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하, 어떻게 보면 내 흑역사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감지덕지이지. 하하하. 아, 저거 나이트 아머군.”
화면 한구석에 배치된 갑주에 시선이 가는 베오날드.
보통 사람이 입기엔 상당히 큰 사이즈였지만 그것은 나름 혁신적인 연구의 성과였다.
‘나이트 아머’. 무가(武家)에서 못해도 15~20년 이상 수련해서 한 명 만들어질까 말까 한 기사를 대체하기 위해 수많은 술식을 새겨서 기사급 전투력을 구현해 낸 마갑주(魔甲冑)로, 이상은 훌륭했고 나름 성과를 이루었지만 결국 ‘전투 감각’적인 면에서 기사보다 월등히 떨어져서 이 탈피의 무덤에 오게 된 물건이었다.
“거기에 실패작 골렘들 천지군. 하하하.”
유적 한구석에 나열되어 있는 골렘들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마법사가 마력핵을 구성한 다음 흔히 구할 수 있는 흙이나 돌로 형태를 빗어 자신의 공방의 수비나 잡일을 돕는 일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지만, 베오날드의 경우는 이것에 손대게 된 의미가 좀 달랐다.
‘원래 전공도 아닌데… 씁, 그 망할 황제 놈이 만들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베오날드 공작! 공작! 나 좋은 생각이 났어! 꿈을 꿨는데, 골렘들이 막 싸워! 근데 그 골렘들이 막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화려하게 꾸며져서 주먹질과 발차기는 물론 뜨거운 빔을 쏘면서 싸우는데…….’
‘……?’
약 500년 전, 공작이 되어서 막 제국의 실권을 잡고 한창 정치 관계와 제국 통치, 노이멀 가문 통치라는 세 가지 압박과 밸런스를 겨우겨우 맞추면서 일하던 베오날드에게 황제가 휠체어 위에서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주문을 한 것이었다.
‘폐하, 그러니까… 골렘에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게 꾸미고, 주먹과 발차기로 서로 싸우게 하고… 뜨거운 빔도 쏘게 한다고요?’
‘응! 만들어 줘!’
‘…골렘은 마법사들의 전공이고,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만?’
‘아무튼 만들어 줘! 만들어 줘! 베오날드 공작!’
500년 전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두통이 날 것 같은 베오날드였다.
하나 황제를 모시는 것이 자신의 권력 정당성의 기반이었기에 거부할 방법이 없었던 그는 결국 수개월 동안 자는 시간도 아껴 가면서 짬짬이 이런저런 시시한 연구를 한 끝에 빠르게 움직이면서 빨갛고, 파랗고, 노란 화려한 골렘을 완성해서 빔까지 시연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오오! 역시 공작이야! 진짜 만들었네?’
빨갛고 파랗고 노란 10미터 높이의 금속 골렘. 황제가 말하는 요구 사항을 모두 채우기 위해 베오날드 강(鋼)은 물론 오리하르콘, 아다만티움 등등 초금속에 술식을 새기고, 마력핵은 위험종 몬스터의 마정석 수백 개를 응축해서 만들었기에 빠른 움직임, 빔을 쏘는 것까지 모두 구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폐하.’
‘그러면 저걸 10대쯤 만들어서 대규모로 싸우게 하면 더 재미있겠다. 내년 건국절엔 그렇게 하자. 가능하지?’
‘…예?’
‘가능하지? 응?’
결국 해당 골렘 수량을 10대 채워서 건국절에 준비시켰지만, 그 시점에선 황제는 이미 골렘에 대해 흥미를 잃었기에 결국 뼈 빠지게 준비한 이 작품들은 그의 탈피의 무덤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뭐, 대신 개발한답시고 개발비랑 제작비를 왕창 삥땅했으니……. 겁나 힘들었지만 결국 쓸데가 없었으니 짱박을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이 골렘들은 사실 실패작이라고 말하기엔 미묘한 존재들이긴 했다.
더럽게 비싸고, 유지 보수는 할 생각이 없지만 엄연히 완성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화려하고 비싼 물건, 실제로 사용할 곳이라곤 전혀 없고, 전쟁 같은 것도 없던 태평성대 통일 제국 시대라서 베오날드는 결국 이 탈피의 무덤에 짱박은 것이었다.
“그 외에도… 아주 많네. 마도 전차라든가, 심심해서 만들어 본 증기 기관이라든가, 실패한 약물… 하하하, 부끄러운 물건들뿐이군.”
하나 이제 베오날드 본인이 돌아온 이상 이곳은 더 이상 실패작들을 모아 놓은 ‘탈피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서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따라, 그리고 이 시대에서 활약할 기회가 생김에 따라 실패작들은 다시 성공작이 될 수 있고 그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중앙 관리실의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다른 도움이 될 게 없는지 확인해 나갔다.
***
몇 시간 뒤, 아침. 할데온 유적 발굴 현장.
베오날드가 기뻐하는 것과 반대로 유적에서는 현재 갑작스러운 일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아침이 밝고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던 크멜 가문의 조사단은 어제까지만 해도 열려 있던 유적 입구의 지하에 갑자기 거대한 금속 벽이 생겨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현장 책임자인 알서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뽑아 오러를 실어서 금속 벽에 휘둘러 봤지만 흠집만 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이봐! 어제 경비 서던 놈들 다 불러! 마법사님들에게도 혹시 방법이 없습니까?”
“으음… 이거 자세한 술식은 모르지만, 대마법 술식이 걸려 있어 마법으로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젠장! 경비 서던 놈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유적이 갑자기 작동할 리도 없을 테고, 화가 난 알서스는 어제 야간 경비 서던 병사들을 모두 모아서 문책하기 시작했다.
하나 야간 근무를 서던 병사들은 다들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둘러대었다.
그리고 베오날드가 수면제를 먹였던 둘은 당연히 자신들이 야간 경비를 서던 중 잠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목숨이 위험했기에 교대 전에 깨어나 서로 입을 맞춰 둔 것이었다.
“…젠장, 아무도 모른다니.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젠장!”
알서스는 신경질을 내며 오러를 끌어 올려 살의를 담아 병사들을 노려보았지만, 그들은 벌벌 떨면서도 버텨 내었다.
다들 썩어도 크멜 가문에서 십수 년간 일하며 전쟁터, 몬스터 토벌을 오갔던 숙련병들이었기에 압박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알서스가 포기하는 가운데 학자 중 하나가 무언가 깨달은 듯 건의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그 베오날드라고 하는 학생이 안 보이더군요. 데리고 다니던 그리폰, 텐트까지 싹 증발해 버렸던데… 설마?”
“그놈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놈이 경비를 하고 있는 입구로 들어갔을 리가 없는데…….”
“며칠 전부터 주변을 돌면서 다른 입구를 찾고 있던 것 같던데… 아마 다른 입구를 발견한 게 아닐는지요?”
“…뭐라고?”
“저희 텐트에서 마도구를 슬쩍슬쩍 보기에 수상해서 따라가 봤는데… 삽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군요. 뭐 하나 싶었는데, 역시나 입구를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안에서… 또 뭔가를 건드렸겠지요.”
천만다행으로 베오날드의 행보를 목격한 마도구 학자의 보고 덕분에 그가 몰래 다른 입구로 갔다는 가설이 제시되고,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알서스 또한 긴가민가한 기억 속에서 그가 유적으로 들어가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모습을 기억해 내자 그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쥐새끼 같은 놈이……! 얌전히 알짱거리다가 갈 것이지, 감히 우리 일을 방해해? 젠장! 우선 주변을 수색해라! 분명 놈이 열어 놓은 다른 입구가 있을 거다. 그러니 샅샅이 수색해! 그리고 크멜 본가와 수도에 있는 저택에 전갈을 보내라!”
“예! 알겠습니다!”
“맞아! 그리고 우리 가문의 영향권에 있는 주변 영지에도 그리폰과 수상한 놈이 오면 반드시 알리라고도 전해!”
알서스는 즉시 합당한 판단을 내리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통일 제국 시기의 유적을 발견하고 다소 희생이 발생했지만 어떻게든 던전을 돌파해서 마도구들과 보물을 캐 오는 판국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막힌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가문의 영광과 자신의 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저 유적의 보물들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 알서스는 마법사들과 함께 다시 폐쇄된 문으로 향했다.
“정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저희도 마법으로 열어 보려고 여러 방법을 생각하긴 했는데, 공격 마법으로 터뜨리거나 밀어낸다고 해도 이 유적의 입구가 무너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기사님의 ‘오러’에 의존하고 싶은 입장입니다.”
“으으음, 더 좋은 검이 있었더라면…….”
알서스는 자신의 검을 슬쩍 바라보며 아쉬운 눈빛을 띠었다.
물론 명문 무가(武家)인 크멜 가문인지라 그의 검도 어쭙잖은 용병이나 산적이 쓰는 것보다 월등히 준수한 예리함과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걸로는 저 튼튼해 보이는 문을 베어 넘기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본가에 요청해야겠군.’
결국 알서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본가에 요청하는 것뿐. 자신에겐 없지만 본가의 보물고에 분명 이런 때를 위해서 보관해 둔 무장이나 비장의 마도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면 저런 문쯤은 돌파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하며 다시 유적을 나와서 본가의 지원을 기대하며 다른 입구를 찾는 일에 집중했다.
***
밖에서 크멜 가문의 사람들과 군대가 움직일 동안, 베오날드는 탈피의 무덤 시설을 파악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500년이 지나는 동안 혹시나 지진이나 사고, 혹은 다른 도둑놈들이 들어와서 가져가거나 유실된 것이 있는지, 그리고 시설이 부서지거나 망가진 곳이 있는지를 체크하는 등등… 할 일이 매우 많았다.
“뭐, 당분간 머물 각오를 하긴 했지만… 밖의 놈들이 분명 가만히 있질 않겠지?”
일단 벽으로 봉쇄하긴 했지만 분명 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든 뚫어 낼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베오날드 강(鋼)에 대마법 술식까지 새겨진 벽이라서 금방은 뚫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절대적인 방어가 될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일단 이곳 책임자인 알서스만 해도 상급 기사 정도의 강함을 지닌 걸로 추정되었고, 좋은 검만 있다면 오러로 베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도둑놈들이 여길 못 노리게 막아야 하는데 말이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는 베오날드. 아예 구역 하나를 놈들이 못 들어오게 무너뜨려 버릴까? 를 시작으로 여러 방안을 궁리했지만 쉽사리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이곳에 통일 제국 시대의 유물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앞으로 수많은 자들이 몰려올 거고, 그것을 일일이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한시라도 빨리 결정해야 해.’
식수와 식량 문제는 전혀 없었지만, 결국 인간의 탐욕이 계속해서 이 유적을 노릴 게 확실했다.
베오날드는 무언가 방안이 없을까 고민하지만 쉽게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실패작’들을 뒤적거리던 중 드디어 쓸 만한 것을 하나 발견한 베오날드였다.
“일단… 하나는 건졌군. 와, 이거 오랜만에 보네.”
중앙 관리실에 보관된 상자 중 하나로 500년 전의 통일 제국 언어로 된 태그엔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이라고 쓰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보존 마법의 효과가 끝났지만 그래도 멀쩡한 모양의 가죽 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가방 속을 열자 은은한 푸른빛의 아공간이 보였다.
“좋았어! 그나마 운반 문제는 좀 편해지겠군.”
‘미완성 아공간 보관 배낭’. 흔히 전설이나 신화 속에 나오는 모험가들이나 용사라면 꼭 하나씩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물리 법칙의 한계를 뛰어넘는 편리한 물건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오날드는 나름 마탑의 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직접 만들어 보기 위해 연구를 해 봤지만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아… 여전하네. 쩝~”
가방 입구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 무한히 보관되고, 아공간 속에 들어간 물건들을 꺼내는 것도 쉽게 하기 위해서 여러 마법 술식을 새겨서 구현하는 데 성공했지만, 딱 한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해 미완성이라는 이름이 달린 가방이었다.
문제점은 바로 안에 들어간 ‘물건’들의 무게가 그대로 가방 전체에 분산되어서 전해진다는 거였다.
‘…이걸 해결 못해 가지고. 에휴~ 결국엔 짱박았지. 다만 아공간 관련 마법 술식 연구는 나름 성과를 보였지만 말이지.’
무게 문제를 해결 못했다고 해도 나름 운반의 부피와 용적을 줄인 것만으로도 혁신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문제는 이 가방의 제작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냥 도로를 깔아서 물류 유통 능력을 상승시키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거였다. 그에 결국 미완성인 채로 이 탈피의 무덤에 보관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딱 적절한 아이템이군.”
‘실패작’인 이 가방도 지금의 베오날드에겐 최적의 아이템이었는데,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싹 다 집어넣어서 부피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늘어난 무게는 오러로 단련된 베오날드 혹은 그리폰인 알테리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는 건졌는데 말이지. 후우~ 이제 어쩌지?”
새로운 가방에 짐을 정리한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이 시설을 지키고 크멜 가문 사람들을 엿 먹일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