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어머나~ 이거… 완전히 당해 버리신 것 같네요. 그야말로~ 절체절명? 후훗.”
“이런 젠장! 완전히 당했군.”
“물론 속은 건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여기서 속았다는 걸 알리는 게 먼저일 텐데……. 지금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아는 건 저희뿐이고, 지원하러 간 군사들은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이지요? 포위당한 상태에서 전갈을 보내는 것도 무리일 테니 말이죠.”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뭔가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건가?”
“있기는 하죠. 여기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리 백작 대리라곤 해도 저 혼자 OK해 버리면 그거야말로 여기 계신 귀족님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거라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말이죠.”
노이멀 총리는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어 귀족들에게 슬쩍 내밀었다.
보지 않아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게 결코 좋은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지금 성내에 있는 병력으로는 지원 요청을 보내기는커녕 저기 앞에 있는 적 병력을 막아 내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 서류만 있으면 해결이 되나?”
“예, 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봐도… 되나?”
“검토하실 수 있다면~”
능글맞게 웃는 노이멀 총리의 미소가 불쾌한 귀족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미 곡식 절반을 불태우고, 전쟁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패배한다면 전쟁의 책임을 물어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거나 여차할 경우 포로로 잡혀가 인질이 될 수도 있고, 영지를 빼앗기거나 가문이 사라질 위험성도 있었다.
“어, 어디 보세! 이건……!”
“군사 통행 허가와 저희 가르칸 공화국과의 동맹을 승인하는 서류입니다. 백작님 것은 이미 되어 있지만, 역시 가신분들을 무시할 순 없잖아요. 호호호홋.”
‘이 암여우 년!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그제야 바니로 백작의 가신은 노이멀 총리가 이 모든 전국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결국 노이멀 총리는 가르칸 공화국의 지배자, 다른 곳보다도 가르칸 공화국이 먼저인 하프엘프였다.
하지만 그녀만 탓할 수 없는 것이 모든 주도권은 백작 아래의 가신들인 자신들에게 있었고, 전략 전술상으로 속아 넘어간 것도 모두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자신들의 오판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어난 일.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들의 몫이기에 결국 덜 아픈 선택지를 고르는 합당한 절차를 밟아 나갔다.
“사인하겠네. 그럼… 저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거겠지? 이 서류를 얻기 위해 우릴 버림패로 쓴다는 건 아니겠지?”
“후후훗, 우려도 많으셔라. 뱀이라 불리는 노이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이 전쟁의 승리를 안겨 드리지요.”
“좋아, 그럼 하도록 하지!”
자신 있게 말하는 노이멀 총리의 태도에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바니로 백작의 가신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결국 그가 내민 서류에 하나둘 사인과 인장을 찍기 시작했다.
가신들 중 가장 세력이 큰 귀족들이 사인과 인장을 찍으니 하위 귀족들과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따라 찍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 감히 거부하는 간 큰 자는 없었고, 잠시 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귀족들의 사인과 인장을 받은 노이멀 총리는 그것을 품에 집어넣은 뒤 대귀족들에게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어, 어디로 가는 겐가? 설마 여길 떠나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이제부터 마법을 보여 드리려고 하는 거죠. 노이멀 가문의 마법 말입니다.”
“마법이라고? 하지만 넌 마법사가 아니지 않나?”
“뛰어난 계책과 전술은 마법에 비견된다는 말이 있죠.”
귀족들은 불안과 우려를 품고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향한 곳은 성벽 위. 그 아래에선 원정을 온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이 공성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앞으로 몇 시간이면 그들은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할 것이고, 병력이 얼마 없는 이 성은 단숨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자자~ 사인하셨으니 마음 놓고 구경하시면 됩니다. 우리 가르칸 공화국이… 수백 년간 키운 힘을 말이죠.”
“무슨…….”
지익!
노이멀 총리는 여유 있게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 다른 종이를 꺼내서 찢었다.
그러자 허공에 마법의 술식이 전개되면서 하늘로 쏘아져 올랐고, 귀족들은 그것이 마법 스크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늘로 쏘아진 불꽃은 낮에도 눈에 확 띄도록 보랏빛으로 화려하게 터지며 주변을 밝혔다.
“이건… 무슨 신호요?”
“자, 이제 느긋하게 지켜보시면 됩니다. 시종들에게 먹거리라도 가져다 달라고 하고 말이죠.”
“으음…….”
그리고 노이멀 총리가 쏘아 올린 신호는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에게도 보였는데, 크멜 공작은 그 신호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것이라 생각하곤 주변을 경계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두뇌를 열심히 굴려 지금 바니로 백작가에서 할 수 있는 변수 창출이 뭔지를 떠올려 보았다.
“마법… 인지 뭔지 모르지만 뭔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설마 가르칸 공화국 놈들이 개입하려는 건가?”
“아, 그… 몬스터랑 이종족들이 같이 사는 나라 말이군요. 노이멀 총리가 개입했을 때부터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했습니다만, 뭐 그리 큰 나라도 아니고…….”
가르칸 공화국. 제국의 남동쪽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로 평화 협정을 맺은 다음 바니로 백작가의 영역과 주로 무역을 하며 지내는 곳이었다.
이종족들로 구성된 만큼 노예제를 싫어해서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종족끼리 모여 살며 종족별 대표 의회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내부 싸움으로 시끄러운 동네라는 인식이 컸다.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가 집권한 뒤로는 강력한 통치와 내부 숙청으로 그나마 좀 안정화되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지금까지 가졌던 인상과 정보가 변할 리 없고, 또 실제로 한 번도 서로 전쟁을 해 보지 않은 국가였기에 모든 점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설사 군대를 미리 준비했다고 해도… 우리보다 강할 수가 없지.’
크멜 가문의 경우 볼레아 왕국, 발데리안 가문의 경우 다이나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항상 싸움에 대비해야만 했고, 제국 내에서 지금도 암투를 벌이는 상황.
그러나 가르칸 공화국은 국경을 맞댄 모든 나라와 평화로운 관계여서 전쟁이라고 할 만한 것을 겪지 못한 놈들이다.
상시 투쟁과 실전으로 단련된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의 싸움. 더 계산할 거 없다는 게 크멜 공작의 생각이었다.
‘다소 귀찮아지긴 하겠군. 병력을 조금 빼놓아야 하… 음?’
그 순간, 아직 낮인데 갑자기 하늘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름이라도 낀 것인가 싶어 올려다보니 무언가 살짝 반짝하고 빛났고, 크멜 공작의 눈에 곧 그것의 형상이 들어왔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화살, 그것도 엄청 커다란 화살이었다.
창으로 착각될 만큼 커다란 화살이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둘이 아니라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창과 같은 화살들이 하늘을 메운 채 떨어져 오는 것이었다.
“이, 이게 뭐야?”
“으아아아아악!”
“기습? 적의 기습인가?”
“이 화살은 어디서 날아오는 거야? 으아아아악!”
크멜 공작을 비롯해서 기사들은 빠른 반사 신경과 오러의 힘으로 그 위협적인 화살들을 쳐 내면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지만, 난데없는 사격을 받은 일반 병사들은 단창만 한 크기의 화살에 꿰뚫려서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크멜 공작은 빠르게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말을 탄 기사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라웰스 남작! 기병들을 이끌고 가서 이 망할 화살을 쏘는 놈들을 처리하게!”
“예!”
“아드리마! 전투 마법사라면 놈들의 움직임을 캐내라!”
“예! 공작님!”
크멜 가문은 상시 북방의 야만국 볼레아 왕국의 도전을 받는 자들. 고작 이런 기습 하나로 크게 동요하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북방 야만인들의 잔혹한 계책이나 함정, 수수께끼의 주술 같은 것에도 이미 이골이 난 몸이다.
기습으로 죽는 인원은 있어도, 혼란에 빠져서 어버버하는 자들은 크멜 가문의 군대가 아니었다.
“여, 역시! 크멜 공작이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우린 황제 폐하를 지켜야 하는 검이자 방패다!”
“예! 이오날 경!”
오히려 같이 기습을 받은 제국 수도군이 더 크게 혼란을 겪고 있다가 옆의 분전을 보고 정신을 차릴 정도였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기습 사격을 한 궁병대 쪽으로 말을 탄 기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성 위에서 지켜보는 바니로 백작 측의 귀족들은 사전 협의 없이 자신들의 영지로 군대를 들인 것에 대해 분노하는 시선이었지만, 노이멀 총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후훗, 허가증이 이젠 있잖습니까? 게다가~ 미리 안 들어왔으면 지금쯤 힘든 공성전을 하고 있든가, 아니면 백작님의 목을 들고 가서 항복하자고 대화를 하고 있었겠지요?”
“…크윽!”
“억울하시면 처음에 전략을 잘 짜셨어야지요. 호호홋, 아무튼 다들 우리 가르칸 공화국이 평화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한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이상을 가진 이종족들 간의 경쟁과 보이지 않는 내전, 그리고 그것을 통합하고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 왔던 것이지요. 보세요!”
노이멀 총리가 손으로 가리키자, 크멜 군과 제국 수도군의 기병들이 다가가고 있는 숲속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다가오자 안에서 군대가 나왔는데, 인간형이지만 근육량과 체구가 압도적으로 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핼버드와 방패를 한 손으로 착용하고 달려오는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방진을 짜고 있었다.
“뭐, 뭐야? 이 병사들은?”
“오크! 리자드맨! 거기에… 수인까지? 아인종 군대라고? 가르칸 공화국 놈들!”
달려가던 기사들은 서로 다른 종족임에도 같은 갑옷과 무기를 들고서 방진을 짜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는 가르칸 공화국의 군대를 보고 경악했다.
그들에게서 도저히 전쟁 없이 살아온 나라의 군대라고 보기 힘든 예기와 투지를 느꼈지만, 믿을 수 없다는 눈이었다.
“우회한다! 우리 목표는 우선 궁병이다! 저것들을 상대할 필요는… 아!”
아무리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라곤 하지만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그러니 딱 봐도 튼튼해 보이는 저 방진에 들어갔다간 말을 잃을 게 뻔했기에 기병대의 지휘를 맡은 라웰스 남작은 기수를 돌려서 적 보병들의 방진을 피해서 지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측면을 돌아서 후방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또다시 화살들이 날아오자 기사들은 모두 쳐 내면서 전진했다.
‘뒤를 잡아서 저 성가신 궁병부터 처리를 해야… 아니, 저건? 역시 엘프였나?’
후방 쪽으로 돌아가자 보이는 것은 검은 제복에 가벼운 방어구를 걸친 엘프 군인들의 모습이었다.
모두 다 거대한 활을 가지고 시위를 당겨서 그 단창만 한 활을 쏘는데, 그들의 손과 시위에 은은한 푸른빛이 맺히는 걸 봐선 전원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 같았다.
경악한 라웰스 남작은 그들을 처리하려고 기병들을 돌려서 전진하려는데, 엘프들 사이에 또 충격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받아라, 귀쟁이 놈아.”
“네네, 받았습니다, 똥자루 양반!”
‘…엘프랑 드워프가 같이 부대를 편성했다고?’
거대한 장궁으로 단창을 쏘는 엘프 궁수 부대와 같이 편성되어서 보조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똑같은 군복을 입었지만 갑옷은 더 두껍게 걸친 드워프들이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사격을 하는 엘프들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단창을 보급해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라웰스 남작은 전진하는데, 갑자기 적진에 있던 드워프 하나가 뿔 나팔을 꺼내더니 크게 불기 시작했다.
뿌우우우~!
“후방에 적 기병대가 돌진해 옵니다.”
“가자! 이놈들아! 이 귀쟁이들은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 지켜 줘야지! 하하핫!”
‘…과연, 이런 식으로 연계하는 거였나?’
사격을 보조해 주던 드워프들은 나팔 소리가 들리자 일제히 각자 차고 있던 방패를 꺼내 들고 모여서 새로운 방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아서 속도가 느렸지만, 이미 훈련이 된 듯 적 기병이 다가올 때까지 진형을 짜는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거기에 엘프들도 후방을 향해서 진형을 사격 대형으로 유지, 방진이 뚫리는 즉시 사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젠장! 이건 무리다!’
“이런 겁쟁이 같으니!”
그러나 다행히도 볼레아 왕국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 라웰스 남작은 냉정한 판단력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달려가던 기병들의 기수를 다시 한번 돌렸다.
경험 많은 기사인 그는 지금 저 진영은 자신들 기병들만으로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판단하고는 우선 기병에서 사람을 빼서 보고를 위해 크멜 공작에게 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