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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29화 (129/259)

[129화]

“그러면 기왕 이렇게 된 거, 발데리안 가문 아래의 자리라도 하나 받아 볼까요?”

“호오? 그 말은… 정식으로 가신이 되겠다는 건가?”

“예. 그런 식이 되겠지요.”

베오날드의 당당한 답변에 발데리안 가주의 눈이 빛났다.

이 난세, 인재는 매우 귀중하고, 한 가지의 재능이라도 가진 자라면 어떻게든 기용해서 자신의 가문과 영지를 번영시키고자 하는 것은 상식이 있는 귀족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욕망이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 허허허, 마음이 아주 든든해져. 그래, 어떤 자리를 원하나?”

“그저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 자리면 충분합니다. 영지도 있으면 더욱더 좋지요.”

“하하핫!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하군.”

“그렇다고 지금 당장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명분과 상황이 주어지고 난 뒤에 주셔도 됩니다. 어디의 어느 곳을 주실지는 가주님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으음… 알았네.”

발데리안 가주는 베오날드의 말을 들으면서도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입장은 자신이 위인데, 왠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자가 보기 드문 인재인 것도 사실이고, 그 꼴 보기 싫은 크멜 가문에 한 방 먹여서 호감도도 높은 데다 자신의 가문의 유물까지 찾아주고, 유적의 위치까지 다 알려 주었기에 자신이 치하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긍정만 하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럼 저는… 준비를 위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게. 크흠!”

쿵!

그렇게 베오날드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한 뒤 떠났고, 발데리안 가주와 케드론은 서로의 눈빛을 보고 둘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하다고 믿으며 입을 열었다.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군. 분명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했는데, 이상하게 싫지가 않단 말이야. 너도 그렇지 않느냐?”

“예,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죠. 근데 아버님, 하나 의문이 생긴 게 지금의 우리 가문의 문양을 통해서 이 문양을 떠올리기가… 쉽습니까?”

케드론은 자신이 달고 있는 3자루의 검으로 된 배지를 빼내 탁자에 놓인 검을 문 케르베로스 문양과 대조해 보았다.

현재 케드론 가문의 문양은 세로로 세워진 검 3자루인데, 이 배지의 케르베로스들은 옆으로 검을 물고 있었다.

보통은 이 배지와 발데리안 가문의 문양이 유사하다곤 생각 못할 텐데… 그는 짐작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반쯤 확신하듯 내밀었던 것이다.

“뭐, 고고학이나 역사학에 밝은 친구 같으니… 추측이 들어맞은 거겠지.”

“그렇군요.”

“아무튼 나도 놈에게 줄 영지와 자리에 대해 고려해 봐야겠다.”

발데리안 가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영지의 지도를 도로 가지고 나갔고, 홀로 남은 케드론만 자신의 배지를 바라보며 아직도 뭔가 의혹이 가시지 않는 건지 계속 고민할 뿐이었다.

***

발데리안 가문의 저택에서 돌아온 베오날드는 우선은 골동품의 감정부터 신속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가 감정을 하면 베시아가 척척 분해하고, 술식이 있는 부분을 남겨서 쓸 수 있는 부품으로 만들어 주면서 수월하게 일하는 상황. 베오날드는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음… 일이 많이 꼬여 버렸군.’

하필이면 교단이 자신의 일을 방해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베오날드가 생각을 배제해서 그렇지, ‘성국(聖國)’이라는 국가 형태까지 띠고 있는 것을 보면 대륙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걸 재고해야만 했다.

거기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사교도의 존재까지, 머리 아픈 문제가 겹쳐 있었다.

‘으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신이 나에게 뭐라고 했더라. 확실히 ‘용사’를 도우라고 했었지?’

자신의 앞가림 때문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고, 어린 시절 세례받을 때 말고는 신전의 근처도 가지 않았기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자신이 이 지상에 온 이유는 거대한 위협에 대비하고 저항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그는 미리 사교도를 잡아야 하나 솔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용사님이 있다는 건 곧 마왕도 있다는 이야기일 텐데. 문제는 지금이 난세라는 거지. 그래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거고… 근데 권력을 잡아야 내 유적에 들어가니 이게 겹쳐 버리는군.’

베오날드의 머릿속엔 실타래가 엄청 꼬여 있었다.

이걸 풀려고 열심히 주판을 굴리지만 아직 메워지지 않은 숫자와 수식이 많아서 쉽게 푸는 게 어려웠다.

결국 자신은 여전히 아무 힘이 없는 한 개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서든 전쟁이나 뭔가 상황이 벌어져야 활약을 하는데, 지금 세상은 은근히 평화롭다는 것도 문제였다.

‘각 나라들이 나뉘어져 있지만 미묘하게 균형이 맞아떨어져서 평화 상태야. 아니면 더 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암약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조용해. 뭐, 하지만… 결국은 때가 오겠지.’

여신이 자신에게 예고했고, 자신은 그것을 위해 내려온 이상… 이 세상에 위기란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

그러니 그때까지 사람을 모으고, 자신의 유산을 찾고, 지위를 올려서 언젠가 나타날 ‘용사’를 보조할 대비를 하는 게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

칼레움 제국 남쪽, 바니로 백작령.

바니로 백작. 40대의 나이로 집안의 독자라서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은 그는 추한 외모와 과한 여성 취향 때문에 그동안 장가도 가지 못한 채 노총각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대귀족이기에 휘하에 있는 귀족 가문을 협박한다면 쉽게 혼약을 맺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도 있고, 또 여성을 보는 눈이 아주 높았다.

“폐하께선 아직도 황녀님을 못 찾았단 말이냐? 날 우습게 아는 것도 유분수지! 내 신부가! 내 신부가아아!”

“폐하께서도… 지, 지금 노력하고 계시니…….”

“내가 황제 폐하께 얼마나… 얼마나 충성을 바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두꺼비같이 비대한 몸으로 날뛰며 바니로 백작은 황제의 전령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감히 황제의 전령에게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바니로 백작으로서는 화낼 명분이 충분한 상황으로, 황녀와의 혼약을 위해 기껏 영지의 재정을 쥐어 짜내 세금까지 든든히 납부하고, 군사가 필요하면 군사, 기사가 필요하면 기사까지 보내 주면서 X꼬를 핥아 왔는데… 자신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백작님,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황손녀 분도 있습니다. 굳이 젤시 황녀 전하에게만 목매지 않아도…….”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나는 젤시 황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보자마자 운명이라 느꼈단 말이다아아아!”

‘…크으으윽!’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발광하는 바니로 백작의 모습은 아주 추했지만, 전령은 표정 관리를 하며 끓는 속을 눌러야만 했다.

저렇게 모자라도 이 제국 남부 최대 곡창 지대의 주인이자, 말 한마디로 10만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정통성 있는 대귀족이다.

현 바니로 백작은 무능할지언정 선대가 가꾸어 놓은 신하들이 유능한 덕에 바니로 백작가는 대귀족으로서의 통치력과 힘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이 정도 시간을 기다려 줬다면 황제 폐하에 대한 예의는 다한 셈이지!”

“배, 백작님! 조, 조금만 더 시간을…….”

“됐소! 더 이상 폐하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내 다른 수를 쓸 테니 썩 나가라!”

“백작님! 백작니이임!”

황제의 전령은 결국 백작가의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그리고 질질 끌려가는 그와 엇갈려서 누군가가 바니로 백작을 알현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오! 드디어 왔구려! 지금 사람을 보내려고 했는데!”

또각… 또각…….

부츠의 굽 소리가 울리면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에 윤이 나는 긴 청흑빛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 검녹색 제복에 코트를 망토처럼 걸친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서 백작을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기품 있고 고혹적인 미모였지만 눈빛 안에는 마치 칼날을 지닌 것처럼 예리함이 느껴지는 그녀는 특이하게도 길쭉하지만 끝이 살짝 뭉툭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백작님과의 관계는 중요하기에 눈치껏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백작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상당히 급해 보이셨는지라.”

“하하핫! 하프엘프답게 인간에 대한 이해심이 많아서 다행이오. 아무튼 환영하오. 가르칸 공화국의 기둥 중 하나인 철혈요정 노이멀 총리. 그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제국 남부에 있는 바니로 백작가의 영지 동쪽에 존재하는 가르칸 공화국. 흔히 아인족이라고 불리는 수인, 엘프, 오크, 리자드맨 등등… 이종족들이 세운 나라로서 종족 대표들이 의회를 만들어서 지배하는 의회제를 갖추고 있고, 그 의원들과 총리는 투표로 뽑히기에 일단 공화국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총리가 바로 지금 이 하프엘프인 노이멀 총리였다.

“워낙 중대한 사항이라 직접 왔습니다. 혹시… 폐가 되었는지요?”

순식간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우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백작을 바라보며 곤란한 몸짓을 하는 노이멀 총리. 육감적인 몸매가 흔들리면서 뛰어난 미색과 어우러져서 목석같은 남자도 녹아내릴 애교가 나오자 바니로 백작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니! 아니아니! 노이멀 총리라면 내가 직접 나가서 반겨 주려고 했지!”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튼… 부인을 찾으신다고 하셨지요? 그것도 엘프로 말이죠.”

“그렇지! 그렇지. 후욱후욱… 그리고… 그리고 기왕이면…….”

“예, 작고 귀여운 소녀 타입으로 백작님이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영원히 소녀일 엘프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것도 깨끗한 은발로요. 하지만 이목구비의 차이는 조금씩 있기 때문에 직접 보고 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후욱후욱! 역시 노이멀 총리야!”

“따라오시지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가신들이나 기사들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철혈요정’이라는 기묘한 호칭을 가진 노이멀 총리는 현재 가르칸 공화국의 총리로서 하프엘프지만 엘프들의 대표이자 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는데, 종족의 안전과 가르칸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자, 어떻습니까? 우선 10명 정도 데려왔습니다.”

“오호호호호홋! 모두 다 완전 내 타입이군! 다, 다… 데려가면 안 될까?”

“후훗, 욕심도 많으신 분~ 대가만 지불한다면 데려가셔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몸 생각을 하십시오.”

“흐흐… 후후흐~ 그, 그래야겠지? 그, 그럼 아주 신중히 골라야겠지? 후흐흐!”

그녀가 바니로 백작을 데리고 간 곳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곱게 치장을 한 어린 엘프 소녀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니로 백작의 변태 같은 취미에 맞춘 가녀린 소녀들로, 그는 만족했는지 헤벌쭉한 얼굴로 자신의 취향에 완벽히 맞는 소녀를 고르기 위해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피면서 이곳저곳에 손대는 중이었다.

“읏… 으으으…….”

“흐흐… 흐흐흐… 아주 좋아. 크으… 역시… 역시 인간보단 엘프인가… 흐흐흐흐… 츄릅! 츄릅!”

징그러운 손길과 추행의 굴욕을 참아 내는 동족 소녀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노이멀 총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보면 동족을 팔아넘기는 행위 같아 보이지만 그녀는 엄연히 가르칸 공화국 엘프들의 대표이자 지도자였다. 즉, 동족들 다수의 지지를 얻은 자로 이 소녀들도 종족을 위한 일이라고 하여 동의를 받고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종족과 가르칸 공화국을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온갖 정책이나 수법을 사용하길 꺼리지 않았기에 그녀에게는 비정함의 대명사인 ‘철혈(鐵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하프엘프도 요정은 요정인지라 결국 ‘철혈요정(鐵血妖精)’이라는 별칭이 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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