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일주일 뒤, 수도.
알테리오를 타면 더 빨리 올 수 있었지만 현재 베오날드는 막대한 양의 짐을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보와 질주로 수도로 돌아와야만 했다.
총 일정 2주. 오랜만에 보는 수도의 성벽에 베오날드는 드디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제 마음을 놓고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장 비밀 저택에 알테리오를 푹 쉬게 했다.
“휴우~ 드디어 도착했군.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늘 오던 데런의 상회 건물이지만 어딘가 달라졌다.
묘하게 양식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더 튼튼해졌다고 해야 하나? 양식도 일부 바뀌어 있었는데, 데런은 엄연히 남방 사막 민족인 샤남인. 아무리 수도에 살아도 그 전통은 잊지 않았는지 기본 건물 외엔 천막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많이 사라진 것이었다.
“…개수 공사라도 했나? 이상하네. 하지만 솜씨가… 아주 좋군.”
대규모 공사를 하도 많이 한지라 건축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베오날드는 새로이 바뀐 부분의 돌이라든가 나무의 공사 상태가 매우 좋은 것을 보고 데런이 일을 잘 맡겼다고 생각하며 늘 가던 지하 연구실로 향했다.
‘…내부도 공사를 다시 했나? 오… 타일이랑 벽돌의 무늬… 가 아니라, 이거 그림이잖아? 손이 엄청 갈 텐데? 이야아~’
연구실로 향하는 비밀 통로는 본래 목재로 되어 있어서 갈 때마다 삐걱거렸었는데 갑자기 깔끔하게 그림까지 새겨진 타일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길도 훨씬 가기 편해졌고, 더 이상 비밀 통로는 비밀 통로가 아니었다.
‘데런 녀석, 돈 엄청 썼겠군. 어라?’
“베오날드 님!”
“베오날드 니임! 드디어 오셨군요!”
“휴우… 오늘까지 안 오면 도망가야 했는데, 다행히 돌아왔네요.”
그리고 연구실로 내려오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세인, 하이디, 셀리나. 세인과 하이디는 베오날드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들어 품에 안겼고, 셀리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한시름 놨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다들 베오날드의 무사 귀환에 안심하는 것만은 동일했다.
“그나저나 대체 뭘 하다가 온 거예요?”
“일단 선물부터 받아라.”
“아니, 대답부터… 이, 이게 뭐예요?”
“통일 제국 시대의 마도구. 연도는 약 500년 전 물건이다. 작동은 안 하지만 거기 있는 마법 술식들을 연구하면 쓸 만한 게 나올 거다.”
베오날드가 배낭에 손을 넣어서 무언가를 꺼내어 툭 하고 던져 주자 셀리나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베오날드가 건넨 것은 뒤틀린 금속판을 억지로 뭉쳐 놓은 듯한 덩어리로, 어딜 봐도 다시 용광로에 넣어서 철괴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쓸 만한 거라니……. 게다가 애초에 제 전공은 원소학이라고요.”
“그랬나? 말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게다가 원소학?”
“…물론 저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술식이니 연구하면 도움 될 거고, 여차하면 미스릴이니까 팔아서 연구 자금으로 쓰면 되겠지.”
폐품 같았지만 미스릴이라는 말에 셀리나의 눈빛이 확 바뀌면서 이 금속 폐기물 뭉치를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상한 색으로 도색되어 있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단면을 보니 정말로 미스릴이 맞았다.
그러니 술식 연구가 잘 되지 않아도 베오날드의 말대로 연구 자금은 건질 수 있다.
“자, 세인, 기력 활성 주문이 세공된 팔찌다. 잘 때 차고 자면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줄 거다. 오러를 익힌 우리만큼 몸이 튼튼하지 않으니 각별히 신경 써야지. 평소엔 이 상자에 마정석과 넣어 두면 충전이 될 거다. 하이디는… 자, 목걸이다. 딱히 걸려 있는 건 없지만…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다.”
“잠깐! 사람 차별이 심하지 않아요?”
“위치가 다르니, 당연히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윽!”
베오날드의 뻔뻔하고 당당한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셀리나였다.
이 남자는 항상 사람을 아주 냉혹하게 구분을 짓고 그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한다.
‘정원’의 안과 밖의 차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 협력해도 내 사람과 거래자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남자. 부당하다곤 할 수 없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보다 베시아는? 보이지 않는데? 나 없는 동안 혹시 끌려갔나?”
“아… 그게…….”
“난 몰라요. 나는 모릅니다. 나는 어차피 정원 밖의 개인입니다.”
“아~ 일하러 갔습니다.”
‘…다들 왜 이래?’
세인을 제외하고 두 사람 모두 외면이라도 하고 싶은 듯 안색이 어두워진 채 고개를 돌리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처럼 통로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자 두 사람은 더욱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반면 세인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경박하게 오는 건지 어처구니없어하며 베오날드가 통로를 바라보자,
“다녀왔습니다아~! 어라? 베오날드 님, 오셨어요?”
“…베시… 아?”
“네! 덕분에 요새 삶이 정말 즐거운 베시아입니다!”
“…….”
사람의 변화라는 게 이렇게 급격히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특별한 계기나 사건, 충격으로 사람이 변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부정적이다.
그 무뚝뚝하고 고요한 호수 같던 황녀는 지금 태양이 반짝이는 것 같은 생명력을 뿜어내면서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니… 그 상태는?”
“아, 일하다가 왔거든요. 노예는 일해야죠.”
밝게 웃으면서 답하는 베시아였지만 베오날드의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현재 먼지, 흙, 나뭇조각, 돌멩이 등이 박힌 두꺼운 바지와 철판이 대어진 가죽 부츠, 허리띠엔 다양한 공구들이 매여 있었고, 못들이 담긴 주머니가 특히 눈에 띄었다.
상의 또한 땀에 젖어서 약간 누렇게 변색된 상태. 흔히 말하는 공사판의 인부들이나 할 패션이었던 것이다.
“…설마 그 이후… 쭈욱?”
“예.”
“네…….”
“수고하셨어요. 우선 샤워실로 가죠. 씻고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베시아가 젤시 황녀라는 걸 모르는 세인은 그녀를 데리고 움직였는데, 다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어느새 이 연구실 안에 설치된 샤워실로 향하는 거였다.
그리고 한 번 더 자세히 보니 자신이 대강 해 둔 공사들이 싹 다 마무리된 것은 물론 잡다하게 쌓여 있던 골동품들이 정리되고 못 보던 각종 가구들까지. 지하라는 점만 빼면 이미 훌륭한 시설로 완성된 뒤였다.
“설마 이걸… 그녀가?”
“예. 베오날드 님이 그 유적이라는 곳으로 가신 뒤로 전하께서는 목공을 비롯한 각종 기술들에 호기심을 느낀 건지 하나둘 해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수도의 목수 길드, 석공 길드, 대장장이 길드를 돌면서 기술을 배워 버리고는 이렇게…….”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길드의 장인들은 자신들의 밥벌이 기술을 남에게 쉽게 알려 주지 않는다.
자식 혹은 수십 년간 밑에서 일한 수습들이 눈으로 훔치거나 아니면 자질이나 실력을 인정받아야 알려 줄까 말까인데, 베시아는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기술을 훔쳐 냈단 말인가?
“그게 들어 보니… 기가 막힌 방법이더군요.”
“어떤 거지?”
“제게 돈을 빌리고, 셀리나 님에게 옷을 빌리더니 길드로 가서 일을 맡기는 척하며 사회 공부로 작업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하고는… 작업하는 걸 수시로 가서 봤다고 하더군요.”
“아…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군.”
베시아, 아니 젤시는 자신의 외모와 외양을 100퍼센트 활용한 것이었다.
머리색만 바꾸었을 뿐 바래지 않은 미모. 확실히 옷만 제대로 갖춰 입으면 누가 봐도 좋은 집안의 따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장인 길드의 사람들에게 거금을 주고 의뢰를 맡기는 그녀가 감히 기술을 훔치러 왔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테고, 평민들의 삶을 알아보는 사회 공부라는 적절한 핑계도 있으니 여지없이 자신의 기술을 자랑하고 신나게 원리를 떠벌렸을 것이다.
“과연… 알 것 같군. 어차피 그녀의 이해력이라면 두 번 이상은 볼 필요 없었을 테고, 실전 테스트할 곳은… 여기 천지에 널려 있으니 불가능도 아니군. 의뢰도 분야마다 한두 번씩만 하면 더 이상 이해도 필요 없을 테니……. 게다가 자세히 보니 저거 용광로군.”
“예. 더 무서운 건 뭔지 아십니까? 의뢰로 사 온 물건을 그… 데런 상인이라는 자를 통해서 2배 가격으로 되팔았습니다. 하아아~”
“아니, 어떻게… 아! 대강 알겠군. 직접… 사용한 물건이라고 포장했지?”
“오! 역시 베오날드 님! 정확하게 꿰뚫으셨군요. 그래서 차익으로 막 자재를 구입하고 공사를 하더니 순식간에……. 아, 물론 저랑 셀리나 님도 도우긴 했습니다.”
“과연…….”
사람의 외양이란 또 다른 이름의 재능이자 능력이다.
부정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아름다운 소녀가 사용한 물건을 신품보다 비싸게 사는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귀족이 넘쳐 나는 게 이 세상의 현실이었다.
베오날드도 그 편린, 아니… 그 세계의 사람이다 보니 금방 판매 전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역시 뛰어난 자는 어디서든 두각을 나타내는 건가?’
“후우~ 시원하다. 여기에 차가운 맥주 한잔하면 최고일 텐데!”
“베시아! 옷 제대로 입으세요! 지금은 베오날드 님이 계시잖아요!”
자유를 얻었다고 방종해지거나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지혜롭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베오날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지금 대충 새 바지에 수건 한 장으로 상체를 가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 고요하고 기품 있는 황녀를 타락시켰다는 생각에 미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역시… 말릴 걸 그랬습니까? 베오날드 님?”
“아니, 스스로 길을 찾고 성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심지어 그릇된 길도 아니다. 황녀가 막노동 좀 하면 어떻다고? 아무튼 이 증축과 설비 모두 그녀가 능동적으로 했다는 거군. 그럼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렇군요.”
“하나 우선은 할 이야기도 많으니 일단 다 같이 식사나 하러 가지. 세인! 식사하러 갈 테니 다 같이 준비하도록 해라. 아, 나도 준비를 해야겠군.”
막 여행에서 돌아온 처지라 해야 할 이야기도 쌓인 베오날드 또한 나갈 채비를 하고서 그녀들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500년 전의 유산을 되찾는 것도 즐거웠지만, 새로이 가꾸어져 가는 자신의 ‘정원’도 좋다고 생각한 그는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생을 얻길 잘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
같은 시각, 칼레움 제국 황궁 귀빈실.
“…….”
“…….”
화려한 탁자 위에 놓인 차가 식어 감에도 귀빈실에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고요히 눈빛만 교환하는 두 사람은 각각 칼레움 제국의 황제 제라도 칼레움과 제국의 명문 무가(武家)인 크멜 가문의 수장인 크멜 공작.
둘이 온 이유도 그렇고 지금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는 이유는 더 말할 것 없이 할데온 유적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