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작전의 개요가 정해졌으니 이제 다음은 각자 어느 루트로 먼저 진격할지를 설정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일치하는 전쟁 속에서도 서로 간에 정치와 수작질이 섞이기 시작하는데, 크멜 공작은 총사령관의 권한으로 발데리안 백작에게 가장 저항이 센 영지들을 돌파해서 가라는 루트를 주었다. 대놓고 기사들과 병력을 소모하라고 엿을 먹이는 것이었다.
‘전쟁에선 좀 전쟁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혹시 무리인가?”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다만 진군 속도가 좀 느릴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위장이니 적당히 소모전만 하게. 다만 집결 전령이 부르면 오는 건 잊지 말고.”
‘…진군이 느리면 도착하는 게 늦어질 텐데? 나중에 실패할 경우 전쟁의 책임 소재를 나에게 돌릴 생각인가?’
화가 나서 꼬치꼬치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발데리안 백작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우선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내분을 일으켜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딴 식으로 나오면 자신은 자신대로 몸을 사리면서 싸울 좋은 명분이 되기에 속내를 감추는 발데리안 백작이었다.
“좋아, 그럼 진군 루트도 정해졌으니 출발하세. 다들 여신의 가호가 있길 기원하네.”
“예!”
“알겠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시작된 전쟁. 이젠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내전이었고, 황제 측 군은 셋으로 나뉘어서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정찰병과 파발, 전서구, 봉화를 통해 바니로 백작가에 전해졌다.
여전히 바니로 백작은 너무나 아름다운 자신의 부인과 함께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노이멀 총리에게 전권을 일임했기에 바니로 백작이 앉는 상석엔 그녀가 앉아 있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황제가 보낸 군대가 드디어 진군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군을 셋으로 나눠서 본격적으로 저희를 토벌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깃발의 문양으로 보아 군대는 크멜 가문, 발데리안 가문, 그리고 제국 수도군, 이렇게 셋인 것 같습니다.”
“젠장! 곡식을 불태운다는 협박이 먹히지 않은 건가? 게다가… 발데리안 가문과 크멜 가문이라니!”
“으음, 감당하겠다는 각오인 것 같네요. 아무튼 대응을 하셔야겠죠?”
“당연히 영격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땅에 들어오는 건데! 이대로라면 피해가 커집니다!”
귀족 가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영지가 파괴되는 것과 가문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가문의 경우 진작 황실 측에 항복 선언을 하고 길을 내주는 형태로 협력하거나 병력, 식량을 지원해 주었고, 다른 가문들도 지금 잔뜩 눈치를 보고 있는 추세.
그러나 항복할 수 없는 가문도 결국 있었으니 바니로 백작가와 가까운 관계에 있거나 그들에게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은 그러했다.
“병력 규모는 어느 정도죠?”
“모두 합쳐서 약 8만! 크멜 공작가에서 3만, 제국 수도군 2만 5천, 발데리안 가문 2만 5천으로 추정. 반면 저희는… 진짜 징집할 수 있는 한계까지 긁어모아야 5만입니다.”
일전에 바니로 백작가의 한마디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0만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이나 원정을 나아갈 때 가신과 귀족들의 병력을 끌어모아야 나올 수 있는 양으로, 백작가 단독으로는 5만이 한계였다.
그것도 5만이면 생각보다 많아 보일 수 있지만 발데리안 가문, 제국 수도군, 크멜 공작가의 군대는 모두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국경을 수비하던 실전 부대들인 데다 여력을 남기고 와야 했기에 8만인 것이고, 반면 바니로 백작가의 5만은 진짜로 마을과 영지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만 남기고 징집할 수 있는 남성을 모두 끌어모아서 무기만 들려 놓은, 사실상 농민 병사 수준이었다.
“물론 더 무리해서 중장년이랑 노인… 계집까지 모병한다면 더 늘어날 수 있지만…….”
“아무튼 대응할 수 있는 대로 작전을 짜서 대응하세요. 저는 결국 외부인이니까 말이죠. 후후훗.”
“아, 알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아무튼 당초 예정했던 대로 우선 식량 절반을 모두 불태운 다음에… 3개 군이 오는 영지로 지원병을 보내서 영격을…….”
‘후후훗, 멍청하긴~ 상대의 수를 전혀 모르고 있네? 뭐, 영지와 가문을 우선시해야 하는 인간들이니 어쩔 수 없나?’
노이멀 총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멍청하게 대응하고 있는 바니로 백작가의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수(手)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미 상대의 전술을 간파한 상태였다.
딱 봐도 지금 황제는 ‘단기전’을 원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군을 흩어지게 만든 것은 자신의 영지가 유린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귀족들에게 영격할 것을 강제하는 것이며, 백작가의 성에서 군대를 나오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가면 아마~ 귀신같이 군대를 쪼개고 합쳐서 백작가로 밀고 들어오겠죠?’
뻔하더라도 상대가 넘어갈 수밖에 없으면 그건 좋은 전략이었다.
다만 크멜 공작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 뻔한 방법을 사용할 때, 자신의 전략을 비틀 다른 변수가 있는 것을 전혀 계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노이멀 총리는 마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는 듯 웃으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
전쟁 1일 차.
쪼개어서 진군을 한 3개 군대는 바니로 백작가 휘하의 영지에 도착했다.
크멜 공작과 제국 수도군은 사전에 항복하기로 협약된 영지여서 그대로 무혈 입성했지만, 발데리안 가문은 처음부터 거센 저항을 맞이하며 공성전을 치르게 되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물러서지 마라! 올라가! 올라가라고!”
“이게 실전의 공기군요, 아버님. 후우우~”
“그렇다, 케드론. 검을 쥔 무가(武家)가 평생을 바라보게 될 장면이지.”
발데리안 가문의 가주인 백작은 아들이자 후계자인 케드론과 함께 나란히 서서 공성을 진행하는 병사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로 활을 쏘는 궁병, 성문을 두드리는 충차와 공성 병기, 사다리를 걸고 올라간 병사들이 치열하게 싸우다 죽는 모습을 바라보는 케드론은 실제 전장의 공기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처절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저항은 거세지만 기사들도 적고, 못 넘길 정도의 성은 아니구나. 시간이 문제지. 어쨌든 그… 유물 이야기나 더 해 봐라. 그 베오날드라는 녀석이 가자마자 유물의 봉인을 풀었다고 했나?”
전쟁이 한창 지속되는 중이었지만 오랫동안 전쟁터를 돌던 발데리안 백작의 입장에서 봤을 땐 이미 견적이 다 나온 상황이라 승전보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과 가문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전쟁의 준비와 편성이 우선이라서 아들을 만나고도 이 사안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 아버님. 제가 보는 앞에서 직접 해냈습니다. 어렵다고 말하긴 했는데… 예상외로 술술 풀어 나가더군요.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거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구나.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절대로 놓쳐선 안 될 인재가 틀림없다. 으음~ 역시 사위로 들여야겠지?”
“예. 혈통에 문제가 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나면 오히려 딱 밸런스가 잡힌 셈입니다.”
“그렇지. 오히려 천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안심이 되는 요소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저토록 뛰어난데 혈통까지 좋았다면 필시 반역을 도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했지만, 용병의 피가 섞여서 혈통이 안 좋은 점이 그 염려를 덜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일단 혈통이 저 모양이면 다른 귀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고, 파벌을 구성하기도 힘들기에 부담 없이 사위로 들일 수 있었다.
“다만 네가 부담이 크겠구나. 그 녀석이 우리 가문에 충성심을 가진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야. 항상 경계해야 할 거다.”
“예, 아버님.”
“그나저나 누구랑 결혼시킬지가 고민이구나. 으으음~ 딸아이들은 모두 다 혼처가 있으니 말이지.”
“그것도 그거지만, 일단 그가 승낙할지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이미 그는 거느리고 있는 여성들이 다수입니다.”
“흠,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을 덧붙이면 그만이니. 가령…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주면 되지 않겠느냐?”
“오오… 과연 묘안이십니다. 아… 성문이 열렸습니다, 아버님!”
“음, 생각보다 빨리 항복했군. 슬슬 가자.”
그렇게 발데리안군은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 안의 귀족과 여러 협상을 해야 했기에 이야기를 중단하고 곧장 나아가는 발데리안 가주였다.
***
전쟁 2일 차.
오랜 행군과 첫 공성전 때문에 상당히 피로가 쌓인 발데리안군은 함락시킨 성에서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고, 크멜군과 제국 수도군은 계속해서 진군해서 저항을 하는 성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바니로 백작가에선 편성된 3개 군의 지원군들이 출발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격렬해졌다.
크멜 공작군 본영.
본래라면 크멜 공작군이 지나가는 루트는 미리 전갈을 통해 적들이 투항한 영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지나간 영지에서는 예측대로 되었고 이번 영지도 그렇게 되어야 했지만, 망할 성주가 기만책으로 크멜 공작을 속이고 들어오려는 그들의 군대 일부를 성내에 가두고 기습을 하여 병력에 크게 손실을 입힌 것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으로 발데리안 놈을 보내는 거였는데!”
“기만책… 게다가 저기 성주의 아들이 아마… 3급 마법사였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거지! 그놈 생각인 것 같더군! 쓸데없이 병력 손실이 일어나니… 아주 불쾌하군. 저 성은 함락시키는 즉시 성주를 비롯해서 식솔들 모두 파묻어 버리고 말겠다!”
“공작님, 저희의 원래 전략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그렇군. 워낙 화가 나는 일이라서 나를 잠시 잊었네. 아무튼 저 성! 반드시 기억해 두지. 바니로 백작을 없애고, 저 성의 성주와 그 가솔들을 모두 없애 버릴 테니!”
그렇게 한 방 먹은 크멜 공작의 분노와 함께 그들의 군대는 계속해서 공성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해가 떨어져서 저녁이 되자 미리 바니로 백작의 성에 보내 둔 경기병 정찰대가 돌아와서 바니로 백작가에서 드디어 지원군이 대량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좋아, 계획대로군. 그럼 우리도 계획대로 군을 분리해서 출발한다! 다른 군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작전대로 행하라 전하라.”
크멜 공작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을 감지하고 그대로 군을 분리, 공성전을 연기할 부대를 소수 남기고 야습인 척 속여서 부대를 몰래 이탈시키고 그대로 바니로 백작의 성으로 진군했다.
마찬가지로 소식을 접한 제국 수도군과 발데리안군도 빠르게 병력을 나누고 이탈시켜서 바니로 백작의 성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전쟁 3일 차.
황제 측 군대는 혹시라도 바니로 백작군과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우회해서 진군하였고, 바니로 백작가의 가신들이 보낸 지원군은 가장 빠른 루트로 갈 것이 뻔했기에 마주치는 일 없이 위장으로 하는 공성전만 진행되고 끝이 났다.
전쟁 4일 차.
크멜 공작군과 제국 수도군이 먼저 바니로 백작의 성에 도달, 발데리안 군은 우회하다가 저항이 센 귀족의 영지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들의 기습과 야전이 걸려서 늦을 것 같다고 전령을 먼저 보내 두었다.
크멜 공작은 자신들도 한 번 기만책에 걸렸던 만큼 그들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바니로 백작 성 주변의 평야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절반을 태워 버렸군. 저 미친놈 같으니! 끄으으응…….”
평야엔 현재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밀들이 보이고 있었지만, 그 영역의 절반이 새까맣게 타 버린 채로 검은 재 가루를 뿌려 대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오면서 연기라든가 불을 보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추수를 앞둔 곡식 절반을 불태울 거라곤 상상도 못한 크멜 공작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공성전의 준비를 지시했다.
“여기서부턴 시간 싸움이다! 서둘러라! 적의 지원군이 돌아오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한다!”
크멜 공작의 지시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충차와 공성 병기를 조립하고,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성을 올라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완벽한 유인책에 당해서 현재 병력이 얼마 없는 바니로 백작가는 그 광경을 보며 멘탈이 붕괴된 상태였다.
성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극히 최소로 2천여 남짓. 하나 상대 병력은 못해도 5만이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가뜩이나 병력이 적은 만큼 영지들이 밀리지 않도록 최대한 지원을 보냈는데 완전히 당해 버린 것에 백작가의 가신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노이멀 총리는 드디어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백작의 의자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