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오… 이건…….”
“어떻습니까?”
“뭔가 보이나?”
‘이거 내가 만들어 준 거잖아!’
약 500년하고 30년 전쯤, 베노피스에서 수많은 서류의 산과 싸움을 하던 시절의 풍경이 떠오르는 베오날드. 그런 그의 측근이자 발데리안 가문의 시조인 케르웰 폰 발데리안이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었다.
‘공작님~! 보물 상자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너는 또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 상자라면 적당한 걸 써라.’
‘중요한 보물이나 마도구 같은 걸 감출 마도구 상자가 필요합니다. 어쭙잖은 거 말고요. 게다가 공작님이 저랑 저희 집에 주신 것들 중에 그런 거 많잖습니까? 막 누가 가져가거나 하면 안 되고, 집안싸움에 동원되거나 하면……?’
‘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알았다. 시간이 나면 만들어 주도록 하지.’
그래서 각종 술식으로 보호해서 보안성이 높고, 튼튼하면서 내부의 마정석도 최고급으로 넣어서 천 년 이상은 갈 대형 보물 상자를 만들어 주었고, 그게 지금 베오날드의 눈앞에 있었다.
‘설마 내가 이걸 열러 올 줄이야. 참, 운명이란 기이하군.’
“뭔가 좀… 보이십니까?”
“예, 그… 예상한 대로 특정 물건을 봉인 및 보관하기 위한 마도구가 맞습니다. 보안 절차가 16개… 술식 대부분이 질문에 적합한 답변을 해야 넘어가지는 음성 입력 방식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기만 했는데 그걸?”
“글자를 대강 해석해 보니 그렇더군요. 아시다시피 500년 전의 문자이니…….”
차마 ‘내가 만든 거니까요.’라고 대답할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적당히 상자 위를 떠다니는 술식과 문자를 해석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자 위에 떠다니는 문자와 술식의 정체는 바로 이 상자의 보안을 열기 위한 ‘질문’들로, 대상을 누구로 했는지는 내용을 확인해 봐야만 했다.
‘근데 이거 내용이 참 골 때리는군. 분명히… 케르웰 그 녀석이 직접 설정하게 했는데…….’
[이 대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는?]
‘보통은 연금술의 대명사인 파라켈수스라든가, 마도 술식을 발견한 와트라고 대답할 텐데…….’
이 질문은 상식을 묻는 게 아니라, 이 질문을 암호로 걸어 놓은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자신의 측근인 케르웰이라면 당연히 누굴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라고 생각하겠는가?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베오날드는 지금 자신을 쳐다보며 기대 어린 눈빛을 하고 있는 두 사람부터 이 방을 나가게 해야만 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라도 이 상자에 위험한 보안 장치가 걸려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실수할 경우를 대비해서 두 분은 거리를 좀 두셨으면 합니다. 제 실수는 저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게 말입니다. 크흠! 아, 아예 나가 달라는 건 아닙니다. 몇 걸음만 뒤로… 적절히 거리를 두었으면 합니다.”
“으음… 그러도록 하지요. 도련님, 같이 물러납시다.”
“그러지요.”
다행히 봉인을 푸는 것이라 생각했고, 고작 몇 걸음쯤은 괜찮다고 생각한 덕분인지 두 사람은 쉽게 물러났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심호흡을 한 뒤 상자에 떠오르는 술식을 향해서 조용히 정답을 이야기했다.
“제국의 섭정, 베노피스의 주인, 마스터 연금술사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더 큰 소리로 외쳐 주십시오.]
“이 망할 상자 같으니……. 적당히 말해도 알아 처먹게 만들었을 텐데……! 는… 500년이 지났지, 참. 크윽!”
안 쪽팔리게 조용히 말했지만 시간의 흐름 혹은 물리적, 마법적 충격으로 인해서 아마 술식 세공이 몇 군데 손상되어서인지 베오날드의 목소리를 제대로 인식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 대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연금술사는?’이라는 질문에 자신의 이름을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해야 하는 베오날드였다.
‘…어떻게 그놈은 죽어서도 날 힘들게 하냐?’
“음, 역시 봉인이 쉽게 풀리는 게 아닌가 보군요, 삼촌.”
“쉽게 풀렸으면… 그를 초청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도련님.”
“제국의 섭정, 베노피스의 주인, 마스터 연금술사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베오날드는 빠르게 500년 전의 말을 외쳐서 첫 번째 보안을 풀어냈다.
수치 플레이도 이런 수치 플레이가 없는 상황.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남이 우러러보는 맛, 적을 짓밟는 맛에 사는 거지, 스스로 역사와 인류의 전설들을 능가했다고 말하는 건 그저 쪽팔릴 뿐이었다.
[1단계,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후우… 이제 괜찮겠지.”
[2단계 질문-이 대륙 역사상 최고의 귀족은?]
‘…이런 시시한 질문을 써넣으려고 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한 건가?’
이마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베오날드는 저승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이걸 설정해 놓은 케르웰 폰 발데리안을 만나서 족쳐 버리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게 최고의 보안이 되는 게, 통상적인 질문 같으면서도 이 질문 제작자의 성격이나 기록을 챙기지 않으면 제대로 된 답을 절대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견 합리적인 것 같았지만, 500년 뒤 베오날드가 이걸 직접 열게 되니 상황이 골 때리게 된 것이었다.
“끄으으으으으으응…….”
“방금 뭐라고 외친 것 같은데… 뭔가 문제가 있나? 왠지 자기 이름을 외친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신의 두뇌에 기합을 넣으려고 한 겁니다. 그 왜 검을 휘두를 때도 기합을 넣잖습니까?”
“…아, 그렇지, 그렇지.”
“아자! 힘내자! 제국의 섭정, 베노피스의 주인, 마스터 연금술사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을 거는 케드론 발데리안의 말에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베오날드는 능숙하게 질문에 대답해 나갔다.
어차피 이다음 질문도 이런 식일 테니 빠르게 해결하자고 생각한 그는 두 번째 보안이 풀리고 세 번째 질문 메시지가 뜨기 전에 미리 외쳐 버렸다.
“아자! 아자! 제국의 섭정, 베노피스의 주인…….”
[3단계 질문-‘술식 세공’은 마탑의 역사 속에서 발견 이래 최대의 성과 중 하나였지만 그 사용처는 한정되었고,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루지 못했었다. 이를 발전시킨 것은 위대한 대연금술사이자 제국 섭정이신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었고, 실용주의 마도학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어 다양한 마도구의 생산과 제작에 활용되어 왔으며, 현재 이 보물 상자 또한 그 ‘술식 세공’의 발전된 기술의 혜택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면 ‘술식 세공’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여기서 갑자기 전문적인 문제로 들어가지 말라고!”
“왜, 왜 그러십니까?”
“아하하하… 그게… 해독한 문제가 갑자기 난이도가 뛰어서 말이죠. 하아~ 아무튼 역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죠. 역시 쉬운 작업이 아닐 테니까요.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여기서… 이걸 열 때까지 안 나갈 생각입니다. 식사와 물을 부탁드립니다. 다른 건 제가 챙겨 왔거든요. 아… 그리고 제 부하들의 신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한 뒤, 베오날드는 곧바로 첫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 문제의 정답은 당연히 모를 수 없기에 아주 쉽게 ‘주문 술식, 마력, 매개.’라고 대답하자 곧바로 술식이 사라지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다음에 나타난 문제는 연금술에 관한 것이었다.
‘…음, 이번엔 또 다른 게 나왔군. 그러니까 ‘바라미온’ 마력초의 연금술로서의 사용 방법을 설명하고, 같이 사용해선 안 되는 성분이 담긴 풀 다섯 종류를 말하시오? 무슨 아카데미 시험도 아니고 말이지.’
게다가 과목이 아까는 ‘술식 세공’이었다가 이번엔 ‘약초학’으로 확 넘어가는 게 웃겼다.
케르웰 폰 발데리안. 자신의 부하였지만 정말 막무가내이고, 제멋대로인 들개 같은 기사.
사실 본래 기사도 아니었지만 자신이 거둬서 길들인 거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백작 작위까지 주게 되었다.
‘알았나? 발데리안 백작. 이제부터 자네는 발데리안 백작일세.’
‘푸카카카카카칵! 그만! 그만하세요! 공작님! 제발! 끄아아아아아! 내가 백작이라니! 내가 백작이라니!’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부를 거다. 발데리안 백작~’
‘끄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공작니이이임!’
문제를 풀어 나가니 백작이 된 날, 온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던 놈의 모습이 생각났다.
연금술 문제를 푸니 다음은 군사 전략, 그다음은 통일 제국 시절 기준의 행정학, 그다음은 통일 제국 시절 기준의 귀족 문화와 매너 등등… 점점 내용이 가관이었다.
‘…이걸 대체 누가 풀라고 만들어 놓은 건지 모르겠군. 후우~ 어처구니가 없어. 하여간 케르웰 그놈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보자… 이번 문제의 답은 포크-나이프-숟가락-젓가락 순서군.’
‘아~ 다음 생에도 공작님 부하로 태어나고 싶다.’
‘너도 제법 아첨을 잘하게 되었구나.’
‘…아뇨. 진심입니다만?’
풀면 풀수록, 계속해서 그 망할 케르웰에게 따지고 싶어져서 그런 건지 과거의 기억들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베오날드는 풀 수 있었지만, 난이도가 도저히 발데리안 가문의 후손은 풀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처음 두 문제는 베오날드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절차로 어떻게 이해해 줄 수 있었지만,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베오날드가 아니면 못 푸는 문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어딜 봐도 이 상자는 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혹시… 위험한 게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케르웰 그 녀석이 좀 들개 같고 막무가내이긴 해도 생각 없이 이렇게 해 놓진 않았을 건데…….’
이 정도 수준이면 상자를 열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잠금 레벨이라고 해야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베오날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벌써 열 번째 보안을 넘겼는데, 만약 여기서 감당할 수 없는 존재나 물건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대체 여기에 뭘 넣어 놨을까?’
자신의 혈족은 절대 열지 못할 레벨로 봉인된 유물. 그렇다 보니 베오날드의 의심은 점점 커져 가는 동시에 케르웰 폰 발데리안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명예스러운 ‘사나운 들개’라는 별명에서 ‘케르베로스’라는 ‘지옥의 수문장’을 뜻하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기까지 그는 베오날드의 곁에서 싸웠고, 그가 패배할 때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싸웠다.
‘여기 뒤로는 지옥 입구다! 넘어갈 테면 넘어가 봐라! 공작님, 나중에 따라가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내 신하들 중 가장 죽음에 가까운 사나이였지. 하지만 웃기게도… 나보다 늦게 죽었을 테지만 말이야. 훗…….’
베오날드가 실수했을 때를 지켜 준 ‘지옥의 수문장’이자 든든한 부하였고,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케르웰 폰 발데리안에게 작위와 영지는 물론 마도구를 비롯해서 많은 지원을 했다.
그 또한 귀족으로서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믿고 꾸준히 밀어준 베오날드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이군. 너무 쉽게 풀어져서 좀 황당하긴 하지만… 저들에겐 내가 유능하다고 생각이 되겠지.’
[질문 16-우리 발데리안 가문의 주인은 누구인가?]
‘…녀석, 마지막까지… 훗.’
또다시 뻔한 질문이 나왔지만, 지금은 처음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리운 감정과 함께 이 질문들을 남겼을 ‘케르웰 폰 발데리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마치 그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충성을 자랑하는 걸 보면 과연 케르웰 폰 발데리안답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썩 나쁘지 않은 기분 속에서 베오날드는 마지막 질문의 답을 외쳤다.
“제국의 섭정, 베노피스의 주인, 마스터 연금술사… 그리고 케르웰 폰 발데리안의 주군이자 가족…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다!”
[모든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상자가 개방됩니다.]
번쩌억!
술식들이 해제가 되고, 거대한 사각형의 상자에서 빛이 번뜩였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케드론과 오스왈드는 다른 단어는 못 알아들어도 베오날드 부분만 들렸기에 기이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빛 속에서 상자가 개방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