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오… 역시 크멜군은 강하군요. 실전을 밥 먹듯이 하는 부대라 그런가? 보통이 아니네요.”
기습을 통해서 상당한 전력을 깎았지만 역시 상대는 제국의 정예들. 기사들이 너무나 노련하고 예리해서 대놓고 함정수를 팠는데도 하나도 걸리지 않은 게 아쉬운 노이멀 총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바니로 백작가에 붙은 불을 끄기엔 충분한 병력이 그들의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저렇게 자리만 잡고 있어도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은 쉽게 공성전을 진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 그보다 저건 뭔가? 저게 가르칸 공화국의 전력인가?”
“전력은 아닙니다. 일부만 데려온 거지요. 어떠신지요. 가르칸 공화국의 종족 연대군. 쓸 만하지요? 도합 3만의 정예군이랍니다.”
“3만? 너, 너무 적지 않나?”
“더 많이 데려왔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으음… 그, 그건 그렇군.”
노이멀 총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바니로 백작가의 귀족들. 그 말대로 3만 이상 데려왔으면 자신들이 생각해도 역으로 불안해할 거라는 것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이것이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 스스로 뱀이라 칭하는 노이멀 가문의 후예인가 싶은 귀족들은 그녀의 지략과 상황 판단에 전율하며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으음~ 제게 모든 것을 맡기시려고요?”
“결국 어떻게 되든 간에 이기는 방법을 택해야지 않겠나?”
“후후훗, 그건 맞습니다.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하죠.”
서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동의를 거치고 난 뒤, 자연스럽게 노이멀 총리에게 지휘권이 이양되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가신들은 그저 노이멀 총리의 말을 따르는 개나 마찬가지였다.
“자, 그럼 여러분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 드리지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겁쟁이처럼 계속 이 성안에 꽁 박혀 계시면 편하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본격적으로 전쟁 지휘를 하러 이만~ 흠!”
“노, 노이멀 총리!”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벽을 올라가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바니로 백작가의 귀족들은 놀랐지만 가뿐하게 착지한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벽을 올려다봤고, 그녀를 호위하던 엘프 기사들도 일체의 두려움 없이 다 같이 성벽을 뛰어내려서 땅에 착지한 뒤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허! 괴물 같으니!”
“아무래도 우리가 ‘괴물’을 깨워 버린 것 같군요. 단순히 저 징징거리는 바니로 백작님의 혼약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어떻게 이렇게…….”
어쩌면 자신들이 무시무시한 존재를 깨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들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실패를 했고, 그녀의 손에 모든 걸 맡긴 몸이다.
이제 살아남는 길은 그녀가 승리하길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공작님, 성에서 소수의 적 병력이 나오고 있습니다.”
“합류하려는 건가? 음, 그렇군! 저놈들이 이 병력을 부른 자들이렷다! 오레알, 얀스콜! 따라와라! 저놈들을 잡는다!”
“예? 하, 하나…….”
“성에서 나온 만큼 분명 바니로 백작가에 바람을 넣었던 중요한 인물일 거다! 서둘러라! 저놈들을 잡으면 어쩌면 이 전쟁을 빠르게 끝낼 가능성이 있다!”
“예! 공작님!”
‘물론 이미… 단기전은 물 건너간 셈이지만…….’
크멜 공작은 한숨을 쉬며 새로이 나타난 적군 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설마 적 병력을 끌어들이고 기습 공성전을 한다는 자신의 전략이 이렇게 간파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아주 제대로 반격을 당한 것이었다.
하나 이 방법 외에는 황제가 요구한 단기전을 해낼 방안이 없는 것도 사실인지라 딱히 분하지는 않았던 크멜 공작은 앞으로 장기전이 될 텐데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일단은… 지원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겠군. 장기전으로 가야 할 테니…….’
지금 저 병력들이 있는 이상 이제 단기전은 불가능한 상황.
발데리안 가문의 군사들이 와서 저걸 이긴다고 해도 그 사이에 이미 퍼져 나갔던 바니로 백작가의 군대가 돌아와서 대규모 회전이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전쟁만이 아니라 전쟁 속에 정치의 영역도 포함된 긴 싸움이 될 것인지라 크멜 공작은 한숨을 길게 쉬며 자신의 기사들이 적들을 잡아 오길 기원할 뿐이었다.
“음? 총리님, 적들이 옵니다. 저희가 맡을 테니 아군 병력 쪽으로 먼저 빠져나가십시오.”
“으음~ 아뇨. 가끔은 저도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 제가 모두 처리하지요. 대기하고 계세요.”
“하지만 총리님이 잘못되시면…….”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아~! 검 좀 빌려 주세요. 생각해 보니 안에서 일하느라 무장을 안 챙겨 와서 말이죠~ 훗.”
“하아아~ 정말 몸조심하십시오.”
호위하던 기사의 검을 받아 든 노이멀 총리는 자신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 생각으로 검을 뽑아 들고 호흡을 가다듬어 오러를 끌어 올리자, 그녀의 전신에 진한 보랏빛 오러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오러인가? 그렇다면 확실히 중요한 인물……! 하지만 사로잡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잡는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반드시 죽여 없앨 생각으로 싸워라!”
“예! 대장님!”
기사들은 그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로 피어오르는 오러를 보았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기사로서 강적과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들은 볼레아 왕국의 무시무시한 야만인과 짐승들을 상대로도 싸워 살아남은 자들이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노이멀 총리가 움직이지 않음으로 인해서 거리는 금방 좁혀졌고, 거의 다 다가온 순간 노이멀 총리는 잔상만 남기고 몸을 날리며 자신이 아는 검술을 시전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 오의–히드라(Hydra)’.
촤아아악!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아홉 갈래의 검기가 마치 뱀의 몸통과 채찍처럼 반경 10미터의 범위를 마구잡이로 난도질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홉 번 벤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범위와 오러의 위력을 자랑하는 이 잔혹한 아홉 머리 뱀의 공격을 당한 기사와 말들은 그대로 토막이 나서 피와 육편을 뿌리며 비 오듯 땅에 떨어져 내렸다.
“히이이이익!”
“도, 돌아가자!”
“괴물!”
앞에 있던 것은 대부분 기사들로 당연히 오러를 사용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참혹하게 고깃덩어리가 되어 땅에 흩뿌려지자 뒤따르던 기병들은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말의 머리를 돌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러를 사용하며 단련된 크멜 가문의 기사들도 단번에 죽어 나갔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라라~ 살짝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도망가 버렸네.”
“총리님, 아무리 특급 기사의 역량을 가지고 계시다곤 하지만 무모한 짓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끔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어선 안 되기에 한 것뿐이야. 너무 걱정 말렴. 나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보기 전까진… 절대로 죽지 않을 거란다. 후후후.”
바닥에 토막 난 인간 기사들의 시체를 보며 잔혹한 미소를 지은 노이멀 총리는 검을 집어 던져 버렸다.
인간의 피가 묻은 검은 필요 없다는 뜻일까? 바니로 백작가의 귀족들 앞에서 연기하던 모습과 다르게 지금 그녀가 인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오직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한 상태.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죽음을 보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을 맞이하러 온 가르칸 공화국 군대에 합류했다.
“…맙소사! 저 하프엘프의 검술이 저 정도 수준일 줄이야! 공작님, 저건!”
“으으으으음…….”
“공작님?”
“…아! 내가 잠깐 정신이 팔렸네. 저 하프엘프의 검술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말이야. 어디서 봤더라……?”
거의 일순간에 아홉 번의 검기를 뿌리는 저 검술.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크멜 공작이었다.
자신의 본능과 기억은 저것을 본 적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그 출처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근래에 황녀의 실종부터 시작해서 할데온 유적의 사건과 황실과의 알력 다툼, 그리고 이 전쟁 등등… 머리를 써야 할 사안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떠올리지 못한 그는 결국 생각을 접고 다시금 집중해야 할 지금의 전쟁에 모든 신경을 쏟기로 했다.
***
칼레움 제국 황실.
바니로 백작가의 혼약으로 인해 시작된 내전은 결국 단기전으로 끝나지 못하고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해당 소식을 받은 황제는 깊은 한숨을 쉬며 요 근래 정말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 상황에 난감함을 표했다.
“후우~ 완패군.”
단기전으로 끝내야 하는 전쟁이 장기전 양상이 되는 시점에서 확실한 패배가 된 거였다. 크멜 공작은 분명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상대가 이미 그 수를 읽어서 실패한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젠 더 이상 전쟁으로 이 판을 흔들거나 끝낼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자신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바니로 백작가와의 협상을 통해 상황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젤시의 행방에 대해서 들어온 게 없나?”
“죄송합니다. 전력으로 찾고 있지만 아직 전혀 들어온 게 없습니다.”
“그런가? 허어… 허허.”
뭘 해도 풀리는 일이 너무나 없어서 그런지 가슴이 갑갑한데, 할 수 있는 건 허탈한 웃음을 짓는 것밖에 없다.
황제의 자리는 약함을 보이는 눈물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이대로 한탄만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일단 선택지는 두 가지다.
“이 전쟁을 계속하느냐, 마느냐군. 다이나 왕국 쪽은 마법에 관한 것만 협상하면 어떻게든 되는데… 문제는 볼레아 왕국이로군.”
“그 야만인들은 분명 추수 이후 또 약탈하러 올 게 분명합니다. 이 전쟁이 끝나도 크멜 공작가는 또 전쟁을 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결국 발데리안 가문에게 많은 것을 내줘야 할 판국이겠군.”
여기서 왜 갑자기 발데리안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지금 벌이는 전쟁의 승패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이후의 상황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전쟁의 기간이 어떻게 되든 간에 올 겨울쯤엔 볼레아 왕국의 약탈자 놈들이 쳐들어올 것은 확실한 일. 크멜 공작 가문은 2개의 전쟁을 연속으로 해야 하는 반면 발데리안 가문은 다이나 왕국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이 남부의 전쟁만 집중하면 되기에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상황이었다.
“발데리안 가문에도… 서찰 한 장을 준비해야겠군.”
“폐하, 혹시라도 남부의 전쟁이 질 것에 대한 대비도 해 두시는 게…….”
“…그건 대비할 가치도 없네. 남부의 곡창 지대를 잃으면 우리 제국의 미래는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부디 크멜 공작이 잘해 주길 여신께 빌어야겠지. 하아아~ 정말… 역사로 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 되겠군. 결혼 하나 파투 난 것으로 인해서 제국이 휘청거리게 되다니……. 하하핫.”
농담이지만 두려운 이야기를 하며 황제는 필요한 서찰들을 모두 작성하여 보냈다.
이제 바랄 건 정말로 여신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