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30화 (130/259)

[130화]

“역시! 역시 노이멀 총리! 아주아주 만족스러워! 이… 이 아이로 하지! 히히히! 그! 그 서명만 하면 지금 당장 가능하지?”

잠시 동안 이리저리 만지고 핥아보며 살핀 뒤, 바니로 백작은 한 소녀를 골라서 손을 잡고 노이멀 총리에게 다가갔고, 하복부를 부풀린 채로 격하게 흥분하며 노이멀 총리의 승인을 기다린다.

“백작님의 부인이지만 그래도 역시 혼약은 치르시고 첫날밤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처음 단 한 번밖에 없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역시! 노이멀 총리가 남자 마음을 잘 알아! 흐히흐히히히힛!”

격하게 좋아하는 바니로 백작의 태도는 역겨움 그 자체였지만, 노이멀 총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미소 지으면서 응대했다.

이런 일이 무척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자신을 호위하는 엘프 기사에게서 한 장의 서류와 깃털 펜을 받아서 백작에게 내밀었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아이도 고르셨으니 곧바로 계약서에 서명과 인장을… 부탁드립니다.”

“그… 그! 결혼식 준비도 도와줄 텐가?”

“예, 물론입니다. 중요한 일이니 당연히 제가 신경 써 드리겠습니다.”

노이멀 총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작은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가문의 인장을 찍어서 절차를 끝냈다.

그리고 그는 흥겨움에 뒤뚱거리며 즉시 하인과 시종들에게 결혼식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노이멀 총리는 뽑히지 않은 다른 엘프 소녀들을 기사에게 인계시키고, 불행하게도 바니로 백작의 부인으로 선택된 엘프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당부하듯 말했다.

“오기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건… 우리 동족을 위한 일입니다. 저 인간은 현재 40세가 넘은 상황이고, 건강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날뛰어 봐야 30년을 채 가지 못할 겁니다. 미리 가혹하게 대하지 말라고까지 해 놨지만… 혹시 모르니 그 점만 각오해 두세요.”

“예, 총리님. 거, 걱정 마세요. 반드시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나도 반드시 당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어요. 숲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견디길…….”

노이멀 총리는 신부로 선택된 엘프 소녀를 다른 하녀들에게 보내어 본격적인 결혼식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소녀를 위로할 때와는 다른 가면을 바꿔 쓰는 것처럼 표정을 바꾼 채,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에게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후훗, 정말 운이 좋았어. 본래 혼약하기로 했던 황녀가 실종되어 줄 줄은~ 이게 여신이 도우시는 걸까? 후후훗.”

“그런 것 같습니다.”

짓궂은 소녀처럼 웃으며 그녀는 자신에게 아주 잘 풀린 이 상황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노이멀 총독. 철혈요정이라 불리는 그녀는 바니로 백작과의 혼약이 성사되어서 매우 기뻤다.

그녀의 목표는 바로 혼약을 이용해서 바니로 백작가의 영토 중 일부와 드넓은 곡창 지대 일부를 얻어 내는 것은 물론, 바니로 백작을 꼭두각시처럼 부려서 칼레움 제국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거였다.

“게다가~ 칼레움 제국 황실은 지금 여력이 없다면서?”

“예. 할데온 지역에 고대 유적이 발굴된 것 때문에… 신경전 중이라고 합니다.”

“유적이라……. 뻔뻔한 인간들 같으니~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고대~ 풉! 어이없어서~”

“총리님?”

“아~ 거기에 대해선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지금 인간들 수준으론 거기 있는 유물들, 건져도 제대로 쓰지 못해. 그러니 멍청이들이 고생하게 내버려 둬. 그러면 어디 멍청한 인간들이랑 땅따먹기 싸움하러 가 볼까?”

마치 그 유적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한 노이멀 총리는 손을 휘저으며 부하 기사의 말을 종식시키곤 이제 본격적으로 바니로 백작의 가신과 휘하 귀족, 기사들과 머리싸움을 하러 가기 위해 움직였다.

***

약 10일 뒤, 발데리안 영지.

베오날드 일행은 수도에서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내고, 발데리안 가문에 있는 유물의 해석과 봉인을 풀기 위해 발데리안 영지로 향했다.

본래라면 발데리안 영지에 있는 유적까지 갈 계획이었지만, 교단에 의해 금역으로 정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가서 유물의 해석과 봉인만 풀어야 하는 베오날드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하아~”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나눠서 하게 되면 찝찝하기 마련이라.”

“발데리안 성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마부의 외침과 함께 베오날드 일행은 드디어 발데리안 성에 도착했고, 베오날드는 창문으로 슬쩍 바라보는데… 놀랍게도 주변 풍경은 500년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성벽엔 덩굴 식물과 이끼가 끼고, 색도 많이 바래 있었지만 그래도 그리운 건축물이자 자신이 만든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이렇게 보니 정말 감격스럽군.”

“감격까지… 나올 일인가요?”

“아, 아! 제국 수도보다 훨씬 아름답고 웅장해 보여서 말이지. 하하하! 음~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대단하군. 아마 수백 년이 지났을 텐데도 여전하고 말이지! 하하하핫!”

다급히 둘러대다 보니 되지도 않는 자화자찬을 해서 살짝 부끄러워졌지만, 아무튼 세인을 잘 속여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베오날드와 마찬가지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베시아로, 그녀도 반대편 창문으로 발데리안 성을 보면서 똑같이 눈을 빛내며 감격하는 중이었다.

“와… 저 군데군데 낡은 모습을 보면 분명 오래되었을 텐데도 견고해 보이는 게… 대체 누가 만든 걸까요? 세상에…….”

“호오? 알아보는 건가?”

“아주 조금이지만요. 정말 굉장하네요.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배우고 싶기도 하고… 하아~ 저런 걸 만들고 싶은데…….”

“으으음! 그렇지. 굉장하지, 굉장해.”

끄덕끄덕.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존재가 바로 귀족. 순수한 칭찬의 연속에 베오날드는 행복에 취할 것 같았다.

발데리안 가문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에게 있어 엄연히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성의 설계부터 시작해서 건축 자재 공수를 모두 자신이 담당했던 것. 고로 자신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부서진 건가 걱정하긴 했지만 보존도 잘 되어 있는데 500년 뒤 사람들의 칭찬, 그것도 재능 있고 현명한 황녀에게 들으니 최고로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저기, 오늘 아침에 뭐 잘못 먹었어요?”

“…좋은 작품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법사. 너도 멋진 술식이나 마법의 성과에 흥분하거나 좋아하지 않나? 나도 좋은 걸 봤으니 기분 좋아하는 거다.”

“그렇게 보자니 뭔가 이상한데 말이죠.”

“크흠! 아무튼 대충 넘어가!”

혹시라도 자신이 500년 전 사람이라는 것을 들킬세라 베오날드는 대답을 일축시키고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역시 500년이 지난 만큼 성내 사람들과 상점 같은 건물들의 모습은 꽤 달라졌지만, 석재가 깔린 도로나 발데리안 가문 저택, 경비 초소 같은 주요 건물들은 그대로라서 과거를 회상하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이것이… 외지 생활을 오래 한 늙은이들의 돌아왔을 때 품는 생각인가? 후우우우…….’

눈을 희미하게 떠서 풍경을 일그러뜨리면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라 향수에 빠지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금방 성내를 가로질러서 발데리안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한 다부진 체격의 중년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발데리안 가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 님. 저는 현재 가주님을 대신해서 가문을 지키고 있는 오스왈드 발데리안이라고 합니다. 현 가주님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같은 반푼이를 가주 대리님께서 직접 맞으러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가문의 중요한 일인 만큼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왔습니다. 아, 케드론 도련님도 오셨군요. 어, 이거 순서가 잘못된 것 같은데? 허허허.”

‘…이렇든 저렇든 속은 결국 케르웰의 후손들인가?’

뭔가 귀족이지만 귀족 같지 않은 어설픈 면이 존재하는 게, 500년이 지나면 피가 옅어져야 할 텐데도 이러는 걸 보면 ‘혈통’이라는 게 참 기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베오날드였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며 저택에 들어간 그들은 곧바로 봉인된 유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귀빈실에서 대기를 하고 베오날드, 케드론, 오스왈드 세 사람만 별도의 통로를 통해 저택을 돌고 돌아서 비밀 통로에까지 들어가더니 지하로 내려갔다.

“하하하… 가는 길이 번거로워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일단 가문의 비보라서 아주 엄중한 곳에 보관되어 있거든요.”

“아닙니다. 그건 귀족으로서, 명문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실은 예전엔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방어를 하지 않았는데… 이 발데리안 성이 한 번 점령당한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때 가문의 중요한 보물들과 과거의 유산들을 도둑맞는 바람에… 되찾고 나선 봉인된 유물 하나만 남았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발데리안 가문은 내 측근으로서 상당히 많이 챙겨 주고 키워 줬는데… 그 시대를 넘어오고 멀쩡했다면 일개 귀족 파벌로 전락할 리가 없지. 그 다이나랑 볼레아 놈들이 왕국을 세웠는데…….’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몰락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못해도 발데리안 대군주, 혹은 발데리안 왕국 정도는 건설해야 정상일 텐데……. 물론 지금도 제국의 대귀족 중 하나이니 역시 명가(名家)는 어지간히 X신 짓을 하지 않는 이상 가세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아무튼 망할 다이나 놈들! 언젠가 반드시 이 원한을 갚아 주마!”

“잠깐… 그러면 그 마법 변태들이 털어 간 겁니까?”

“오오오! 잘 아시는군요! 예! 그 마법 성애자 놈들이! 감히! 우리 영지에서 통일 제국의 유산을! 크으으으으으으!”

‘…과연, 어떤 방식으로 대륙의 국가들이 나뉜 건지 알겠군. 그 마법 변태 놈들이…….’

칼레움 제국 북서쪽에 위치한 다이나 왕국. 과거엔 귀족으로서 스스로를 마법 명문이라 자부하면서 마탑에 수많은 인재들을 두고 거대한 파벌을 형성했던 다이나 가문이다.

물론 마탑을 장악하고 연금술을 다루던 베오날드의 앞에선 깨갱하며 짓밟혔던 가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문의 비보도 빼앗기고 베오날드에게 굴종을 맹세했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바로 반역을 한 것이었다.

‘…뭐, 원한을 샀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한데……. 그 마법 변태 놈들은 안 그랬으면 사고 칠 놈들이었단 말이지. 아무튼 나중에 손 좀 봐야겠군.’

“여기입니다.”

“오오…….”

깊은 지하의 길을 통과해서 도달한 곳은 석실 입구로, 벽면의 돌을 걷어 내자 베오날드의 눈에 익숙한 버튼들이 보였다.

그리고 오스왈드는 조심스럽게 순서대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매우 당연하게도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설계해 준 성과 저택이었기에 기본 시설도 유적과 같은 체계를 쓰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지.’

“자, 됐습니다. 보시죠.”

쿠구구구구구궁!

버튼 입력이 끝나자마자 석실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곧 사람보다 훨씬 거대한 강철로 된 직사각형의 상자가 베오날드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상자 표면엔 은은한 푸른빛으로 된 각종 마법 술식과 여러 문자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는데, 문을 여는 이음쇠나 열쇠 구멍, 자물쇠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베오날드는 일단 말없이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 보기 위해 상자에 천천히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