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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33화 (133/259)

[133화]

교단에 급한 전갈을 보낸 뒤 황제는 대귀족들이 모이길 기다렸고, 다들 수도 내에 있었던 덕분에 모두 한 시간 내에 황궁에 입궐해서 커다란 회의실에 모일 수 있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대귀족 20인이 전부 다 모인 것을 확인한 황제는 곧바로 소집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렇게 급히 그대들을 모은 것은 보통 사태가 아니기 때문일세. 그 사태에 대해서 해야 할 말과 설명이 많으니 집중해서 들어 주게나.”

우선 바니로 백작가와 황녀의 혼약을 몰래 진행한 것부터 시작해서 베오날드라는 청년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 그리고 깨어진 혼약의 틈으로 남동쪽에 있는 이종족 국가 가르칸 공화국의 지도자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가 수작을 부려서 바니로 백작과의 혼약을 진행시켰다는 것을 줄줄이 말했다.

“그래서 곡물 생산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남부를 자칫하면 빼앗길 위기에 처했네. 특히나 이제 곧 가을이 오는데, 국내에 돌아야 할 식량들이 외국으로 유출되기만 해도 식량 시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네.”

“…그거 큰일이군요.”

“이거 심각한 사태인데…….”

“식량 가격이 오르면… 으으음…….”

황제의 설명에 대귀족들은 각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영지에서 농업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지만 농업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시대엔 식량이 늘 부족했다.

기본적으로 세수도 높고, 농장은 대부분 영주가 독점하고 있기에 백성들의 경우 식량을 구매하거나 자급자족을 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자급자족도 사실 쉬운 게 아닌 게, 사냥이나 채집을 할 만한 안전한 산이나 숲은 거의 없고, 위험종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서 극히 제한적인 상황. 황제의 말대로 식량 시세에 문제가 생기면 백성이든 영지의 자금이든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미 막는 게 늦었다는 점이 크군요.”

“하여간 그 껄떡쇠인 바니로 백작 놈이 올라갔을 때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무튼 무엇보다 제일 시급한 일은 바니로 백작가 아래의 귀족들을 가능한 한 포섭하는 일이오. 멍청한 짓을 한 바니로 백작가는 몰라도 그 아래의 귀족들까지 멍청한 짓에 합류할 거라 생각되지는 않으니…….”

“하나 최악의 경우 전쟁도 대비해야 할 겁니다. 아니, 상대는 미리 대비하고 있겠지요.”

일단 이 대귀족들 안에서 끗발이 있는 크멜 공작, 발데리안 백작, 뵐른 후작, 오웬 공작 등등이 의견을 제기했다.

여기 있는 대귀족들 모두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칼레움 제국의 존속엔 찬동하는 측이었다.

이 난세를 버티려면 독불장군식의 정치로는 불가능했고, 주변의 다른 나라 상황에 비하면 칼레움 제국이 가장 살 만한 곳이었기에 대귀족들은 다들 바니로 백작에 대한 압박엔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그 철혈요정인데… 금기의 가문이 낳은 잡종 하프엘프가 어디까지 꾸미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추수할 시기인 가을이 오기 전에 해결할 수 있게 서둘러 움직입시다. 못해도 삼… 아니 두 달 내에 해결해야 합니다.”

“저희는 바니로 백작가의 영지와 가까우니 가신들에게도 뇌물과 연락을 통해서 회유를 시도하겠습니다. 친인척들이 몇 명 그쪽과 혼인을 맺어 놨으니 가능할 겁니다.”

“국경을 수비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내려보내겠습니다. 사태를 빠르게 해결하고자 한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장기전이 되면 큰일이니 말이죠.”

이해가 맞는 회의엔 이견이나 거침이 없었고, 대귀족들은 논의 끝에 여러 방안들을 마련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발데리안 백작 또한 군의 소집과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가문의 귀중한 유산을 찾아 준 베오날드에 대한 처우를 결정해서 그에게 전갈을 보내었다.

***

얼마 뒤, 발데리안 가문 영지 저택.

유산의 봉인을 풀고 가문의 유산을 찾은 베오날드에 대해 발데리안 가문은 나름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있었다.

베오날드뿐만 아니라 그 시중을 드는 세인, 하이디, 셀리나, 베시아까지 모두 귀빈실을 배분해 주었고, 발데리안 가문의 일원과 동등한 대우를 하도록 조치가 되어 있어서 다들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오오… 세상에, 이런 재주를 감추고 있었나?”

“도련님, 모르셨습니까?”

“알 수 없으니 몰랐지!”

하나 베오날드에겐 반드시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을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그는 감정과 사용법을 알아낸다는 빌미와 함께 자신이 이 ‘자신의 마도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술식 세공’ 능력과 연금술의 실력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이게 다 마탑의 4급 마법사이신 셀리나 님의 도움이 있었던 덕분이죠.”

“…음, 그렇군요.”

‘뭐래, 이 뻔뻔한 남자가……. 하지만 나도 고대의 기록에 넘어가는 바람에… 하아아~’

그리고 모자란 개연성은 셀리나를 통해서 해결했다.

셀리나로선 베오날드가 가지고 온 약 500년 전 고서의 내용을 알려 준다는 떡밥에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베오날드가 솜씨를 부려서 만든 것은 바로 ‘자동 펌프 마도구’. 스위치만 넣으면 물이 콸콸 나와 주는 것으로 일일이 우물에서 물을 푸거나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좋은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겨울엔 물이 얼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말이죠. 내부는 금으로 코팅했으니 녹이 슨다거나 하는 걱정은 좀 덜할 겁니다. 나중에 쓰다가 녹물이 나오면 바로 이야기해서 정비하십시오.”

“오오… 알겠습니다.”

“…대체 이런 재주는 어디서 얻은 건지. 기가 막힐 노릇이군.”

간단하면서 편리한 마도구를 몇 개 제작해서 보여 주는 것으로 능력 증명을 끝낸 베오날드는 자기에게 맡겨 달라면서 새로운 마도구에 대한 기대를 하게 하는 것으로 그렇게 자신의 도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묘한걸요? 아무리 발데리안 가문 사람들에게 유물의 봉인을 풀어 줬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허락할 리가 없을 텐데요?”

“그야 보통은 그렇겠지만, 현재 발데리안 가문이 가진 문제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문제요?”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가 어디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바로 ‘다이나 왕국’이다. 게다가 그놈들에게 자신들의 영지를 한번 털린 역사까지 가지고 있지.”

‘오오오! 잘 아시는군요! 예! 그 마법 성애자 놈들이! 감히! 우리 영지에서 통일 제국의 유산을! 크으으으으으으!’

그러면서 유물을 해독하기 위해서 내려올 때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본래 발데리안 가문은 베오날드의 총애를 받으면서 세력을 키웠고, 베오날드는 수많은 마도구와 유산들을 넘겨줬는데 그걸 다이나 왕국에 빼앗긴 것이었다.

물론 유산 이전에 ‘기사’이자 귀족 가문으로서 본거지를 한 번 빼앗긴 것 자체가 큰 치욕이며 평생의 원한이었다.

“고로 다이나 왕국과는 철천지원수인 만큼… 대항하기 위해선 당연히 마도학에 밝은 인재가 꼭 필요한데……. 바로 옆에 마법 지상주의를 펼치는 나라가 있으니 마법사나 연금술사의 씨가 말랐을 수밖에 없지.”

“하긴 마탑에서도 다들 다이나 왕국에서 어떻게 살지 고민할 정도였으니……. 그건 그렇고, 국경을 코앞에 두고 여긴 잘 버티네요?”

“아니, 버틴다가 아니라… 아마 신경을 못 쓴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일단 국가적으로 마법을 기준으로 모든 걸 하기에 국가의 모든 인재들이 마법에만 열중해서 다른 학문들이 발전 못한 점도 있고, 또 영토가 크면 그만큼 행정력에 인재가 배분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지.”

“아아…….”

다이나 왕국은 마법 명문가가 지배하며, 그 성질 자체가 마법 지상주의 국가이다. 군사력은 마법 연구와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행정력을 비롯해서 상업, 농업 연구 같은 건 하는 사람도 없고,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법 공부를 했기에 결국 반쯤 방치되거나 아니면 마법사들 중에서 재능 없는 이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

“즉, 그 나라는 이미 자기들 나름 완성된 상태라서 딱히 이유가 있는 게 아니면 얌전히 두면 된다는 거다. 발데리안 가문의 감정은 별개지만 말이야.”

“근데 이유가… 이제… 있지 않아요?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을 훔쳐 간 게 그 마법사분들이니까 지금 또다시 유물이 해방되었다는 걸 알면?”

“아, 아마 노리러 오겠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발데리안 가문에서도 그 점을 유념하고 있어서 그런지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런 것에 방심할 생각은 없지. 다만… 너는 어쩔 셈이지? 다이나 왕국은 엄연히 마법사들의 세상이자, 마탑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다. 거길 적대하는 건 마법사인 너로서는 곤란할 텐데?”

에둘러서 말했지만 확실하게 위치를 정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마탑의 편 아니면 자신의 편을 정해 두라는 의미. 안 그러면 곤란할 거라고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셀리나는 아직 베오날드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적으로 돌아서면 얼마나 철저하게 보복을 할지가 두려웠고, 어설프게 줄타기를 하려고 했다간 분명 가혹한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당연히 베오날드 님에게 붙어야지요!”

“호오… 의외군. 마탑 쪽에 붙는 것도 좋을 텐데, 왜지?”

“베오날드 님은 그래도 계산은 깔끔하잖아요. 반대로 저쪽은 얼마나~ 지식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게다가 남이 한 발견도 뺏는 사람도 많고 말이죠. 정말 피곤해요.”

“아~ 그렇긴 하군.”

마법사들이 순수 지식과 진리의 탐구, 마법에 미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안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마법’을 위해서 다른 모든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종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같은 마법사들끼리도 ‘학파’가 다르면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으며 제자의 성과를 빼앗는 스승도 있고, 제대로 된 지식은 안 가르쳐 주고 단물만 빨아먹는 작자도 있는 데다 서로 남의 연구를 훔치려고 드는 것들이 일상이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틱틱대긴 해도 깔끔하게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쪽에 붙으면 메리트가 더 많으니까요.”

“아주 현명한 선택이군. 그런 현명한 너를 위해서 하나 충고해 주지. 나는 배신자를 정말 싫어한다. 나를 적대하는 자는 경우에 따라 살리거나 협상할 여지가 있지만, 배신자에겐 그런 아량조차 없다.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다.”

“아, 알았어요! 명심할게요!”

“좋아. 그럼 이걸 보도록. 네 도움이 필요하다.”

대답을 들은 베오날드는 곧바로 그녀의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설계도 같은 것으로, 거기엔 수많은 술식과 수식, 필요한 것에 대해 적혀 있었다.

완성품은 갑옷 같은 것이었는데, 그녀는 기이한 눈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마도구를 만들려는 것 같은데… 갑옷 마도구인가요?”

“정답이다. 쉽게 이해하면 갑옷에 마법 술식을 새겨서 성능을 올리고, 사용자의 능력을 보충하는 것이지. 할데온 유적에 있던 설계 사상인데… 본래는 일반인에게 기사급 전투력을 줄 방법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 물건이더군. 봐라, 이 등 쪽에… 깎아 낸 마정석을 연료로 쓰는 공간이 있지?”

“어머,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그… 기사급 육체 능력을 갑옷으로 준다고 해도 결국 수련이 필요할 거고, 전투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닐 텐데…….”

“그래서 실패했던 거겠지. 하지만 발상을 바꿔서 이걸 ‘기사’에게 준다면 어떠냐? 한 명, 한 명 얻기 힘든 전력인 만큼 잃으면 손해가 막심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급 기사를 중급의 영역, 중급 기사를 상급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오오…….”

“…자, 그럼 설계 설명은 여기까지! 네가 다른 세 사람에게 똑같이 이걸 설명해 주고, 내 지시대로 준비를 시켜라. 하이디에겐 모험가 길드로 가서 몬스터 토벌 임무를 받아서 마정석을 가능한 한 많이 구하라고 하고, 베시아에겐 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용광로의 틀을 준비하라고 전해라. 나는 그동안 세인의 보조를 받아 술식들을 준비하고, 발데리안 가문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결국 부려 먹으려는 거잖습니까? 에휴~”

셀리나는 한숨을 쉬며 살짝 불평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기뻐하고 있었다.

일단 자신에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것부터 해서 청사진까지 말해 주는 걸 보면 확실히 아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이 설계도에 있는 마법 술식들을 연구하게 되면 확실히 마법적 성과가 날 것 같았기에 그녀는 곧장 베오날드가 시킨 일을 행하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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