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우리 집안 문양이군. 부서져 있지만 확실해!’
인부들이 영차영차 꺼내 오는 잔해들 사이에 보이는 ‘히드라 문양’. 보통 불길하거나 사악한 생물이라서 웬만한 가문에서는 상징으로 삼지 않는 생물이다.
스스로를 ‘뱀’이라 칭하고, 역대 가주들이 미친놈 천지였던 노이멀 가문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부분부분 부서져서 지금은 뱀 머리 2개 정도만 흔적으로 남았지만, 질리게 본 가문의 문장을 베오날드가 모를 리 없었다.
‘아주 제대로 찾아왔어.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군.’
제대로 찾아왔다는 걸 알자 베오날드는 우선 크멜 가문의 발굴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정식으로 발굴단에 합류하기로 했다.
죽~ 돌아서 먼저 경비에게 이야기한 다음 가장 화려하고 큰 텐트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크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녹색과 갈색의 장식이 된 갑주를 입은 거한이 책임자 같아 보였기에 곧바로 서류를 내밀었다.
“으음… 우리 가문의 서찰이 맞는군. 그러니까… 아카데미 학생이고 고고학에 취미가 있으니 잘 돌봐 주세요? …아직 학생 아닌가? 그것도 혼자서? 무슨 도움이 되기에 보낸 건지 모르겠군. 이미 여기엔 아카데미에서 역사와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들도 있고, 마법사들도 여섯이나 있다. 고작 학생 하나가 추가되는 게 의미가 있을 리 없을 텐데…….”
‘…그 유적을 만든 사람이 왔으니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
“크흠, 아무튼 가문의 명이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여기 책임자인 알서스 크멜이다. 베오날드 캘러메인이라고 했나? 어차피 주요 작업은 우리 가문 사람들이 하고 있을 거니 외부인인 너는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네놈 마음대로 다니도록 해라. 단, 식사나 식수는 알아서 구하도록!”
“예. 이미 제 몫은 제가 챙겨 왔습니다.”
그 뒤로 더 이상 베오날드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 알서스였다.
대놓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 하긴 지금 이 유적에서 신경 쓸 일은 한없이 많았다.
인부들의 관리, 나오는 유물의 해석과 결과 보고, 몬스터의 위협, 이 유적의 발굴권을 넘기고 가만히 있지 않을 황제 측의 첩자와 인간들의 시선 등등. 생각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의 두뇌 활동에서 베오날드라는 존재에게 할당할 부분은 없었다.
“엄청 바쁘신가 보군요.”
“뭐, 통일 제국 시대의 유적이니까. 어중간한 마도구만 나와도 신나는데, 만약 대박 물건이 나오면 국가 정세가 바뀔 레벨이니 말일세. 저 서쪽의 다이나 왕국은 본래 국가라고도 할 수 없는 나라였는데… 마탑과 유적에서 나온 유물로 강국으로 부상했을 정도니까……. 아무튼 자네 신변에 대해선 알려 두겠네.”
“감사합니다.”
친절한 경비 아저씨와 잡담을 나눈 뒤 베오날드는 곧바로 말들이 겁먹지 않게 알테리오를 구석진 곳에 놔두고 거기에 자신이 머물 텐트를 설치한 다음 현장으로 향했다.
발굴 현장은 일단 흙을 치워서 부서진 건물의 자태가 어느 정도 드러난 수준으로 수많은 인부들이 으쌰으쌰하면서 흙을 치우고 있었고, 중요한 표시가 될 돌이나 장식물은 마법사와 학자에게 옮겨져서 해석을 맡긴 뒤였다.
‘나는 해석할 게 없지만…….’
“이 문양과 글자 대부분 북부 양식이군요.”
“애초에 과거 통일 제국은 지금 칼레움보다 북쪽에 있을 텐데…….”
500년 전 언어와 이 시대의 언어는 다르지만 베오날드는 엄연히 500년 전 사람이다.
지금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낑낑거리면서 해독하려는 언어들이 베오날드에겐 그냥 일상 언어들이었다.
‘…보자. 여기가 뭐 하는 곳이지?’
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이 유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슬쩍슬쩍 나온 자료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여기저기 엄청 많이 만들어 놔 가지고 일일이 다 기억을 못하는데 말이지.’
통일 제국의 실권자로서의 일도 하고, 베노피스라는 자신의 영지와 노이멀 가문의 본래 영토도 돌보는 등. 몸이 10개여도 모자란 베오날드 공작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추가로 황제의 주치의이기도 하면서 시시각각 황제의 취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움직여야 했던 그였다.
‘베오날드 공작! 베오날드 공작! 내가 재미있는 게 생각났는데 말이지!’
‘아… 갑자기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니 화가 나려 하네.’
분명 불치병으로 병상에서 누워 있는 게 대부분인데도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서는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고 칭얼대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권력 정당성이 그에게서 나오는 만큼 베오날드는 절대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여러 방법들을 행했던 기억이 났다.
‘…뭐, 그 고생이 또 횡령해 먹기 좋은 핑계여서 좋았지만 말이지.’
횡령이라는 것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크나큰 공사든 뭐든 있어야 하기 쉬운데, 황제의 요구는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라서 고생스러웠지만 그만큼 대가를 쏠쏠하게 횡령할 수 있었으니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용도는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이 유적도 아마 그 황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혹은 그 횡령한 것을 보관하거나 횡령한 것을 이용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엔 뭘 만들었더라?’
“옛 문자는 정말 해석하기 힘들군요.”
“그야 500년 전의 문자이니까. 심지어 마족의 침략과 분리 전쟁으로 싹 엎어졌으니 말이야. 특히 500년 전엔 지금 안 쓰는 문자라든가 표현이 더 많아서 해석이 힘든 걸세.”
‘나에 대해선 전혀 신경 안 쓰는 게 좋군.’
마법사들과 학자들은 베오날드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그가 아카데미에서 온 학생이라는 것을 알기에 호기심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 지금 이 500년 전의 문자들을 해석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500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세월이었기에 문자의 변형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큰 전쟁과 혼란, 거기에 기록의 폐기와 재기록이 어우러지고 몇몇 표현과 단어들은 사장되고, 다른 나라의 언어와 혼합이 되는 등등… 변형이 일어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애초에 통일 제국 언어도… 통일된 게 아니니.’
애초에 500년 전 통일 제국도 언어의 통일이 되지 않은 세상이었다.
수도 및 대귀족들이 쓰는 언어, 평민이 쓰는 언어, 지방은 또 지방대로 사투리가 심하고, 다른 민족이나 종족이 쓰는 언어도 전쟁 중 섞여 버린 채 6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버리니 언어가 개판이 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자. 여기는 대체… 뭐 하던 곳이더라? 아! 찾았다. 여기는…….’
“나왔다! 던전 입구 발견했습니다아아아아아아아!”
‘멀쩡한 남의 작품을 던전 취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 발굴하던 인부들이 드디어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한 것 같았다.
한참 조사하던 마법사들과 학자들 모두 흥분해서 몰려갔고, 조사단의 수뇌들이 있는 텐트에서도 기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가 수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얌전히 자고 있던 알테리오만이 눈치챘다.
***
반나절 뒤, 칼레움 제국 황궁.
황녀 실종으로 인한 바니로 백작의 분노는 여전히 풀릴 줄 몰랐고, 지속적인 설득과 새로운 신부를 구하는 작업을 하느라 머리가 아픈 황제에게 첩보부로부터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부디 그 소식이 황녀를 찾았다는 낭보이길 바랐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들어온 것은 바로 자신이 넘겨준 할데온의 유적에서 던전 입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쪽… 일이었군. 후우우~ 그래서, 상황은 어떻지?”
“일단 크멜 가문에서 수색대를 파견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과 마법사들의 말에 따르면 역시 통일 제국 시대의 유적이 확실하다고 했답니다.”
“끄으으으으응!”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현실은 현실.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속을 끓였다.
‘통일 제국’ 시대의 유물과 마도구. 지금으로서는 재구현할 수 없고, 마탑과 다이나 왕국에서 극히 일부만 독점하고 있는 마도 테크놀로지로 현 난세의 판도를 단숨에 바꿀 수 있는 유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예정대로… 부대를 보내야겠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크멜 가문은 그래도 폐하를 지지하는 파벌이잖습니까?”
“지지한다고 해서 그 충성이 영원한 건 아니지.”
충성을 바치는 쪽이든, 바치지 않는 쪽이든 귀족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손바닥 뒤집듯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해야 편했다.
아무리 자신이 발굴권을 내주긴 했지만 이대로 크멜 가문이 통일 제국 시대의 유물을 손에 넣는 걸 반길 수는 없는 황제였다.
“흔히 크멜 가문을 명문 기사 가문이라 아둔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큰 오산이네. 그 가문엔 저력이 있고, 또 수많은 인재들과 귀족 가문이 따르고 있지. 지금 내 아래에 있는 것은 저 발데리안 가문. 볼레아 왕국과 성국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취사선택으로 따르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하긴… 볼레아 왕국은 야만인들이고, 성국은 틈만 나면 성전(聖戰)하겠다고 발광해 대니 대안이 여기밖에 없긴 하죠.”
“그렇지. 애초부터 진심 어린 충성이라는 건 아주 보기 드무니까 칭송받는 걸세. 아무튼 해당 유적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나 혹시라도 범상치 않은 유물이 나온다면 우리 제국은 크멜 제국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지 모르네.”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무엇이 나왔는지 보고 움직이면 늦을 테니, 레기온 경과 이야기하여 황녀 수색에 나선 인원을 모두 복귀시키고 수도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과 교대한다는 핑계로 할데온 지방으로 몰래 보내게.”
이만큼 했으면 이미 황녀의 수색은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휴식할 수 있는 인원은 휴식시키고, 인원들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냥 싸구려처럼 넘긴 할데온 유적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최고의 상황이지만, 만약에 무엇이라도 나올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했다.
“부디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를… 여신이시여…….”
황제에게 있어 이 이상 머리 아픈 문제가 늘어나는 건 좋지 않은 일이기에 그는 평소 찾지 않던 여신까지 찾아가며 할데온 유적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길 두 손 모아서 기도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던 자신의 판단이 결국 스스로를 혼돈의 구렁텅이에 넣게 되었음을 그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며칠 뒤, 할데온 유적.
입구가 발견되었지만 크멜 가문의 기사들이 철저하게 통제하는 터라 베오날드는 입장은커녕 입구 근처에서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봐야 했다.
특히 안에 무엇이 있는지 감을 잡았는데 들어가질 못하니 갑갑할 노릇이었고, 혹시라도 저 도둑놈들이 자신의 유산(?)을 도둑질할지 모른다는 점이 화가 나는 일이었다.
‘…내가 안에 함정이랑 보안을 잘 해 놨었나? 이게 긴가민가하네. 중요 시설엔 물론 다 해 놨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게 멀쩡하게 작동할지도 의문이고…….’
자신이 만든 유적의 보안을 뚫을지는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사태를 모르기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그였다.
하나 입구 안도 보여 주지 않겠다는 듯 저 좁은 곳에 병사도 아니고, 기사가 8명이나 나란히 서 있는 광경에 베오날드는 뭐라도 단서를 찾고 싶어서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영 기회가 나오질 않았다.
‘저 기사 놈들은 무슨 망부석인가! 진짜! 조금도 쉬질 않네.’
“으아아아아아아악!”
“비켜! 비켜! 빨리!”
“빨리 나와! 빨리!”
“신관! 신과아안! 불러!”
그러던 중 안에서 비명 소리와 사람들의 정신없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입구를 막던 기사들이 자리를 비키자, 안에서는 비명과 함께 탐색에 나섰던 병사와 마법사, 기사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그들은 다친 이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다들 몸 일부가 녹아내리거나 날카로운 것에 토막 난 것 같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으아아아아악!”
“진정해! 포션! 일단 포션부터 뿌려!”
“지독하군.”
‘…500년이 지났지만 안에 있는 함정이 잘 작동하나 보군.’
참혹한 모습으로 나오는 병사와 기사들이었지만 역으로 베오날드는 자신의 유산을 노리는 도둑놈들이 대가를 치렀다는 것에 즐거워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직접 다른 입구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