 전쟁터에서 죽으면 치명적이지요. 물론 싸우기 위해서 연마하는 기사가 전쟁터에서 죽는 걸 따지는 것도 난센스이지만, 상대보다 덜 죽게,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결국 가문의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상대 기사 3명이 죽을 때, 우리는 한 명으로만 줄여도 확실히 득이지.”

냉정한 교환의 법칙. 발데리안 가주도 알아들을 만큼 쉬운 논리였다.

베오날드는 거기에 추가로 더 많은 가치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발데리안 가주의 상상과 이해를 넘어서는 범주였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어서 발데리안 가주에게 전황에 대해 들은 그는 아주 빠르게 이해해 버렸다.

“…그렇군요. 확실히 적극적으로 전쟁할 메리트가 없군요.”

“그렇네. 지금 협상에 들어갔으니 더 좋은 조건으로…….”

“하지만 제가 왔으니 이제 메리트가 생긴 셈이지요. 실험 장소로 쓰기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메리트가 없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승패의 부담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기든 지든 발데리안 가문으로서는 영향받을 부분이라고 해 봐야 식량 문제뿐이니 말이다.

물론 식량 문제를 가벼이 여길 순 없었지만, 베오날드에겐 그것을 해결할 방안이 있었다.

“실험이라. 우리 병력을 실험 도구로 쓴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데…….”

“물론 병력은 돌아가면 백성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결국 지금 시대는 ‘기사’의 시대입니다. 전쟁 속에서 한 명의 ‘기사’라도 더 살려서 나아가는 쪽이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협상은 어떻게 하나? 기껏 판돈 크게 올려붙였는데 말이지.”

“사후 협상으로 미루면 됩니다. 그러면 분명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겠지만, 그것도 큰 명분이 됩니다.”

“으으으음… 좋네. 어차피 자네에겐 가문의 유산 봉인을 풀어 준 빚도 있으니 이번엔 자네 뜻대로 하지.”

발데리안 백작은 잠시 고려한 결과 베오날드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전쟁터만큼 편한 전쟁이라는 건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고, 지금 이 카드를 무시하면 나중에 황실을 압박할 더 좋은 카드가 되는 등등… 베오날드의 의견이 너무나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투입하는 건 자네 뜻대로 하나, 전체적인 전략, 전술을 따르는 건 잊지 말게.”

“매우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우선 폐하의 전령에게 가 봐야겠군. 크흠!”

그렇게 말한 발데리안 백작은 즉시 황제의 전령에게 가서 지금 공격하기 너무 좋은 때가 왔다면서 협상은 사후로 미루자고 한 뒤 기사들과 귀족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베오날드에겐 즉시 마갑주를 착용하고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셀리나를 통해 준비해 둔 파츠를 조립해서 ‘마갑주’ 한 벌을 완성하여 하이디에게 착용시킨 다음 본격적으로 전투 회의에 참여했다.

“자자, 다들 잘 봐라. 본래 우리는 느긋하게 전쟁할 생각이었는데… 블랙 드레이크를 잡은 기사가 지원을 왔고, 황제 폐하의 명도 있어서 제대로 날뛰어 볼 생각이다. 다들 고기 받았으니 알고 있을 거고, 보면 알겠지만 이 갑옷… 블랙 드레이크의 비늘로 겉을 씌운 거다.”

마도구에 대해선 아직 공표하기엔 시기가 이르기에 감추고, 발데리안 백작은 베오날드의 옆에 선 하이디를 가리키면서 둘러대기 시작했다.

인간보다 살짝 크고, 육중한 갑옷에 검은 비늘로 둘러싸여 있어서 견고하면서도 야성미가 느껴지는 무서운 모습. 이 전쟁에 계속 참가한 기사들은 그것을 보며 발데리안 영지에서 내려온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로 그 블랙 드레이크의 것이군요. 와아… 이제 그럼 그쪽 숲으로 갈 수 있겠군요.”

“그래. 참고로 하나 더 말하자면 그 블랙 드레이크는 단 3명이서 잡았다는 거다. 이 친구랑 말이지.”

“3명? 말도 안 됩니다! 블랙 드레이크를 잡으려면 못해도 기사 10명은 넘게! 거기에 병력과 모험가들까지 고용해서 토벌단을 구성해야 하는데! 와… 세상에!”

“그만큼 강한 기사라고 생각해라. 아무튼~ 그런 영웅이 와 주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야 쓰겠냐? 한바탕 날뛰자는 거다. 알았나? 그럼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간다.”

발데리안 백작의 선포와 함께 지도가 펼쳐지고, 전략 회의에 들어갔다.

병력의 숫자는 1만이 내려왔지만 부상병과 최전열에서 싸우던 부대원들이 돌아가고, 다시 온전하게 2만 5천을 채워 놓은 상황. 상대는 대략적으로 5만. 몇 번 교전을 했기에 일부가 줄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배에 가까운 병력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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