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베오날드가 동굴을 나오자 시간은 이미 늦은 저녁이 되어 있어서 어둑해져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었는데, 아래를 보니 상황은 아주 개판이었다.
싸우는 이들 모두 소속을 알 수 없는 복장과 무채색 혹은 검은색으로 칠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뭐야 이거...’
어이 없어하는 것은 베오날드 뿐이 아닌 건지 싸우는 기사들 중 일부는 연신 오러가 담긴 검을 휘두르며 자신들을 습격한 자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은 아무 말 없이 싸울 뿐이었다.
“...”
“크윽! 대체 너희는 누구냐?!”
“...”
“역시 크멜 가문의 개들인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는 광경, 베오날드는 일단 숨죽이고 그것을 지켜보는데, 전쟁터 및 대규모 전투를 경험한 적이 있는 베오날드는 이 싸움은 결국 저 조용하고 검은 갑옷을 입은 이들이 패배할 거라는 게 눈에 보이고 있었다.
검에서 나오는 오러와 투기, 실력의 차이가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어서 누가봐도 승산이 없고 그저 부질없는 저항이라는 게 드러나고 있는데, 이상하게 저 조용한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은 마치 죽기 위해 싸우는 거 같았다.
‘저런 짓은...미친 광신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데 말이지.’
전생에 지방에 가끔 나오는 사교도 반란군 놈들이 저런 타입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는 베오날드, 물론 제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쓰레기들을 용납할 수 없는 베오날드는 그 사교도들을 때려잡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저...일부러 티 안 내려고 제각각 옷을 입었지만 호흡 완전 죽여주는 기사님들은...황실기사단이겠군.’
칼레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의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 했지만 고금동서, [황실기사단]의 존재와 의의는 결국 황실을 수호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하며 황가의 자손들을 지키는 역할이기에 그 무예와 전투 방법의 아이덴티티는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위장을 했지만 봐. 서로 말하지 않아도 등을 커버해주고 있고, 검술도 딱 봐도 방어 중심이고...시대가 지나도 황실기사단이라는 놈들의 습성과 성격은 같네. 결국 황제도 여기를 줘놓곤 아깝다고 생각하는 건가?’
베오날드의 분석대로 실력 차이와 조직력에서 밀린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은 모두 전멸하고 만다.
다만 서 있는 황실기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든 적들에 질린 듯 다들 피를 닦아내면서도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한두놈 생포하지 그랬나?”
“생포하려고 하니 곧바로 죽어버리더군요. 입에...독이라도 물고 있는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소지품에선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제길! 배후를 안 들키려고 철저히 훈련시켰군. 대체 어디지?”
“이 유적에 있으니...뻔히 크멜 가문 아니겠습니까? 거기 아니곤 이런 자들을 키울 세력이 없지요. 딱 봐도...수련하는 애들 중 미달자들을 모아서 암부(暗部)라도 만든 거겠죠. 그들 중 버림패 같습니다.”
“버림패라. 그렇군. 아무튼 빨리 돌아가도록 하지.”
황실기사들은 자기들 나름 그럴싸한 추측을 하면서 습격자의 배후를 예측하고자 했다.
크멜 가문, 역사를 지닌 명문 무가(武家)이며 주변 영지를 분가들로 통치하는 가문.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뒷공작의 능력도 올라가게 되니 나름 합당한 추리였고, 마침 이곳에 지켜야 할 유적까지 있으니 이 진실은 틀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걸 사교도라는 걸 눈치 못 챈다고?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렸나? 아니...관점이 달라서 그런 것일 수 있지.’
500년 전에 사교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벌했던 베오날드이기에 그들이 암부(暗部)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거지, 지금 이 시대엔 사교도들이 만약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면 애초에 사교도라는 것에 대해서 머리에 닿지 않으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어쩔 수 없는 거군. 아무튼 우리도 돌아가지. 이거 참~ 사교도라.’
이런 걸 보니 다시 태어난 이후 그동안 단 한 번도 와 닿지 않았던 [세계의 위기]라는 것이 드디어 가슴에 와닿는 베오날드였다.
사교도, 즉 어둠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 저 북쪽 너머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존재 한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후부터는 그들에 대한 계산도 집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수도로 향한다.
그리고 같은 시각, 수상한 자들이 황실기사단을 덮친 것과 비슷한 때에 수호자에게 겁을 먹고 할데온 유적에서 떠나는 크멜 가문의 일원들도 마찬가지로 수수께끼의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대체 이놈들은 뭐란 말인가?!”
“...”
“젠장 말이 없는 걸 보니 좋은 일을 하는 놈들이 아니구나! 더러운 일을 하는 개들이겠지!”
“...”
서걱!
기분 나쁠 정도로 말이 없는 검은 갑옷을 입은 습격자의 목을 베면서 알서스 경은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들을 습격한 이들을 바라본다.
산도적이라기엔 너무나 무장이 깔끔하고 실력도 보통이 아닌 점, 그리고 보통 산도적들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겐 덤비지 않는데, 이놈들은 무슨 결단력을 가지고 있는지 목숨을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황제, 그 자의 짓인가?’
이미 기사들에게 보고를 받았듯 황제 측에서도 이 유적에서 마도구가 나오자 사람을 움직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단련 된 움직임과 죽음을 불사하는 암부의 조직력은 아무나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며, 크멜 가문 정도 급이 아니면 키우는 게 무리다.
게다가 황실엔 알다시피 공식적으로 [첩보부]라는 정보수집과 뒷공작을 하는 조직도 있기에 알서스가 오해하기 딱 좋았다.
‘헌데 놈들이 왜 갑자기 우릴 공격하는 거지? 젠장! 유적은 이미 수호자에게 막혔는데! 대체?!’
다만 궁금한 것은 이들이 공격한 이유, 자신들이 잔뜩 마도구를 발굴해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왜 지금 공격하는 것인가?
이 점은 알서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공격해봐야 그저 황실과 크멜 가문의 사이만 안 좋아지고, 서로 의심 아귀와 갈등이 깊어 질 텐데 말이다.
‘...아니, 설마 그게 목적인가?!’
[할데온 유적]을 발굴 전에 주긴 했지만 까놓고 보니깐 확실하게 안에서 엄청난 마도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황제는 배가 아픈 것이었다.
허나 공개적으로 돌려달라고 하면 체면이 깎이는 것이기도 하니 공식적으론 신원 미상인 자들을 투입해서 이곳에 ‘미지의 위협’을 만드는 것으로 참견할 명분이 생기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명분으론 모자랐지만 황제라면 거기에 또 다른 계획을 끼얹어서 그림을 예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리라.
그 황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큭! 허나 어쩔 수 없군! 계속 싸워...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알서스는 계속해서 전투에 집중했고 지휘를 해나가는데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 챈다.
에스칼 크멜, 검을 쓰지 못 하는 자이기에 나름 가문의 중임을 맡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략에 능하고 생각은 있는 축이라서 수도에서 가문의 외부 업무를 담당하는 자였다.
‘...혼자 빠져나가서 수도로 향했겠지. 그놈은 본래부터 겁쟁이니 말이야.’
알서스는 앞서 황제에 대해서 만큼 에스칼에 대해서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가(武家)에 태어나서 검도 못 다루고 오러의 재능이 없는 놈이다.
그러니 지레 전투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혼자서 수도로 도망쳤을 거라 생각하고 알서스는 전투에 집중한다.
“으으음...어떻습니까? 저는 아직 신앙심이 모자라서 그런가? 영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그 에스칼은 현재 일단 알서스의 말대로 일행에서 이탈하긴 했다.
허나 그가 있는 곳은 지금 도주로라던가 수도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할데온 유적]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여기선 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 역시 그렇군요. 저도 하마터면 속을 뻔 했다니깐요?”
[이곳은 철저히 욕망과 열정, 증오로 뒤덮여있는 공간이다. 신앙심은 조각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에스칼이 넉살스럽게 말을 걸고 있는 인물은 무감정한 어투로 대답한다.
그는 황실기사단과 크멜 가문의 사람들을 습격한 것과 같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더 많은 장식과 보석까지 박혀있어서 화려했고, 붉은 망토까지 달려있어 훨씬 멋드러져있어서 입은 이의 신분이 높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흐으음~ 그래서 결국 성역이라는 건 거짓말이라는 거군요. 암흑성기사님의 말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암흑성기사, 신을 따르는 신앙심을 가지고 신전을 지키는 기사가 성기사라고 한다면 암흑성기사는 말그대로 암흑신을 섬기는 성기사. 투구 안에서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흉흉한 모습이었다.
허리엔 야만스러운 전투용 도끼 2자루를 메고 있었고, 등에는 ‘기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고문용 형틀, 허리와 어께엔 직접 ‘채취’한 사람의 해골들을 자랑스럽게 걸고 있기에 도무지 성기사라곤 할 수 없었지만 암흑신을 따르는 자라면 그럴 법했다.
[여신의 흔적이 없다면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예. 그럼 들어가십시오. 정말 불러서 죄송합니다. 그...워낙 신의 기적 같은 모습이어서 착각해버렸습니다.”
[상관없다. 더러운 여신의 창조물을 부수는 게 내 일이니 말이다. 네 계획은 어떻지?]
암흑성기사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고 양손을 모아서 기도를 하며 에스칼에게 묻는다.
그는 아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께를 으쓱하며 답한다.
“계획이야 아주 잘 진행 되었죠.”
일단 이번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암흑신교의 인원을 이용해서 할데온 유적을 노리는 크멜 가문과 황실 모두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악의(惡意)를 가지고 있다는 제스쳐를 확실하게 주입한다는 목적은 완수 했다.
제국 황실과 크멜 가문이 손을 잡고 단단히 공고하는 것만으로도 제국의 통치력은 높았는데,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역이나 반란, 혼란을 만들기 위해선 그 통치력을 깎아내야하고, 그것을 깎아내는 것엔 역시 귀족과 황실의 분란만큼 좋은 게 없다.
이제 남은 과제는 계속해서 그 균열을 키우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심아귀는 물론 이제 싸우게 만드는 일만 남을 것이었다.
“...헌데 그러면 그건 정말 뭐였을까요?”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보통 인간보다 살짝 큰 갑옷을 입은 형태를 한 금속의 거인.
게다가 들고 있는 이상한 쇠기둥을 하늘로 겨누더니 하늘을 찢어버리는 듯한 뇌격을 소환까지 한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신의 산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위용과 위력인데, 누구보다도 [여신]을 증오하고 분노해하는 [암흑성기사]가 [신기]를 눈치 채지 못 하면 말이 안 된다.
“으으으음...유적의 수호자라. 그런 물건이 수백 년 전에도 있던 걸까요? 암흑성기사님?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신지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교단의 기록에 의하면 아주 오래전 대륙의 국가들이 나뉘지 않던 시기, 황제를 대신해서 실권을 쥐던 한 신하가 우리 교단을 아주 잔혹하게 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
[그 신하가 이끄는 군단은 ‘신의 사도’도 아님에도 마치 ‘신의 사도’와 같은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게 실제로 존재해서 유적으로 남은 거라면 그것일지도 모르지.]
“...더욱 더 영문을 모르겠군요. 으으음...음?”
암흑성기사는 나름 충고랍시고 말을 해준 것이지만 에스칼의 의문만 깊어질 뿐이었다.
다만 그의 머리 한구석을 스치고 가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베오날드]의 존재였다.
그저 혼돈의 변수와 알서스 경의 시선을 돌리는 한 요소로 꼬드겨서 이곳에 보낸 것이었는데, 분명 알서스 경의 말에 따르면 베오날드는 몰래 유적으로 들어갔다고 했었다.
‘...!!’
그 점이 머릿속에 스치자 그는 놀란 얼굴로 유적쪽으로 뛰어가보지만 안타깝게도 유적 내부는 또 다시 거대한 격벽에 막히고 또 다시 지독한 악취와 독액이 흘러나오고 있어 도무지 갈 수 없는 상태였고, 에스칼은 혀를 차며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