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이… 이건?”
“세상에! 이렇게 빨리 풀릴 줄이야! 역시 형님이 괜히 보내신 게 아니군요, 도련님!”
“…정말 놀랄 일의 연속이군요, 삼촌. 저도… 이 정도로 빨리 풀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뒤에서 감탄과 경악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베오날드에겐 그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보고 너무나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먼저 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초상화였는데, 다름 아닌… 500년 전 전생의 자기 자신이 그려진 것이었다.
‘이걸 왜… 여기에?’
위풍당당하게 여러 자루의 검을 들고, 온갖 보석과 장신구, 고급스러운 호랑이 가죽으로 과하게 치장한 채 폼을 잡고 있는 젊은 시절의 베오날드 공작. 하나 지금의 베오날드에게는 마치 중학교 2학년 때 자작 캐릭터 설정 흑역사가 보관되어 있던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 자식… 저승 가서 여신님에게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꼬옥 한 대 때려야겠다.’
난데없이 나타난 흑역사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베오날드는 당장이라도 이 불경한 물건을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엄연히 이건 발데리안 가문의 물건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뭐지? 여기 그려진 분은 누구죠? 삼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게 다행일지도……. 하아아~ 망할 녀석, 이걸 왜 여기에다 넣은 거야?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이 그림…….’
베오날드 스스로가 그리게 만든 젊은 시절의 자아도취에 가득한 그림이라면 이곳에 있을 게 아니라 자신의 영지인 베노피스에 있어야 했다.
원래는 저택 홀에다 걸어 둔 것이지만, 나이 먹고 나니 흑역사로 생각돼서 현자 타임이 와서 성 지하 창고에 짱박아 놓았던 물건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무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드디어 봉인이 풀렸군요, 베오날드 님. 정말 감사합니다! 오오오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뭔가… 뭔가 또 장치가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괜히 다가갔다가 다칠 수 있습니다. 어떤 마도구가 있는지 모르니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크흠!”
흥분하는 오스왈드를 말리면서 베오날드는 그림을 제쳐 두고 다른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상자 안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지팡이, 반지와 팔찌, 벨트, 신발 등등… 여러 물건들과 책들이 있었다.
지팡이와 반지, 팔찌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마도구였는데, 자세히 보던 베오날드는 그것들의 정체를 금방 깨닫게 되었다.
‘이거… 거의 다 내 물건들이잖아? 맙소사… 하!’
베오날드는 자신이 전성기 시절 직접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정사각형으로 된 틀에 각진 보석이 여러 개 박혀 있는 지팡이. ‘전송의 지팡이’로 통일 제국 전역과 수많은 연구 시설과 보관 시설을 돌보기 위해 베오날드가 만든 것이었는데 언제 어디서든 이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마력 충전’과 해당 시설의 ‘마법진’이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자주 쓰는 술식들을 담아서 언제든 새길 수 있는 세공의 반지들, 마정석의 마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마력 저장 팔찌’, 대상의 무게와 길이를 단번에 보여 주는 ‘판별의 반지’, 그리고… 이 책들도 내가 기록해 놓은 중요한 술식과 정보, 새로운 마도구 아이디어 노트와 기록… 그 녀석, 대체 어떻게 이걸…….’
베오날드는 현재 자신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어이없어하는 중이었다.
아니, 어떻게 자신의 물건만 이렇게 보관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기막혀 하고 있었는데, 이 물건들을 보며 당황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데 왜 굳이… 이것들을 넣어 둔 거지? 더 굉장한 마도구들도 많은데?’
이 물건들도 이 시대와 비견해 보면 충분히 대단했지만 전부 ‘술식 세공’과 마도구 제작, 연금술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이다.
마도구 아이디어 노트와 기록들은 나름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미 완성된 각종 마도구들에 비하면 빛이 바랜 느낌. 왜 굳이 이런 것을 넣어 두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이거… 보물 같으면서도 낯선 물건들이군.”
“대체 선조님은 무슨 생각이셨을까요? 뭔가… 우리 집안 성격을 생각하면 검이라든가 갑주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모든 물건의 사정을 아는 베오날드뿐만이 아니었다.
발데리안 가문의 후손들도 나름 선조에게서 가풍이나 역사를 육성이나 다른 기록으로 물려받았는데, 가문의 기질을 생각하면 그들 말대로 무기나 갑주 같은 게 있어야 정상 아닌가 싶었던 그들은 의아해한 것이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대체 케르웰 녀석은 왜… 어? 이건?’
기묘하게 생각하던 중 베오날드는 물건들의 바닥에 깔려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을 문 케르베로스’ 문양의 일부. 그래도 뭔가 하나 남겼구나 생각하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자, 붉은색으로 도색된 바탕에 검을 문 케르베로스가 검은색으로 그려진 대형 방패였다.
‘이건… 지옥문의 방패? 그렇지. 이런 게 남아 있어야지.’
드디어 나온 마도구다운 마도구. 베오날드가 만든 역작 중의 하나, 지옥문의 방패였다. 한 전투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특수한 힘을 내장한 마도구로 케르웰 폰 발데리안에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방패……?”
“오… 이건 뭡니까?”
‘이 방패를 모른다고오? 이거야말로 발데리안 가문의 정신, 발데리안 가문의 긍지, 발데리안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방패인데… 아!’
베오날드는 후손들의 기가 막힐 소리를 들으며 현재 발데리안 가문의 문장을 다시금 기억해 냈다.
그래, 단순히 검 3자루로 바뀐 건 자신과 역사의 흐름과 내전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떠올린 것이었다.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베오날드는 오스왈드와 케드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지금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분들은 방패를 안 쓰십니까?”
“그렇네만?”
“예. 뭐, 가끔 궁병대를 향해서 기마 돌격을 할 때 쓰는 것 빼고는 그렇긴 합니다.”
“…그렇군요.”
겉으론 차분히 대답한 베오날드였지만 속은 분노로 끓어넘칠 것 같았다.
케르웰 폰 발데리안으로부터 시작된 발데리안 가문의 본래 장기는 튼튼하게 버티는 보병전이다.
게다가 본래 귀족 출신도 아니라서 ‘기사’의 긍지 같은 것도 없어서 단궁과 마름쇠를 들고 기병들의 견제도 챙긴 그들은 통일 제국 시기, 검과 방패를 들고 나란히 서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지옥문과 같다는 명성을 얻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 방패, 발데리안 가문의 유산이고 마도구임은 확실합니다.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판별해야 하지만 우선… 케드론 님에게 맡기지요.”
“아, 고맙네. 아무튼 오자마자 봉인을 풀어서 이렇게 가문의 유산을 개방해 줄 줄은 몰랐네. 정말… 아버지를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네.”
“아닙니다. 하나 개방은 했어도 아직 물건들의 용도와 판별을 비롯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이 책들부터 가지고 나가서 번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자는 다시 닫고 말이죠.”
가능하면 지금 자신의 물건이었던 이 마도구들을 챙기고 싶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500년 전의 그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라는 증명을 할 방법이 없었다.
엄연히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 상자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는 지금은 챙기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고,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서 다시 상자를 닫아 버렸다.
그에 대해 뭔가 반응을 보이거나 항의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음… 우선 중요해 보이는 가문의 유물은 줬고, 나머지는 이들의 눈에는 그냥 평범한 보물처럼 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감시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쾌거군요, 도련님. 형님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예, 삼촌. 아버님이… 그토록 노력했던 게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핫.”
베오날드의 생각과 다르게 발데리안 가문의 두 사람은 ‘지옥문의 방패’와 유물의 봉인이 풀렸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후 그들은 먼저 조사할 책과 방패를 들고나왔고, 베오날드는 오자마자 유물의 봉인을 풀어 버리고 가문의 보물을 찾아 준 덕분에 단숨에 가문의 은인이 되어 가히 황실의 손님 정도로 화끈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경축할 만한 소식을 듣고 방금 막 잡은 새끼 암소로 만든 스테이크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베오날드 님.”
“오오… 저것이 바로 선조님의 유물이군요.”
“가주님이 아시면 정말 좋아하시겠군요.”
본래 발데리안 가문에서는 식사를 적당히 쌓아 두고 자유롭게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식솔들과 저택에 머무는 다른 가문의 귀족들까지 오직 베오날드의 대접을 위해 모두가 일반 귀족처럼 각자 자리에 앉아서 정중하게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들어 있던 ‘가문의 비보’를 발굴해 낸 기념비적인 날이며, 가문의 명예가 다시 선 날이니 예를 차리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가문의 비보를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베오날드 님. 이건 엄청난 공이고, 이미 전갈을 보냈으니 아마 형님이 돌아오시면 큰 상을 내리실 겁니다.”
“그러면 정말 좋겠군요. 하하핫, 감사합니다.”
웃으며 오스왈드가 건네는 술잔을 받은 베오날드는 기뻐하면서도 속으론 어떻게 해야 유물 안에 있는 마도구들을 자신이 받을 수 있을지 이리저리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하였던 케르웰이 어떻게 그 마도구들만 모아 놓은 건지에 대한 이유는 둘째 치고, 그것들은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기에 그는 계속 고민하면서 식사를 해 나갔다.
***
칼레움 제국, 황궁.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이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로 가서 일을 보는 사이, 황궁에는 바니로 백작에 대한 소식이 가장 빠른 전갈로 전해졌다.
남쪽의 대귀족인 바니로 백작가가 결국 황실을 배반하고 이종족들의 나라인 가르칸 공화국과 손을 잡은 건 물론이고 혼약까지 맺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이 혼약 하나로 인해서 바니로 백작가의 영역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가르칸 공화국 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 최대 식량 생산지인 그곳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야기할 국가적 여파가 너무나 컸다.
“…으으으으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거지? 국경 쪽에 있는 첩보부는 뭘 했나?”
“그게… 백작이 의견을 받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고 승낙해 버렸고,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국경에 대기하고 있다가 전갈이 온 순간 들어갔다고 합니다. 예… 바니로 백작의 생각이 너무 읽기 쉬웠던 탓이겠지요.”
“끄으으응!”
칼레움 제국의 황제는 낮은 신음을 터뜨리며 자신이 제대로 방심했다고 자책했다.
근래에 머리 아픈 문제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응한다고 조금 방심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바니로 백작에 관해서는 계속 협상할 인원을 붙이기도 해서 손을 좀 놓아 버렸는데, 가르칸 공화국의 노이멀 총리가 그 틈을 예리하게 찌른 것이기도 했다.
“…그 망할 잡종 년이! 끄으으으응!”
딱… 딱…….
손가락으로 옥좌 팔걸이를 두드리며 황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미 한 방 크게 먹은 상황이고, 전갈이 오는 시간 동안의 일 진행을 볼 때 이미 결혼식은 끝내 버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바니로 백작에 대해선 이제 협의와 말로 해결할 단계는 넘어선 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지금 즉시! 수도에 거주하는 모든 대귀족들을 소집, 긴급회의를 준비하도록 해라. 시급한 문제이니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하라고 전하도록!”
“예!”
황제는 즉시 대귀족들을 소집하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곧바로 이행되어 수도에 거주하는 대귀족들의 저택으로 한 집안에 2명씩 말들이 출발했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할데온 유적의 일은 잠시 접어 둬야 했기에 황제는 유적으로 간 황실 기사단을 부르고 ‘교단’에 쓸 편지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