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네? 너무 아깝지 않으십니까?”
“아깝냐고? 아니, 그저 쓰던 도구가 효용을 다해서 버릴 뿐이다. 더 좋은 기회가 눈에 보이니 그것부터 좇아야지. 아무튼 일주일 뒤부턴 수도를 떠날 준비를 한다. 가능한 한 빠르게 발데리안 가문과 협상을 하지.”
“왜… 굳이 일주일 뒤입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준비를 해서 떠나면 되지 않습니까?”
“쉴 땐 확실히 쉬어야 하는 법. 발데리안 가문과 만나고 또 그곳으로 가게 되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 그리고 쉬면서 나도 잠시 해야 할 작업이 있다.”
쉬면서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다들 그냥 베오날드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면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베오날드였기에 뒷정리까지 자신이 한다며 모두를 쉬라고 보내 놓고 마무리와 설거지까지 싹 끝냈다.
돌아오자마자 요리까지 하느라 몸이 좀 노곤했지만, 그래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몸의 피로보다는 마음의 피로를 푸는 게 최선이지.’
몸의 피로는 약으로든 오러로든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마음의 피로는 고치기가 너무나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감탄하는 시선, 우러러보는 시선이 너무나 좋은 베오날드는 그것 덕분에 간만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악취미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귀족 기준에서 보면 베오날드는 아주 건전하고 자기 능력에 맞는 취미를 갖고 있는 셈이었다.
‘귀족들 중에… 제대로 된 취미를 가진 새끼들이 손에 꼽힐 정도이니 말이야.’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부리며, 부족함 하나 없이 자라지만 권력 싸움이나 영지 문제로 인해서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를 극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미친 취미를 가진 자들도 많았다.
‘노예를 사서 고문하다 버린다든가, 멀쩡한 대낮에 평민의 집에 가서 일가족을 쳐 죽이고 나온다거나, 사냥을 하고 싶은데 사냥철이 아니니까 사람을 풀어서 사냥한다거나. 벨릭스 그 자식은 우릴 갖고 노는 게 취미였고… 하아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화려한 통일 제국 시대의 이면. 번영한 세상에서 즐긴 귀족들의 퇴폐적이고 잔혹한 문화들도 모조리 직면했던 베오날드였다.
가주가 되기 전엔 벨릭스라는 정신병자 부친 아래에서 고생, 가주가 되고 나니 이제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 내던져졌는데, 그 상대 귀족들이 가진 미친 취미를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도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발데리안 가문은… 500년 동안 많이 안 변해서 다행이지. 잘나가던 가문도 결국 후계자 하나 잘못 세우면 금방 변해 버리니 말이야.”
가풍이나 기질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발데리안 가문 정도면 오랫동안 가문을 잘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수면을 취하러 연구실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무리 단련된 그라곤 해도 오늘 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저녁 요리까지 했기에 꽤나 피로가 느껴지는 상황. 아마 내일은 늦게 일어날 것 같았다.
‘간만에 푹 자야지. 음?’
“…수, 수고하셨습니다, 베오날드 님.”
“어, 그래. 하이디인가? 가서 푹 쉬지, 이곳엔… 아!”
연구실 쪽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목에 하이디가 있었다.
늘 입던 갑주가 아니라 편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주를 벗으니 키와 체구가 큰 점을 제외하곤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그녀는 베오날드의 시선을 받자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했는데, 베오날드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햑!”
“보자, 내일 쉰다고 했는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아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하이디. 이런 면에 있어선 눈치가 너무나 빠른 베오날드였기에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하이디와 함께 연구실 쪽으로 내려갔다.
사랑을 받는 것도, 베푸는 것도 정원을 관리하는 자의 일. 베오날드는 조금 늦게 자겠구나 생각하면서 내려가는데 입구 쪽에 이번엔 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어…….”
“너도냐…….”
서로를 보면서 짧은 한마디와 눈빛을 주고받는 그들.
세인 또한 베오날드를 섬기는 것 이상으로 연모하는 만큼, 오랜만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안 이 타이밍에 사랑받고자 대기한 것이지만 하이디 쪽이 더 빨랐다.
“선수를… 놓쳤네요.”
“그… 미안합니다. 내일로…….”
베오날드와 잡은 손을 본 세인은 아쉽다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하이디도 미안한지 고개를 숙이며 서로 예를 갖추었지만, 베오날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음… 합의만 된다면 난 셋도 상관없다만?”
“…네?”
“…예?”
두 사람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았고, 그는 ‘당연한 일이다.’라고 아주 떳떳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셋이서?’
‘셋이서 같이라니?’
보통 남녀 간의 사랑은 일대일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그 이상을 금단의 영역으로 여기던 세인과 하이디에게 베오날드는 당당히 말했다.
“늘 말했지만 난 내 정원에 들어온 이들을 모두 사랑한다. 그리고 그 마음에 언제나 보답을 해 줄 생각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말이지. 물론 둘 모두 꺼림칙하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질투가 생기는 것을 난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합의하에 셋도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 제삼의 선택지도 있다는 걸 알아야 후회를 안 할 테니 말이지.”
“그… 그러니까… 저기…….”
“그… 이걸 어쩌죠?”
“아무튼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이야기가 끝나면 오도록 해라. 아, 합의하에 사이좋게~ 라는 걸 잊지 말도록. 난 분란을 일으키는 잡초를 아주… 아주 싫어하니 말이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먼저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다음 연금술 도구와 시약들을 몇 개 꺼내서 급히 조합하기 시작했다.
겉으론 담담하게 말하고 내려왔지만 사실 여행에서 막 돌아오고, 오늘 하루 상당히 피곤했던지라 체력적으로 조금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응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후우~ 마나 호흡법은 할 시간이 없으니…….’
그래서 급하게 피로와 기력을 회복시켜 줄 약을 만들어서 복용,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가능한 한 사람만 오길 바라는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통로를 통해서 들려오는 발소리. 그것이 2인분이라는 걸 깨달은 베오날드는 힘내자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
다음 날.
오랜 여독과 어제저녁 일까지 한 피로, 거기에 한 번에 두 사람과 광란의 밤까지 보내어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던 베오날드는 아주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 버린 듯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지하라서 시간을 바로 알 수 없기에 놔둔 침대 위의 시계를 들어서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이 3시라는 건… 오후인가? 내가 이렇게 자는 경우는 드문데 말이지. 후우우~”
“아, 일어나셨어요? 좀 더 주무시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는 베오날드에게 다가온 것은 황녀의 신분을 숨기고 있는 베시아였다.
그녀는 오늘은 일을 나가지 않는지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품에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목공구들을 잔뜩 든 채였다.
“아~ 황녀 전하셨군요.”
“갑자기 그런 대우로 돌아가지 마세요. 기껏 황녀 시절을 잊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죠.”
황녀 시절보다 지금이 좋은 건지, 그녀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베오날드에게 반박했다.
확실히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의 자유로운 생활은 인간적으로 천국이리라.
“그럼 계속 베시아로 살아가실 겁니까?”
“예! 그럴 생각이에요.”
“그러면 다행이군요. 이 수도에 계셔도 이제 적응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읏챠……!”
“그건 무슨 의미죠?”
“말씀드린 대로의 의미입니다. 황녀 전하에겐 또다시 선택의 길이 나타난 겁니다. 이대로 여기 수도에 머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느냐, 아니면 절 따라와서 제 일을 도와주시느냐인데…….”
이제 할 일은 발데리안 가문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가진 유물을 해독한 뒤, 대륙에 남은 자신의 유산을 찾아 수도를 떠나는 것이었다.
황녀는 일단 임시적으로 동행을 해서 뜻을 이룬 것에 불과하니 이다음 행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게 당연했다.
“당연히 따라가야죠! 고대 유적과 발굴! 세상에 이런 모험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런 기회를 버린다는 건 인생 절반을 손해 보는 짓이라고요.”
베시아, 아니 젤시 황녀는 눈을 반짝이면서 이 이후의 행보도 같이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베오날드 덕분에 자유를 얻은 것도 좋고, 이것저것 배우면서 노력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녀는 좀 더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화나 전설에 나올 법한 ‘고대 유적’의 발굴이라니. 문구로만 들어도 가슴 뛰는데, 그것을 실제로 보고 발굴까지 해 온 베오날드의 행보는 무조건 따라가야 할 일이었다.
“쉬운 길은 아닐 겁니다. 위험한 일을 할 가능성이 높고, 때론 전쟁이나 싸움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기꺼이 갈 거예요. 게다가 지금 상황을 보면 당신 곁이 제일 안전하니까요. 그런데 그… ‘정원’이라는 게 무슨 의미예요?”
“…제 사람이자, 아군이라는 의미입니다. 신하, 연인, 가족… 형태는 뭐든 상관없이 제게 몸을 맡기고 재능을 써 줄 이들을 말하죠. 지금은 일단 하이디와 세인이 그 안에 있죠. 다 같이 있어도 저는 엄격히 거래자와 제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하는 일이지요.”
“아하!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갑자기 그걸 물으시는 이유가?”
“그게…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여기서 공구를 챙겨서 일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그…….”
차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말 못하는 베시아였다.
베오날드 또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이 연구실이 자신의 부재 동안 혼자 쓰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겉모습은 당당히 나간다.
“그것참 죄송하게 되었군요, 황녀 전하.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행적이 없는 곳을 확실히 고려해서 하도록 하지요.”
“그… 그러니까…….”
“아, 혹시 두 사람과 한 일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금 알려 드립니다. 제가 그런 쪽으론 확실히 동의를 얻고서 진행하거든요. 아니면 혹시… 호기심이 있으십니까?”
“아뇨아뇨아뇨아뇨!”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붕붕 저으면서 부정하는 게 꽤나 귀여운 황녀였다.
그냥 가볍게 부정하면 되는 걸 이 정도로 흥분하는 걸 보면 역시 흥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긴 그녀도 엄연히 연애나 사랑에 가슴이 두근거릴 소녀인데, 갑자기 강렬한 3인의 행위(?)를 보게 되었으니 충격을 먹기도 하고, 흥미가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아무튼 그 둘은… 제가 책임지기로 한 몸입니다. 혼약은 미루고 있지만, 아시다시피 첫 부인의 정치적 가치와 위치는 아주 중요해서 말이죠. 그렇게 되고 나면 둘이 허락한다면 부인으로 맞을 생각입니다.”
“아… 그건 다행이네요. 확실히 책임진다는 게. 아예 무시하고 도망치거나 하룻밤의 여흥으로 끝내는 귀족들도 많은데…….”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신께 맹세코 저는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화제마다 항상 떠오르는 망할 아버지인 벨릭스 폰 노이멀. 그를 부정하려는 듯 베오날드는 진심이 담긴 눈빛과 어조로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지난 생에서도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지켜진 맹세. 이번엔 그 단 ‘한 번’의 예외조차 허용하지 않을 거라고 베오날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 어쩌죠? 이거… 이거…….’
두근두근두근.
그리고 그런 그의 눈빛을 본 베시아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 진지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녀로서는 베오날드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였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계략까지 짜 주었으며 수도에 숨겨 주고 자신의 자유와 의사를 처음으로 존중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죠. 이게… 이래야 정상인 거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행동을 했음에도 베오날드는 그녀에게 무언가 요구하거나 바라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베오날드가 뭔가를 요구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를 구해 준 뒤 그냥 자기 일을 하러 쿨하게 가 버린 것이었다.
‘…후우~’
물론 베오날드에겐 심적으로 그녀를 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베시아는 베오날드가 무상의 선의를 베푼 걸로밖에 생각되지 않았고, 거기에 문란한 듯 보이는 행위 속에서도 나름 이 시대 기준으로 제대로 된 연애관까지 가지고 있으니 호감도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