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부르셨으면 용무를 이야기하셔야지 않습니까? 폐하.”
“나는 자네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주고 있네만?”
“어떤 말씀을 듣고 싶으신지요?”
“정말 모르겠나?”
“…후우~”
겨우겨우 입을 열어서 언뜻 보면 평온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 말 하나하나엔 칼날이 심어진 듯 날카로운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황실에 납품되는 최고급 차가 다 식었을 무렵, 크멜 공작은 차를 그대로 원샷한 다음 잔을 내려놓았다.
가주로서의 역량도 갖추었지만 그 근본은 무인인 그로서는 이렇게 지지부진 신경전을 오래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폐하. ‘계약’이란 엄연히 신의를 담보로 서로 주고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아쉬운 점이 있어도 일단 맺었으면 지켜야 하는 게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말은 고왔지만 쉬운 말로 해석하면 ‘개새끼야, 네가 줘 놓곤 왜 수작질을 했냐?’라고 할 수 있었다.
“허허허, 사람의 도리는 그렇지. 하나 난 황제일세. 제국을 지키고 번영시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게 임무지.”
“그렇게 치면 저 또한 크멜 가문의 가주입니다. 가문을 지키고 번영시켜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게 제 임무지요, 폐하.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치셨습니다.”
“이해하네.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이러지 않을 수 있을까? 가령~ 뵐른 후작가의 영지에 통일 제국 시대의 유적이 나온다면?”
“…….”
황제의 반박에 크멜 공작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황제 입장이라면 충분히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황제의 말은 결국 자신들 모두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문제를 그냥 넘기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결국 저희 모두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거군요.”
“그렇네.”
평온한 말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협의나 사죄 같은 행위는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높고 귀하신 분들은 괜히 목에 핏대 세워 가면서 떠드는 것보다 이렇게 깔끔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입장만 확인하면 그 뒤로는 더 말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쉬운 쪽이 말이 길어지게 된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양측 다 아쉬운 입장이 아닐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할 일을 하도록 하지요. 교단에서 말하는 해당 유적의 ‘성지(聖地)’화를 지지하지요.”
“그거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시작부터 서로 협력이나 협상 따위 할 생각이 없었던 만큼 결국 할데온 유적은 교단의 손에 맡겨서 봉인시키기로 결정이 된다.
황제는 황제대로 그 유적에서 뭔가를 건져서 격한 변화를 끌어내고 싶지 않았고, 크멜 공작도 지금은 황제에게 반항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왔기에 물러서게 된 것이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 오랫동안 그렇게 개처럼 굴러 줬고, 우리 가문이 없으면 북방이 뚫리는데 이런 식으로 대우해? 이대로 가만히 물러날 것 같으냐?’
‘차라리 그 유적이 성지로 봉인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역시 계속 발굴을 할 생각인가 보군. 아니라면… 진작 약한 소리를 하면서 물러났을 테니까.’
성지로 봉인되어도 다른 구멍으로 파고들어 갈 방안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두 사람이었다.
내부에 들어갔던 생존자의 말로 인해 유적의 규모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입구를 찾아서 발굴 작업을 계속할 생각인 크멜 공작, 그리고 그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는 황제였다.
‘그러니 계속 황실 기사단을 통해서 작업을 방해해야겠군. 물론 이번처럼 저항할 테지만…….’
‘물론 분명히 이번처럼 방해하겠지.’
태풍은 어느 순간 갑자기 몰아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바람에서 점점 규모를 키워 가다가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이 되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생겨난 작은 균열. 하나 그것은 이제 서로에 대한 앙금이 되고 계속 커져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될 터였다.
의심을 하려고 해도, 둘 다 이미 상대라면 ‘그럴 법하지.’라고 생각을 마친 시점에서 제삼자의 계략에 놀아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로 그들은 상대를 막기 위한 계략을 또다시 세우게 된다.
***
베오날드는 드디어 원하던 자신의 유산도 일부 찾았으니 큰맘 먹고 데런을 통해 이 수도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메이드인 세인이 같이 식사할 수 없는 문제와 황녀인 베시아가 위장을 하고 가도 혹시나 높으신 분들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상회 건물 옥상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데런, 준비해 오라는 건 해 왔나?”
“물론입니다. 오늘 막 잡은 새끼 양과 각종 야채와 향신료, 술 모두 깔끔하게 옥상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비용은…….”
식사할 채비를 하는 동안 베오날드는 데런에게 미리 의뢰를 해서 저녁 식사에 필요한 식재료들을 공수해 놓았다. 역시 즐거운 잔치엔 술과 고기만한 게 없었으니 말이다.
“이걸로 지불하지.”
쿠우웅!
베오날드는 미완성 아공간 배낭에서 무언가 꺼내어 데런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길이 약 1미터가량의 황금으로 된 뱀 모양의 조각상으로 눈과 코, 입 같은 부위는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으로 표현된 물건이었는데, 데런은 그것을 보자마자 눈이 커지더니 황홀경에 빠진 눈빛이 되었다.
상인이 보물을 보고 감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건 데런의 생애를 다 따져 봐도 본 적이 없는 압도적인 물건이었기에 경탄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이이이이, 이거? 이거 어디서 난 겁니까? 게, 게게게게게게다가 이거 안에까지 전부 순금인가요?”
“유적에서 발굴한 거다. 그리고 순금 맞을 거다. 의심이 간다면 녹여 보든 잘라 보든 마음대로 해라. 보석 빼고 팔아도 된다. 이제 네 거니까.”
실패작 골렘의 장식을 대충 뜯어서 가져온 것으로 아무런 마도구적 능력 없이 그저 황금과 보석으로만 된 물건이었다.
상인인 데런에게 가장 적합하면서도 그가 정원 밖의 인물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것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지금 그 찬란한 보물의 자태에 감탄 중이었고, ‘팔아라.’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말에 눈이 팽팽 돌 뿐이었다.
“제 거? 이게 제 거란 말입니까? 맙소사! 여신이시여! 하하하하하! 아니, 대체 저에게 뭘 요구하시려고 이런 걸 주시는 겁니까? 차, 차라리 팔아서 잔금을 치르라고 하는 게……. 너, 너무 막대한 걸 주셔서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요? 뭡니까, 대체?”
“이게 귀족의 배포라는 거다. 아무튼 식사할 거라면 너도 올라와라.”
“예! 알겠습니다! 하, 하나 그 전에 이이이이이, 이걸 안전한 곳에 놔두고 얼른 가겠습니다.”
그렇게 데런은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베오날드가 준 황금 뱀 조각상을 옷가지로 감추고는 잽싸게 돌아갔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요리를 위한 불이 피워져 있고 요리할 수 있는 탁자와 도구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세인이 먼저 조리를 하는 중이었다.
“세인, 자리로 돌아가라. 오늘 요리는 내 일이다.”
“예? 하지만…….”
“정 원하면 베시아와 같이 내 보조를 하도록.”
“아, 예.”
카리스마 있게 세인의 자리를 뺏은 베오날드는 즉시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연금술과 같은 것. 또한 오늘은 데런을 통해서 재료를 완벽하게 준비한 만큼 이들에게 500년 전 베노피스에서 먹던 통일 제국 시대의 요리를 선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리하실 줄 안다고는 들었는데, 저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요?”
“저희도 처음 봐요. 수도 외곽에서 살 때는 가끔 요리하긴 했지만, 저 정도라니…….”
“오히려 못하는 게 뭔지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하하…….”
웅성웅성.
베오날드가 요리에 집중하는 동안 미리 식탁에 앉은 여성진은 그의 모습을 보며 수군대었다.
그녀들은 베오날드가 없는 동안 자신들끼리 지냈던 터라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꽤 친해진 상태였다.
일단 다 같이 베오날드라는 한배를 탄 몸이고, 여차할 경우 힘을 합쳐서 수도를 떠날 계획을 세워야 했기에 친해질 시간은 충분했다.
“식전 음료는 내가 정해서 세팅할 건데, 혹시 원하는 게 있나?”
“마음대로 하세요~!”
“저, 저도 베오날드 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저도요~”
“아, 저는 맥주로 주세요. 역시 땀 흘린 다음엔 차가운 맥주가 최고죠.”
‘베시아… 아니, 젤시 황녀는 이제 완전히 서민이 다 되었군.’
지금 그녀는 황궁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우아한 자세로 식사하던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으로, 팔 하나를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 다리 한쪽을 반대편 허벅지 위에 올린 채 껄렁하게 앉은 자세였다.
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지,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베오날드였다.
“그러고 보니 세인은 베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메이드로서 저렇게 가만있는 걸 용납할 수 없지 않나? 그냥 놔둘 줄은 몰랐는걸?”
“예? 아~ 저에게도 눈치가 있습니다, 베오날드 님. 셀리나 님과 하이디 님이 뭐라고 안 하시는데, 제가 건방지게 말을 할 순 없지요. 애초에 출신도… 고귀하신 분이니 말이죠. 지금은 저렇게 되었지만…….”
“저건 나도 놀랐다. 하하핫, 아무튼 접시들 좀 가져다 다오. 슬슬 익은 부위부터 잘라야겠다.”
세인이 젤시의 확실한 정체를 모르면서도 그런대로 눈치껏 대하고 있다는 걸 안 베오날드는 안도하면서 계속 요리에 집중했다.
베오날드의 요리는 모두 통일 제국 시기 귀족이나 황궁에서 사용되던 레시피로 상당히 많은 정성과 시간이 소모되는 것이었지만, 요리보다 더 복잡한 연금술도 능숙하게 행하는 베오날드에겐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와, 이게… 뭐예요?”
“뭐긴~ 드나우프르의 해변이라는 전채 요리다. 마침 접시가 푸른색이라서 이걸로 해 봤다. 이 연노란 소스 부분이 해변을 상징하며 바다 쪽에 굴, 새우, 조개를 씻고 가볍게 간을 해서 올렸다. 주 포인트는 소스인데, 지금 저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진주를 살짝 갈아서 넣었기 때문이다.”
“…무슨 요리를 만들라고 했는데 미술 작품을 만들고 그러세요? 와아아아…….”
“원래 귀족의 요리는 화려해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특별한 날이니까 힘을 쓴 거다.”
전채부터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만들어서 내놓는 베오날드의 솜씨에 셀리나를 비롯해서 하이디, 베시아는 물론 뒤에 있던 세인까지 모두 놀랐다.
그리고 메인 요리를 위해 베오날드는 이번엔 굽던 새끼 양의 구이를 발라내기 시작, 소스와 함께 스테이크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정성이 장난 아니었다.
스테이크를 접시에 내놓는데, 거기에 곁들인 야채들은 조리하고 난 상태로 젓가락과 칼을 이용해 빠르게 꽃이라든가 작은 동물 모양으로 조각을 한 것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저기,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거 있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물론 새끼 양 스테이크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 하지만 보기 좋으면 더 맛있는 법이고, 정성으로 더 좋은 것이 나온다면 나는 그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아무튼 오늘은 좋은 날이니 순순히 내 성의를 즐기도록.”
“오! 좋은 냄새군요! 후우~”
“데런이군. 어서 앉아라. 네 몫도 준비해 놨으니 먹고 감탄하도록 해라.”
베오날드는 자신의 솜씨에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며 겉으론 쿨하게 요리하는 척했지만 속으론 엄청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는 늘 남들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이거나,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화려한 연금술을 연구하거나 거금을 들여서라도 납을 은으로 만드는 연금술을 마술쇼처럼 벌이면서 좌중을 만족시키는 짓을 하는 등등…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컸던 것이다.
“후아아아… 잘 먹었다.”
“이런 요리는 생전 처음입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베오날드 님.”
“못하는 게… 뭐예요?”
“후우~ 다들 만족스럽게 먹은 걸 보니 나도 좋군. 자, 그럼…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해 볼까? 우선 유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디저트와 커피를 먹으며 듣도록 해라. 세인, 너도 다 나누어 주고 나면 앉아서 듣도록.”
그렇게 화려한 식사를 마친 뒤, 디저트와 커피까지 나누어 준 다음 베오날드는 자신이 지난 약 2주간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의 정체라든가 유적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내용과 그들이 이해 못할 내용은 각색했지만, 알려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선 깔끔하게 정보를 풀었다.
‘애초에 내가 500년 전 사람이라는 걸 알려 줘도…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 말이지.’
“뭔가… 엄청난 정보를 들어 버린 것 같네요. 고대 유적이라니…….”
“심지어 마도구도 있고. 그럼 아까 그 황금 뱀 조각상은 극히 일부의 보물? 맙소사!”
“그런 위험한 곳이니 베오날드 님 혼자 가셨던 거군요.”
“엄청난 사실이네요. 그러면 다음엔… 그 유적과 연결된 유적으로 가시는 건가요?”
“물론 가야 할 거고, 그땐 너희와 함께 가야지. 물론 자원자에 한해서 말이지.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다. 시기도 시기이고… 약속한 걸 지켜야 하니 말이야.”
“약속 말입니까?”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을 해독한다는 약속이었지.”
발데리안 가문의 유물. 500년 전 통일 제국 시절에 자신에게 충성하던 가문이었기에 그곳의 유물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먼저 가려는 이유는 자신과 연관된 유물이 있다는 점도 있지만, 다른 유적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또 상황도 모르기에 우선적으로 소재가 파악된 자신의 유산이 있는 곳부터 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아카데미는 때려치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유산을 파악했으니 그것을 찾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므로 구질구질한 간판이나 얕은 기반을 만들어 줄 아카데미는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기에 단칼에 버리는 베오날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