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저기… 그…….”
“아… 막 일어났더니 배가 고프군요. 아무튼 앞으론 주의할 테니, 이만 저는 식사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
베오날드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서 연구실을 떠나 버렸다.
혼자 남은 베시아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보며, 뭐라 말을 하고 싶은 기분과 그렇지 않은 기분이 뒤섞여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말하는 것을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어젯밤 호화롭게 식사한 것과 다르게 베오날드는 아주 간단하게 빵과 육포 조각, 수프를 한입에 털어 넣고 짐을 챙긴 다음 곧장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우선은…….’
이제 도움도 안 되는 아카데미의 자퇴 절차부터 밟는다.
귀족 학부라면 모를까, 평민은 그냥 행정관에 가서 자퇴 의사를 적은 서류와 몇 가지 동의서만 제출하면 끝. 더 볼 거 없이 나온 베오날드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발데리안 가문의 저택이었다.
“아, 베오날드 님이십니까?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케드론 도련님과 가주님은 안에 계신가? 이미 오후라 오셨을 거라 보는데…….”
“예, 두 분 다 안에 계십니다. 들어오십시오.”
발데리안 가문과 이제 완전히 안면을 튼 덕분에 경비를 통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저택 내의 발데리안 가문 사람들도 베오날드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는 등 완전히 이쪽 가문 사람이 다 된 그였다.
체육제에서 얻은 명성과 호감 덕분에 그는 손님으로서 존중받아 사용인에게 안내를 받고, 가주와 케드론을 호출한 다음 손님방에 도달했다.
“그래서, 한동안 오지 않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지?”
“아직 가주님이 오지 않으셨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곧바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케드론에게 보여 주었다.
꺼낸 것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금배지로,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있는 것이 그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케드론은 그것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는데, 금배지가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그 형태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배지는 검을 물고 있는 개의 머리가 3개 달린 모습이었다.
검을 문 케르베로스의 문양. 지금은 검 3자루를 문양으로 쓰는 발데리안 가문의 옛 문양이었다.
“…이게 뭔가?”
“으음, 모르십니까? 그럼… 가주님에게 보여 드려야겠군요.”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도 아직 추정 단계라서 가주님에게 보여 드리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알았네.”
잠시 뒤, 시종이 문을 열자 발데리안 백작이 커다란 풍채를 자랑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 둔 배지를 본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달라붙듯이 탁자 쪽으로 다가가서 그것을 확인했다.
“이, 이건? 이건 설마?”
“가주님의 반응을 보니… 제 생각이 대강 맞는 것 같군요. 이건 역시…….”
“그래, 옛 발데리안 가문의 문장! 이걸 어디서 구했나?”
발데리안 가주는 흥분한 눈빛으로 베오날드를 노려보며 곧바로 추궁했다.
그의 반응은 베오날드로선 당연히 예상된 것으로 영광스러운 옛 시절 가문의 문장을 봤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는 미리 짜 놨던 대로 천연덕스럽게 진실을 섞은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할데온에 있는 유적에서 구했습니다.”
“할데온 유적이라고? 거기는 설마……?”
“예. 최근에 황제 폐하와 크멜 가문이 두고 다툰 영역입니다. 저도 운 좋게 발굴해 볼 기회를 얻어서 갔었지요. 그리고 이런 수확을 얻었습니다. 아마 이건… 옛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이 확실하겠지요.”
“그래, 검을 문 케르베로스의 문양. 위대한 분을 수호한다는 결의를 담아서 정했다고 전해지는 문양이지.”
‘…위대하다니~ 하하하.’
“아무튼 할데온 유적에서 이것이 나왔다는 건 그분… 혹은 우리 가문의 오랜 유적일 가능성이 높군. 이거 가만히 있을 수 없겠군.”
발데리안 가주의 눈빛은 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의 유산을 되찾고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고, 명분이 생겼으니 할데온 지방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차하면 전쟁도 불사할 것 같은 그 눈빛에 베오날드는 일단 그를 말렸다.
“하나 굳이 지금 할데온으로 가는 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우리 가문의 유산이 발견되었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나?”
‘엄연히 내 유산이야! 그거! 당연히 너희 가문에서 실험한 게 실패했으니 문장이 따라온 거고!’
진실을 속으로 품고 베오날드는 할데온 유적을 노릴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 침착하게 설명해 나갔다.
“우선 지금 그곳은 황실, 크멜 가문, 거기에… 교단까지 얽혀서 혼란스러운 상황일 겁니다. 그 유적을 성지(聖地)로 만들려는 교단, 그리고 유적의 보물을 노리는 황실과 크멜 가문이 암투를 벌이고 있을 테니 말이죠. 괜히 거기에 끼어 봐야 인력과 시간 낭비만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한들 그걸 두고 보란 말인가?”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십시오, 가주님. 그리고 그 유적에만 목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거길 가지 않아도 발데리안 가문의 영역에도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바로 이게 있기 때문이죠.”
촤락~
베오날드는 품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 발데리안 가주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탈피의 무덤’에 있던 500년 전 지도의 찢어진 일부였다.
굳이 모든 패를 깔 필요 없이 필요한 만큼만 패를 까면 되기에 베오날드는 일부러 유적에서 지도를 찢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건 그 할데온 유적에서 가져온 지도입니다. 찢어진 탓에 전체 부분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한 곳, 유적의 위치가 나와 있지요. 자세한 건 확인해 봐야겠지만… 이 지형과 산의 위치를 보아선 대략 발데리안 가문의 영향력 내에 있는 땅일지도 모릅니다.”
“잠깐! 기다려 보게! 이봐! 얼른 내 집무실로 가서 우리 영지의 지도를 가져와라! 빨리!”
‘…음, 틀리면 곤란하겠지만 거의 그렇진 않겠지? 틀리더라도 전생의 내가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어 놨을 테니…….’
지도를 보고 눈을 빛내는 발데리안 가주의 지시에 집사는 후다닥 뛰어가서 지도를 가져왔다.
그리고 곧바로 대조해 보면서 위치를 가늠하는데, 천만다행으로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 근처에 있었다.
그것을 보며 베오날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500년간 세력권이 많이 바뀌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크게 안 달라져서 다행이네.’
“으으음… 하필 여기라니……. 여기인 게 확실하나?”
“예? 아… 지도를 대 보면 대충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한데 지도를 대조해 본 발데리안 가주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 표정에서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베오날드는 설마 그 땅에 무언가 문제가 있나 싶어 마른침을 삼키며 발데리안 가주를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는 그게… 교단에 의해서 금지된 영역으로 지정된 곳이라네. 그리고 오랫동안 교단에서 관리하던 곳이지. 그래서 들어가려면 꽤 힘들 걸세.”
“…예?”
“후우~ 하필이면 여기라니, 정말 곤란하군.”
‘…젠장할!’
한숨을 쉬는 발데리안 가주. 난데없는 장애물에 베오날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교단이라니. 베오날드가 가장 싫어하는 족속들이 자신의 유산이 있는 곳을 ‘금지된 영역’으로 지정해서 막고 있다니! 자신은 엄연히 여신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인데 이런 사태가 되니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방법이 없겠습니까? 뇌물이라든가?”
“아서게. 뇌물로 통할 자를 이런 중요한 곳에 놔두었겠나? 성기사들 중 가장 강하며 신앙심이 깊고, 사명감이 투철한 자들로 조직해서 지키고 있는 곳일세. 들어가려면 아마… 황제 폐하의 명이 아니면 꿈쩍도 안 하겠지. 나로선 어림도 없는 일일세.”
‘이런… 제기랄! 어떻게 이런 일이!’
베오날드는 두통이 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며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할데온 유적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았는데, 여기서 방해를 받으니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유산을 되찾아야 했기에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해결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즉, 황제 폐하를 움직일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아니면 교단에 압박을 넣을 힘이라든가 말이죠.”
“그렇… 겠지.”
“머리가 아프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이 문제는 차후로 미루죠. 그러면 이야기를 돌려서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에 있는 그… 유물에 대한 해석을 하고자 합니다.”
당장 할 수 없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 일로 넘어가는 베오날드였다.
황제와 협상하는 방법도 있지만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한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높기에 그냥 배제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곧바로 유물 해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음? 아직 약속한 방학 때가 안 되었을 텐데?”
“때려치웠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고, 정보도 얻었으니 말이죠. 게다가 지식과 권력은… 다른 곳에서 얻어도 됩니다.”
“호오… 그거 좋은 소식이군. 그래서, 언제 갈 생각인가?”
“일주일 뒤로 하지요.”
“좋네. 그럼 우리도 그에 맞춰 준비를 해 주겠네.”
발데리안 가주로서는 가문에 있는 유물의 해독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기에 방학 전에 간다는 베오날드의 말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로 갈 일정을 잡은 베오날드는 용무를 마쳤으니 떠나려고 하는데, 발데리안 가주가 그를 불렀다.
“잠깐 기다리게.”
“예? 왜 그러십니까?”
“이것에 대한 답례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발데리안 가주는 베오날드가 가져온 배지를 들어 보이면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이 배지는 마도구도 아니고 그저 금으로 형상만 만들어 둔 것이라서 딱히 그에 대한 답례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는데, 발데리안 가주가 언급하자 베오날드는 일단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답례라니요.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저도 겨우겨우 빠져나왔고, 지도도… 쓸모없고…….”
“아닐세. 가문의 역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지도도 썩 나쁘지 않은 물건이네. 교단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야. 아무튼… 배지의 답례를 하고 싶은데, 필요한 게 있나?”
‘음… 기왕 이렇게 된 거 크게 불러 볼까?’
어떻게 해서든 뭔가를 주고자 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너무 거절하는 것도 민폐고, 분명 저쪽 발데리안 가주님은 자신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싶어 하는 의도가 보였다.
고로 여기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해도 오히려 반길 것이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어떤 요구를 할까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