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우선은 임시방편이라도 세워 놓을까?’
그저 방안이 나올 때까지 낑낑대는 게 성질에 안 맞는 베오날드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 자신이 내려온 입구 쪽에다 함정이라도 보강할 생각으로 움직였다.
여러 보관실들 중 한 곳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거대한 강철 드럼통 여러 개를 꺼내 알테리오와 함께 운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으니!”
강철 드럼통에는 녹색과 보랏빛으로 흉흉한 해골 마크가 그려져 있어서 딱 봐도 안에 위험물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입구 쪽의 강철 문 앞에 도착한 베오날드는 즉시 강철 드럼통들을 설치해 두고 알테리오와 함께 멀찍이 떨어진 다음 검을 뽑아서 검법을 시전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육식(六式)-아나콘다’.
펑! 펑!
강철 드럼통들의 몸통이 터지면서 안에서 진한 보랏빛 액체가 흘러나와 철문 아래를 적셔 나갔다.
그리고 보랏빛 연기까지 피어오르면서 지독한 악취도 새어 나와 그 불길함을 배로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이것은 바로 이 시설의 ‘맹독 함정’과 ‘독가스 함정’을 만들 때 쓰는 ‘특제 독액’이었다.
“뱀에겐 독이 있기 마련이지. 실제로 세상에는 독이 없는 뱀도 있긴 하지만…….”
연금술은 약을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독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학문이다.
애초에 약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 있고, 독도 유용하게 쓰면 약이 될 수 있는 게 세상의 이치다.
약과 독의 구분은 목적의식과 사용법을 준수하였는가에 따라 갈리기에 결국 사용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어설픈 짓은 못하겠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안으로 돌아가서 방안을 찾기 위해 궁리했다.
시설표를 다시 한번 더 살피던 중 갑자기 중요한 것을 떠올린 그는 중앙 관리실에서 자료들과 내부 지도를 미친 듯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애초에 왜 수도나 베노피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곳에 이걸 만들었을까? 이걸 왜 생각 못했지? 하! 이런 멍청할 데가! 당연히 운반 수단이 있으니 설치했을 게 아닌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정말 멍청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베오날드.
그래, 여긴 칼레움 제국 내의 영토이지만 과거 통일 제국 시절 기준으로 생각하면 머나먼 남쪽 구석의 숲이다.
이런 곳까지 귀중한 ‘실패작’들을 그냥 보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베오날드는 워낙 상황이 복잡해서 생각을 제대로 못했다가 이제야 그 점을 깨달은 것이었다.
“찾았다! 전송 마법실! 내가 왜 이걸 이제야 생각해 가지고!”
시설 지도를 확인한 베오날드는 전송 마법실의 위치를 찾아내었고,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전송 마법실은 2개의 커다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안에 마법진과 마정석이 박힌 여러 금속 기계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고 다른 데는 텅 비어 있었고, 밖에는 그것을 관리하는 기계들과 상태를 확인하는 패널 및 사용법, 주의 사항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찾았다! 다른 시설의 위치랑 지도!”
환희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하며 베오날드는 거대한 지도를 바라보았다.
500년 전 기준으로 작성된 지도이지만, 유적의 대강적인 위치를 확실하게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500년 전의 글자 그대로 나와 있는 베노피스를 포함해서 다른 지맥에 있는 이 시설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됐어! 이걸로 됐어! 하! 진짜 정말……!”
여러 고민과 고뇌가 단번에 해결되는 시원한 성과였다.
어림잡아야 했던 베노피스의 위치, 그리고 다른 시설의 위치가 모조리 나왔기에 베오날드는 흥겨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마력의 동력원만 확보되면 이제 단번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품었지만, 세상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마력을 채울 물건은 여기에 많아. 땜빵 하면 돼. 근데 망할……! 어떻게 한 군데도 살아 있는 데가 없냐? 알테리오 그놈이 다 꺼 놨나?”
꾸우우?
“아, 너 말고… 너 말고~”
전송 마법을 실시하려면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데 다른 연구소와 유적, 베노피스에 있는 전송 마법실의 전원은 단 한 군데도 켜져 있지 않아서 이곳에서 마력을 채워도 단번에 가는 건 무리였다.
자신을 배반했던 알테리오가 모든 시설과 창고를 폐쇄해 버린 건지 깡그리 시설이 정지된 상태였다.
“즉, 직접 가서 다 켜야 한다는 거군. 후우우~ 그렇게 생각하면…….”
이 ‘탈피의 무덤’ 시설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안에 있는 마도구도 마도구지만 이 전송 마법실을 지켜야 대륙 곳곳 어디든 갈 수 있고, 나중에 마왕이니 뭐니 하는 적들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키려면… 보자, 일단은 싸워야 한다는 건데…….”
엄격하게 자신의 무위 수준을 체크하는 베오날드. 로이드 크멜과 싸워 본 결과 중급 기사 상위 수준이라는 것이 명백했고, 많이 쳐주면 상급 기사 하위 수준.
하나 상대해야 할 자는 크멜 가문의 상급 기사는 물론 마법사들 다수, 거기에 추가로 다른 기사와 병사들……. 아무리 베오날드의 무위가 뛰어나도 혼자서 이길 수준은 아니었다.
‘꼭 이겨야만 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이 유적의 주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서야만 해.’
아무튼 싸움은 피할 수 없다.
하나 싸우자니 주판을 굴릴 것도 없이 너무나 상대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였다.
고작해야 상급 기사 하위, 상대는 가문 하나. 그리고 한 번 운이 좋게 이긴다고 해도 그다음은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특급 기사가 아닌 한 무리일 거고, 내가 여기서 수련을 한다고 해도 무리일 거고……. 결국 이 실패작 마도구들을 어떻게든 활용하는 방법뿐인가?’
베오날드는 다시 중앙 관리실로 돌아간 다음 마도구들의 리스트를 쫘악 늘어놓고 싸울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떻게 싸울지 그림을 그리며 필요한 것을 상상해 보았다.
‘이 유적 내부에서 시설을 이용한 유격전이냐? 아니면 나가서 전면전이냐? 선택해야 해. 시설의 보존과 보안을 위해선 무조건 나가서 전면전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나와 알테리오 둘뿐인데… 상대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병력의 보충은 불가능. 그렇다면…….’
개인의 힘을 키우거나 압도적인 기습 화력으로 상대를 섬멸해야 하는데, 그 조건을 달성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도 안 되기에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마도구를 보면서 조건을 맞춰 나가 보았다.
여차하면 꼭 여기 있는 마도구가 아니라, 직접 술식과 개조를 통해서 새로운 마도구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보자… 대형 위험종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 만든 익스플로전 발리스타, 공성용 마력포, 해양의 위험종 몬스터를 잡기 위한 썬더포스 캐논… 전부 다 혼자서 쓰기엔 무거워. 그나마 인간 레벨이 들 사이즈로 줄이면… 당연히 화력이 줄겠지. 그러면…….”
화력을 압도적으로 늘리는 것이 안 된다면 자연히 전투 지속력과 교환율을 올릴 수밖에 없다.
지속력과 교환율은 체력과 방어력, 자연히 방어구 쪽으로 이번엔 시선이 돌아가게 된다.
술식을 새겨서 특별한 작용을 하게 만든 방패라든가, 발걸음을 빠르게 해 주는 부츠라든가. 준수한 마도구들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뭔가 확실한 건 없었다.
“아, 나이트 아머.”
그리고 그때, 무언가가 머리를 스쳤다.
‘나이트 아머’. 불확실하게 수급이 되며, 특정 무가(武家)에 종속적인 ‘기사’라는 존재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도 갑주. 그 목표는 일반 병사에게 ‘기사’급 전투력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전투 센스와 동체 시력 등등…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실패한 프로젝트였다.
‘…그러고 보면 이걸 기사에게 입히는 용도로 변경해 보자는 의견도 있긴 했었지. 물론 기사들의 권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든 물건을 왜 기사에게 입혀야 하냐고 반박하면서 일축했지만…….’
거기서 머리가 번뜩였다.
보통 사람에게 입혀서 기사급 전투력으로 만들기 위한 이 나이트 아머 안에는 다양한 술식이 새겨져 있었고, 무기도 오러 블레이드에 맞서기 위한 사양으로 마력을 실을 수 있는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 세공된 술식들을 교체하고, ‘기사’용으로 개수해서 입는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게다가 입으면 체구도 커지고, 힘도 더 세지면 저 대형 몬스터들을 노릴 때 쓰는 대형 마도구를 다룰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한 베오날드는 즉시 나이트 아머가 있는 창고로 달려갔다.
과거 통일 제국이라면 과한 무력은 반란의 우려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자신도 기사이고 대륙에 미증유의 위기가 닥쳐올 상황이다.
그러니 이 발견은 단순히 이 유적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언젠가 ‘세계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대발견일지도 모른다.
***
일주일 뒤, 할데온 유적.
주변 수색을 하며 대기한 지 일주일. 드디어 크멜 가문에서 보내온 지원병과 기사, 신관, 모험가, 인부들이 대량으로 도착했다.
알서스는 즉시 새로이 합류한 보급 부대를 만나러 갔는데, 거기엔 에스칼 크멜이 있었다.
기사가 아닌 외부 담당. 물론 일을 하는 데 있어 손이 비는 이가 오는 게 당연하지만, 알서스는 기사도 아닌 그를 보자 썩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말씀하신 인원과 물자, 보급 다 챙겨 왔습니다, 알서스 경.”
“자네가 올 줄은 몰랐군. 본가 쪽에 지원 요청을 했는데, 수도에 있는 자네가 오다니 말이야.”
“일이 있어서 잠시 본가에 들렀고, 수도로 돌아가는 김에 이 일을 맡은 겁니다. 어차피 본가로 돌아가는 건 이쪽에 있는 기사분들이 해 주셔도 되니 말이죠. 어떻게, 발굴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처음엔 순조로웠네만… 아, 맞아! 네놈이 보낸 그놈! 그 아카데미 학생 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어! 네놈! 대체 무슨 정신으로 보낸 거지?”
“음? 재능이 있고, 유물에 대한 식견이 높은 학생이라고 적었잖습니까? 이용하시라고 보낸 건데… 왜 역으로 화를 내시는 겁니까?”
분노하며 살의를 보내는 알서스 크멜 경의 말에 에스칼은 오히려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에게 반발했다.
그렇게 둘은 말싸움을 시작하게 되었고, 알서스가 먼저 베오날드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놈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멋대로 다른 입구를 파고 들어가서 유적의 뭘 건드렸는지 몰라도 지금 입구가 막히고 독액이 튀어나오고 있다네! 다 자네 때문 아닌가?”
“…아니, 그저 학자분들 사이에 끼워서 같이 탐색이나 시키면 됐는데, 왜 관리를 안 한 겁니까? 아무리 허락했더라도 외부인인데, 관리를 안 한 게 저의 탓입니까? 이용하다가 여차하면 유적 안에서 처리하면 되는 일을?”
“크, 크흠!”
에스칼이 당당히 논리로 맞서자 알서스 크멜은 할 말이 없어졌다.
결국 이 현장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그의 말대로 처음부터 적절하게 어딘가에 합류시켜서 관리만 했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책임 소재를 그에게 넘길 수 없게 되자 알서스는 더 이상 반박하는 것을 멈추고 에스칼을 지나쳐 본가에서 온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어떻게 다시 유적으로 진입할지 상의하면서 그들이 가져온 물건을 확인하는데, 알서스는 깜짝 놀랐다.
“오오… 이건? 풍령검 ‘윈드 스피릿’. 이걸 꺼내 주셨다고? 후계자와 직계 분에게만 허락된 이 마법검을? 하! 기쁠 따름이군. 정말 내가 써도 되는 건가?”
“물론입니다, 알서스 경.”
“오오오…….”
알서스는 은은한 녹색 빛을 띤 검날을 보며 감탄했다.
풍령검(風靈劍) ‘윈드 스피릿’. 바람의 정령이 봉인된 검으로 오러를 실으면 바람의 마법과 융합하여 막강한 위력의 검기를 날릴 수 있고, ‘신속의 축복’이 전해져 본래 상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마도구이자 가문의 비보였다.
“알서스 경이 보낸 마도구의 성과 덕이기도 하지만, 황제 폐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해서 허락됐습니다.”
“…황제 폐하가? 아, 그렇군. 본래 이 유적은 황실에서 발굴권을 따낸 곳이었지. 아마 우리가 마도구를 발굴해 낸 것도 알고 있겠군.”
“예. 이미 수도에 전해지고, 아마… 황실 기사단이 벌써 움직였을 거라 봅니다. 아니면… 이 근처에서 별도의 발굴 현장을 몰래 만들었거나 말이죠.”
“크으으윽! 자기 손으로 넘겼으면 포기할 것이지, 황제 폐하도 너무하시는군. 아무튼 드디어 지원이 왔으니 다시 발굴 작업을 개시해야겠지. 다들 모이라고 전하게!”
지원 인력과 마도구까지 생겼으니 이제 다시 발굴 작업을 개시해도 좋을 것이다.
알서스 경은 즉시 마법사들과 기사, 인부들을 모으고,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다음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흐르는 유적의 입구로 다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