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약 3일 뒤, 칼레움 제국 황실.
바니로 백작가 세력의 회의 결과는 곧바로 제국 황실에 전해졌다.
편지 내용은 아주 길게 쓰여 있었는데, 여러 역사적 서술과 황실에 대한 찬미, 귀족 가문에 대한 의무와 온갖 미사여구가 가득했고 이 편지에 찬동하는 귀족 103인의 이름이 모두 담겨 있었기에 아주 길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황제님? 우리는 바니로 백작가 및 밑의 귀족들입니다.>
<솔직히 바니로 백작이 결혼 한번 해 보겠다고 황제 너한테 대접이랑 돈이랑 정성 엄청 쏟았는데 뒤통수쳤지 않냐? 그래서 혼처 찾는다고 난리였고, 겨우겨우 구해서 한 게 엘프인데… 엘프랑 결혼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아무 문제 될 게 없는데 왜 군사를 모으고 난리를 피우는 거냐?>
<황녀와의 결혼을 파투 낸 건 결국 황실 측의 잘못 아닌가? 그러니 얌전히 물러나서 우리 백작님의 결혼이나 축복해 달라. 그러지 않을 시엔 추수를 앞둔 남부의 밀밭 절반이 불탈 것이며 우린 황제 댁이 우려하던 가르칸 공화국과 손도 잡을 수 있다. 이상이다.>
“…이런 괘씸한 놈들 같으니!”
촤아아악!
황제는 당장 길게 써져 있는 편지를 찢어 버리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바니로 백작가 놈들이 감히 자신을 협박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더 화나는 일은 바로 자신들이 우려하고 있는 ‘식량’ 문제를 빌미로 협박을 한다는 거였다.
사실상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으로, 이는 황제 측에게 가장 뼈아픈 부분이었다.
“이거 분명 그 망할 잡종 짓이군.”
“잡종이라면…….”
“철혈인지 뭔지 하는 그 괘씸한 하프엘프 년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저 귀족들에겐 이런 발상이 나올 수가 없다! 자기 영지의 산물을 태워 먹겠다고 협박하는 영주가 있겠느냐? 아니! 있어도 귀족들의 의견으론 받아들여지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분명 그년이 부추긴 게야!”
냉철한 시각과 이성으로 단숨에 이 서신의 배후를 밝혀내는 황제 또한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상황에 대한 뾰족한 타개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이대로 그냥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었고, 황제 본인이 대귀족들을 모아서 대응을 지시했던 만큼 물러서면 황실의 권위에 큰 상처를 입는다.
‘결국 답은 전쟁이군. 내전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서로가 어깃장을 강하게 놓은 상태에서는 답이 없었다. 결국 여러 가지 사안을 합의하고 물러난들 제국 남부에 가르칸 공화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정답은 식량 시세의 문제와 사후 처리가 다소 힘들겠지만, 바니로 백작가와 전쟁을 해서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귀족을 세우는 방법뿐이었다.
‘…일단 전쟁은 크멜 공작에게 맡겨야겠군. 나는 그동안 그 자리를 대신할 귀족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
할데온 유적 문제로 서로 살짝 앙금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고, 여전히 크멜 공작가는 황실의 편이기에 전쟁을 맡기기엔 적합한 인재였다.
그러니 황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는 바니로 백작가 아래에 있는 귀족의 명단을 보면서 바니로 백작을 대신해서 남부를 통치할 수 있는 귀족의 인선에 착수했고, 바니로 백작가에서 온 전갈에 대해선 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로 하였다.
그러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전쟁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
발데리안 가문.
얼마 지나지 않아 발데리안 가문에도 곧 가주가 보낸 소집령이 도착했고, 오스왈드 발데리안과 케드론 발데리안은 그것을 보고 군대의 소집을 위해서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마도구 제작에 힘쓰던 베오날드 일행에게도 케드론이 직접 와서 그 모든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래서 가르칸 공화국의 노이멀 총리가 저지르는 일을 막기 위해 남부로 군을 편성해야 한다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물론 자네는 우리 가문의 ‘가신’이긴 하지만 마도구를 제작하거나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군대엔 따라올 필요 없네. 물론 자네의 의지가 있다면 모를까…….”
“아뇨. 저는 역시 마도구 제작을 완수하겠습니다. 하던 건 멈출 수 없지요. 게다가 중요한 거니…….”
“그러게. 삼촌이 계속 남아 있을 테니 자네의 편의를 봐주는 데는 아무 문제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하던 일을 계속 진행하게. 나도 그… 마갑주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야. 돌아오면 완성품이 있었으면 좋겠군.”
“예, 그러십시오.”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서 평범하게 케드론과 이야기를 마친 베오날드는 그가 떠나자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방금 전 대화 속에서 들었던 불쾌한 이름에 대해서 떠올렸다.
‘노이멀 총리라니……. 대체 누구지? 어떤 건방진 놈이 우리 가문명을 쓰고 있는 거지? 분명 역사적으로는 교단에 의해 기록마저 사라진 가문 이름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지금 멀쩡하게 존재하는 거지?’
노이멀. 전생에 이 대륙 전체를 호령했던 위대한 베오날드의 가문. 자신을 배신한 알테리오로 인해 몰락하고 망할 인간들에 의해 가문의 기록이 삭제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나라에서 그 이름이 다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그였다.
‘가르칸 공화국… 분명 이종족의 나라라고 했던가? 철혈요정이라는 칭호를 봐서는 엘프 혼혈 같은데……. 내 자식들 중에 엘프 혼혈이… 한 11명인데, 걔들 중 누구더라?’
수많은 엘프 여성과도 혼인을 맺었고, 자식들도 많이 둔 베오날드였다.
전생엔 참 정력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돌본 아이들 중에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가 될 만한 아이가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영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엘프들은 성장이 느리니……. 내가 죽을 때까지 죄다 꼬맹이들이어서… 으으음~’
귀여운 딸들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철혈요정’이라고 불릴 만한 자질이나 편린을 보여 준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딸들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풀어 준 베오날드에게 그런 편린을 보여 줄 아이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노이멀 총리라는 자가 내 혈육일지도 확실하지 않으니 말이야. 우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어.’
베오날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일로 돌아갔다.
지금 그가 맡은 일은 ‘술식 세공’과 ‘베오날드 강(鋼)의 제작’을 통합해서 시작형 ‘마갑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테스트용 마갑주의 착용자는 이전에 정한 대로 하이디. 그동안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그녀의 무위를 확인한 결과가 어떻느냐면, 베오날드는 자신의 예상 이상으로 강해졌던 그녀에 대해 회상했다.
“너에게 맞는 마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네 전력을 알아야겠지. 자! 전력을 다해서 덤벼 봐라!”
베오날드는 당차게 검을 잡고 오러를 끌어 올리면서 하이디에게 말했고,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했지만 가차 없이 들어오라는 베오날드의 말에 전력으로 황금빛 오러를 끌어 올린 다음 자세를 잡고 순식간에 섬광이 되어 날아왔다.
“…어?”
“황실 기사단의 무(武), 오의-성수백호(聖獸白虎)!”
크르르르릉!
그러고는 순식간에 새하얀 뇌전이 거대한 백호의 형상으로 나타나더니 베오날드를 향해 덮쳐 왔고, 베오날드는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려서 그것을 받아 내었다.
거대한 백호가 사라지자 마치 거대한 짐승이 후려친 것처럼 땅이 파였고, 그 안에 짜부라진 개구리인 양 뻗어 있던 베오날드가 온몸을 떨면서 겨우겨우 일어섰다.
압도적인 강함. 분명 자신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하이디… 굉장하구나.”
“죄,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이라면 충분히 버티실 줄 알고…….”
“이 정도면 이미 중급 기사의 단계는 넘어선 지 오래구나. 역시… 대단한 재능이야. 하하.”
전신의 욱신거림을 느끼면서 베오날드는 하이디를 바라보았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는 크멜 가문의 천재 로이드에게도 쉽게 지지 않았는데, 하이디는 단 한 수에 자신을 무너뜨린 것이 상당히 놀라웠다.
더구나 자신을 만나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여러 오의 중 하나를 습득한 것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었다.
‘나는… 오의 히드라를 익히려고 피똥을 쌌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은 몰랐지만! 아주 굉장하구나.”
“그, 그게… 베오날드 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더니 된 것 같습니다!”
옅은 금발을 펄럭이면서 베오날드에게 다가와 웃는 그녀.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흔들면서 칭찬받길 원하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베오날드는 자신보다 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순수하게 칭찬했고, 그녀 또한 얼굴을 붉히면서 좋아했다.
“헤헤…….”
“그래그래, 잘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렴. 너는 이제 나의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애교 많은 대형견 한 마리를 돌보듯 하이디를 듬뿍 칭찬해 준 기억을 떠올리며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마갑주’의 제작을 해 나갔다.
마갑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내부 프레임으로, 신체의 오러를 끌어당겨서 흐르게 해서 갑주 곳곳에 있는 술식을 활성화시켜야 했다.
오러가 흘러야 하는 만큼 이것만큼은 아직 미스릴을 대체할 소재가 없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하이디의 신체에 맞는 프레임을 제작해 나간다.
‘큭! 미스릴은 역시 만만치 않군. …마나 호흡법을 해서 오러를 안 익혔으면 하이디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다루는 게 불가능했을 거야.’
“저기요, 베오날드. 이거 술식… 세공 잘된 거 맞나요?”
“그러니까… 마력을 흘려 넣어 보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베오날드 니임~ 갑옷판 이렇게 만들면 되나요? 근데 엮지 말고 그냥 파츠로 해요?”
“그래, 잘했다. 어차피 프레임에 결합하는 방법으로 붙일 거다. 설계대로만 해라, 설계대로만…….”
총감독 및 프레임 제작의 베오날드, 갑주의 술식 세공은 셀리나, 갑주가 될 파츠 제작은 베시아, 세인은 식사 및 쓰레기 처리 같은 잡일, 하이디는 만들어지는 갑옷 파츠별 실착용 및 테스트 작동을 하거나 알테리오를 돌보기, 그리고 세인을 도와서 작업 보조를 맡는 완벽한 분업 체제로, 마갑주 개발은 그렇게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
일주일 뒤, 바니로 영지 북쪽 야영지.
제국 수도부터 시작해서 북부와 서부, 동부의 귀족들이 결집한 군대의 숫자는 모두 합쳐서 8만이라는 대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미 추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바니로 백작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군을 바니로 백작가로 진격시킬 계획을 세웠다.
가장 큰 천막에는 현재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크멜 공작을 비롯해서 발데리안 백작, 제국 수도군을 비롯한 군 지휘관급 귀족들과 군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대귀족의 급대로 직위는 정해져서 총사령관은 크멜 공작, 부사령관으로는 발데리안 백작, 참모는 제국 수도군 대장인 이오날 경이었다.
“폐하의 말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바니로 백작을 끌어내리고, 하위 귀족들 중에서 제국에 충성할 자를 뽑아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라는군. 물론 그 일은 폐하가 하신다고 했으니, 우리는 진군해서 놈의 목을 따면 된다.”
“으음, 그럼 결국 폐하는 식량 문제에 관해선 감내하시겠다는 입장이라는 거군요.”
“그렇다네, 발데리안 백작. 하아~ 아마 올해부터 내년… 아니, 이 남부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몇 년간 식량난에 시달리게 될지 모르니 말이야.”
“…그래서, 작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 군대를 셋으로 나눠서 평범하게 영지를 제압해 나가는 척한다. 그리고 적의 움직임을 보고 아군으로 올 것 같을 때, 거기서 최소한의 군대만 공격하는 척하고 나머지는 모두 바니로 백작가로 직진해서 주야를 가리지 않는 빠른 공성으로 바니로 백작가의 성을 떨어뜨리고 모든 것을 정리한다.”
“음, 나쁘지 않군요.”
군대를 셋으로 나누는 것은 본래부터가 여기 모인 군대는 가장 크게 나누면 3개의 파벌로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각각 제국 수도군, 발데리안군, 크멜군으로 자동으로 나뉘게 되고, 지휘 계통도 꼬이지 않아서 적이 봐도 당연하게 보일 전략이었다.
하나 그것은 페이크. 셋으로 나눠서 영지들을 정벌해 나가는 척하면 적도 분명 셋으로 나눠서 영격하러 오게 되고, 모두 칼레움 제국의 주력 군대인 만큼 군대의 질도 차이 나기 때문에 바니로 백작가에서도 지원을 보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크멜 공작의 말대로 적들이 나오는 순간, 셋으로 나뉜 각각의 부대는 최소한의 위장용 군대만 남기고 모두 바니로 백작의 성으로 뛰어서 마무리 짓는 방법으로 빠르면서 적을 속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