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그리고 그동안 베오날드는 마도구의 사용 허락과 발데리안 가문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 곧바로 케드론과 오스왈드를 만나 이 ‘마갑주’의 제작에 관한 계획을 설명했다.
“…으음, 보통 이런 건 가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마도구의 확보와 제작 능력이 생기면 나쁠 게 없으니……. 도련님, 어쩔까요?”
“전 무조건 좋다고 봅니다. 마도구의 확보가 곧 가문의 강함. 게다가 마법에 대항할 수단이 생기면… 우리 가문의 복수도 할 수 있으니까요.”
보통 무가(武家)라면 이런 마도구에 의지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법했지만, 발데리안 가문의 경우 ‘마법사’들에게 지독하게 당한 경험이 있고 언젠가 그들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목적의식도 있어서 베오날드의 ‘마갑주 프로젝트’를 허가하기로 한다.
“감사합니다. 하나 그러려면 그 봉인된 곳에 있는 다른 마도구들도 써야 될 것 같은데…….”
“무조건 허락하지. 이미 자네는 우리 가문과 타인이라고 보기 힘든 입장이기도 하고, 성과만 보여 준다면 계속 그것들을 쓰는 걸 허락하도록 하겠네. 또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구해다 주겠네.”
‘말이 통해서 좋군. 하긴 저 선배와는 하루 이틀 같이한 게 아니니 말이야.’
케드론은 이미 수도에서 베오날드에 대해 많은 일을 겪었고, 일단 신뢰를 주고받으면 그만큼의 일을 해 주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현재 가주를 대신해서 승낙을 했다. 그리고 허가를 받은 베오날드는 즉시 ‘술식 세공’과 ‘갑주 제작’을 할 공방부터 꾸리고자 움직였다.
“랄라라라라~”
“오… 좋은 자리를 골랐군. 저택 부지 안이면서 사람들의 동선이 거의 안 겹치는 곳으로 잘 찾았네. 좋아. 땅을 고르는 솜씨도 그렇고, 일하는 모습도 그렇고… 절대 황녀라고 생각을 못하겠어.”
베오날드는 허가를 받은 즉시 베시아를 찾아왔는데, 그녀는 적절한 땅을 골라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한창 땅을 다지는 작업 중이었다.
셀리나를 통해서 전달받은 명령대로 화로와 용광로를 놓을 땅을 골라서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그녀는 베오날드의 황녀 발언에 또다시 발끈했다.
“아~ 이제 그 신분은 버린 셈이라고 했는데, 또또~ 게다가 혹시나 들키면 어쩌려고요~”
“주변의 기척은 진작 살폈습니다. 아무튼… 여기다 임시 공방도 만들 거니 좀 더 부지를 넓게 해 주시고, 필요한 자재량 견적은… 지금 낼 수 있을까요?”
“으음~ 공방도요? 크기가 어느 정도?”
“그냥 대장간 역할을 할 곳이랑 책상 하나랑 갑옷 하나 세워 둘 정도? ‘술식 세공’만 하면 되니…….”
“그 정도면 특별히 신경 안 써도 금방 끝날 거예요. 자재는… 석재 타일이랑 그 밑에 깔 돌들이랑 공사하면서 쓸 다듬어진 목재랑… 그리고 여기 하수도 없죠? 배수로는 그럼 별도로 내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화로랑 용광로에 필요한 자재는 베오날드가 더 잘 알 테고 말이죠.”
“그럼 그대로 발데리안 가문에 전해 두지요. 혹시 인력이 더 필요하면 셀리나를 통해서 지원받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세공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이만~”
그 뒤로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다음엔 다시 가문의 유물이 봉인된 곳으로 오스왈드와 함께 돌아가서 안에서 필요한 마도구를 챙겨 나온 다음, 세인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잘 숨겨 둔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에다 지금 안 쓰는 다른 마도구들을 전부 넣은 뒤 ‘전송의 지팡이’만 남겨 두었다.
“보자, 마력 충전을 이게… 어떻게 하더라. 아무튼… 세인.”
“예! 베오날드 님.”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들을 잘 봐 둬라. 여차할 경우 네가 내 손발이 되어야 한다. 이 마도구의 경우 마력만 충전하고 사용법만 알면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다. 보다시피 이 큐브 모양에 있는 여러 버튼에서 맞는 시동어만 입력하면 된다.”
“왜 그런 중요한 것을 저에게……?”
“지금 내 주변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너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이디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녀는 나의 검이자 창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 베시아와 셀리나는 여전히 타인이지. 고로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세인. 그러니 부탁한다.”
“아… 예!”
평소 그 고고하던 베오날드의 입에서 나온 진심을 담은 부탁한다는 한마디가 세인의 마음을 진하게 울렸고,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베오날드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사실 그녀는 천재인 다른 여성진과 다르게 일개 메이드였고 아직 공부 중인 몸이어서 베오날드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점이 내심 콤플렉스였는데, 지금 베오날드가 자신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 너무나 행복한 것이었다.
‘…베오날드 님이 날 의지해 주셨어!’
‘그녀가 제일 안전한 입장이니 말이지.’
셀리나, 하이디의 경우 각자 특기가 확실하고 배경 신분까지 화려해서 베오날드의 곁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티가 확 난다.
그리고 베시아는 사실 황녀이기 때문에 깊게 관여시키는 것도 무리인 만큼 비밀스러운 일을 맡길 인재는 그녀뿐이었다.
베오날드는 그렇게 세인에게 여러 마도구들의 사용 방법과 마력을 충전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작업은 하이디가 돌아오면 시작해야 하니 말이지. 마갑주의 시제품은… 하이디를 대상으로 만들어야 할 테니…….’
일단 제대로 된 첫 ‘마갑주(魔甲冑)’는 하이디 것으로 만들 생각인 베오날드였다.
베오날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쁘게 일하는 동안 하이디는 알테리오를 돌보는 것 외에는 오롯이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고, 본래 재능도 있던 몸에다 베오날드가 알려 준 황실 기사단 마나 호흡법과 통일 제국 황실 기사단의 무예를 익힌 덕분에 빠르게 강해져서 어느새 베오날드의 무력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쩝, 수련할 시간이… 너무 부족한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 라고 하기엔 태어나면서부터 수련한 나보다 하이디가 더 빨리 강해지긴 했지. 후우~’
결국 재능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며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에 부정하고 핑계를 대 봤자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으며 그저 정신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가장 강한 것이 하이디였고, 그녀의 충성심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마갑주를 맡겨도 될 거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얼른 그녀가 돌아오길 바라며 계속해서 세인에게 마도구 교육을 진행했다.
***
바니로 백작가, 알현실.
본래 바니로 백작과 가신들이 회의를 열고 토론을 해야 하는 알현실은 현재 바니로 백작 없이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그저 혈통만 백작가일 뿐, 그 어떤 재능도 없이 나이만 먹은 바니로 백작은 대부분 가신들이 하자는 대로 따랐기에 사실상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회의엔 참석하고 백작가의 중요한 일에 사인과 승인은 하고 있었다.
“으음… 보고는 잘 들었습니다아~ 역시 제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군요.”
한데 본래 바니로 백작이 앉아야 하는 상석엔 지금 인간이 아닌 청흑빛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을 한 노이멀 총리가 오만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하프엘프인 그녀가 감히 백작의 자리에 앉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본래라면 가신들 중 누군가가 성토해야 했지만, 그녀는 지금 합당한 권리를 행사 중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백작… 대리님.”
백작 대리. 백작으로부터 임명받은 대리자라는 의미.
현재 바니로 백작은 새로 얻은 엘프 신부와의 신혼을 즐기느라 한창 바쁜지라 자신의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으로 고른 것이 바로 이 노이멀 총리였다.
반대하고자 해도 이제 막 결혼해서 자식도 없고, 친인척이라곤 해도 다른 가문의 사람이라서 가신들의 관계에 불편함만 더해지기에 결국 남은 선택지는 바니로 백작 ‘부인’의 친척이자 가르칸 공화국의 대표인 노이멀 총리뿐이었다.
“아직도 호칭이 입에 제대로 붙지 않는다면 그냥 노이멀 총리로도 좋습니다. 아무튼 역시 칼레움 제국의 황제, 눈치가 빠르네요. 대응이 아주 빨라. 군의 소집도 그렇고… 바니로 백작가의 영향권에서 이탈하는 귀족들이 생기겠군요.”
“이미… 생겼습니다. 총리, 이 일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백작님의 의사를 대신한다고 해도… 우린 모두 칼레움 제국의 귀족들이고, 전쟁할 생각은 딱히 없는데…….”
“전쟁이라는 게~ 어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미 저희가 엮인 시점에서 칼레움 제국에게는 이 바니로 백작가의 존재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요. 그렇다고 여러분 중에 백작님을 대신할 분이 있어 보이진 않고 말이죠.”
애초에 바니로 백작을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고, 세력을 빼앗을 수 있었다면 진작 이 백작가의 주인이 바뀌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귀족의 자리란 꼭 좋은 것만은 아니고, 또 선대 바니로 백작의 수완과 명성도 뛰어났으며 사실 지금의 바니로 백작 또한 무능할 뿐이지 그렇다고 막 폭정을 일삼거나 다른 귀족에게 폐를 끼치는 인물은 아니라서 그의 자리를 빼앗을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는 엄연히 외국인이라서 이 자리의 장식 같은 존재이니까요. 자자~ 빨리들 결정하셔야죠. 바니로 백작가를 버리고 황실에 붙으실 건가요? 아니면 의견을 관철하고 군사를 모아서 싸울 준비를 하고 물러나게 하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식으로 저희 가르칸 공화국의 군사 투입을 요청하셔도 된답니다.”
‘망할 암여우 같으니!’
‘이대로 바니로 백작가를 배신한들… 결국 근거지가 이곳이라서 버릴 수 없는데 말이지.’
‘반대로 황제 측에 붙는 것도 마찬가지야. 이 남부의 요충지는 결국 바니로 백작의 것이라서 그 영향력이 큰 것인데……. 끄으응! 게다가 명분이 없는 게 문제야. 엘프와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엘프라 하면 수많은 설화나 전설의 영웅들이 꼭 한 명씩 끼고 있는 부인 아니던가? 당연히 문제 삼을 수 없으며, 후계자에 관해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명분으로 세울 수 없었다.
‘하여간 망할 황제 놈이! 황녀 간수를 못해 가지고… 하아~ 아무튼 올 게 온 셈이군.’
가장 큰 원인은 바니로 백작의 근거 없이 높은 여성 취향과 고집이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들인 노력을 배신한 황제 측에 결국 책임이 전가되었고, 그 명분은 누구도 그가 가르칸 공화국의 엘프와 결혼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런 전개가 될 거라고 감은 잡았지만, 황제의 행동이 너무 빨랐기에 대응이 난감해진 상황이었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겠지. 후훗.’
노이멀 총리는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추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 그녀의 소원은 다름 아닌 이 대륙,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사라지는 것으로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음~ 여러분, 좋은 방법 하나… 알려 드릴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조언인데 말이죠.”
“…방법?”
“예. 황실에서 이 바니로 백작가의 영역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식량 문제 때문이지요. 남부의 황금벌판, 곡창 지대, 축복받은 땅과 거대한 강의 풍부한 수원 덕분에 대륙에서 가장 많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고, 이제 곧 추수할 시기가 다가오죠.”
“그래서… 설마?”
노이멀 총리의 말에 눈치를 챈 건지 한 귀족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정신이냐는 시선이었지만, 노이멀 총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자신의 가치, 그리고 상대가 노리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그것으로 협박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금 추수를 기다리는 곡물의 절반이 불타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지금 전쟁을 하러 오는 이유는 식량 때문인데, 그게 날아간다? 그러면 더욱 전쟁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찌 살란 말이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태워 버린 양만큼의 식량을 저희 가르칸 공화국에서 무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뭐라고? 무, 무상?”
“예. 결혼 지참금 같은 의미로 말이죠.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아~ 다만 운송비만 조금 부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후후훗, 아무튼 이제 배경이 생겼으니 협박을 해 볼 만하지 않으신가요? 먹히면 좋고, 먹히지 않아도 황제 측이 군을 일으킨 의미를 없애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가문을 지킬 가능성이 커집니다. 어떠신지요?”
노이멀 총리의 조언에 바니로 백작가의 가신과 귀족들은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황제 측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는 이유는 가르칸 공화국에 바니로 백작가가 종속되는 것을 걱정해서였는데, 그 걱정의 이유는 바니로 백작가의 주변에 있는 곡창 지대 때문이었다.
작전 중엔 청야 작전이라는 것도 있고, 상대의 노림수로 역으로 협박하는 것은 전략, 전술상으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으며, 정말 운이 좋으면 이걸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도 보였기에 모두의 의견은 아주 자연스럽게 노이멀 총리의 생각대로 흘러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