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재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녀의 보석 같은 재능은 그 어떤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가르치는 대로 모조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녀의 재능에 베오날드 또한 즐거움을 느꼈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한 달의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훌륭한 현장의 여왕이자 한 명의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말씀하신 물건 다 만들었습니다! 베오날드 님!”
“오오… 이젠 나보다 나은걸? 오러를 통해서 힘도 있는데… 섬세함도 들어가 있으니 말이야.”
“베오날드 님이 잘 알려 주신 덕분이죠.”
“말도 잘하는군.”
몇 달 전만 해도 아카데미 교복이나 드레스를 입었는데 지금은 머리를 뒤로 묶어 머릿수건을 두르고, 가죽 바지와 땀에 젖은 셔츠와 기름, 허리의 공구 벨트가 자연스러워진 황녀였다.
더구나 태도 또한 예전엔 말이 없고 조용했는데 이젠 베오날드와 능청스럽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활발해졌다.
눈동자만 빼면 이전의 황녀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거… 들키면 우리 죽겠죠?”
“죽기만 할까요? 극형을 당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하나 다행인 건 저렇게 되고 나니… 밖에 나가도 이제 절대로 그… 황녀님이라곤 아무도 상상도 못한다는 거겠죠.”
“그거 하나는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일까요? 저게?”
황녀의 정체를 아는 셀리나와 하이디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사자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 계속해서 베오날드와 떠들면서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근 한 달 동안 거의 어미 새를 따르는 새끼 새인 양 같이 다니는 둘이었다.
“…두 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세요?”
“아, 음! 그게 말이죠. 저… 황… 크흠! 베시아 양이 너무 화끈하게 변해 버려서 말이죠.”
“그러게요.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뭘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이었는데… 설마 저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나저나 셀리나 님, 이것 좀 봐 주세요.”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세인은 현재 업무와 공부 강도가 세져서 눈이 나빠졌는지 안경을 쓴 채로 등장했다.
최근엔 베오날드에게서 새로운 지식을 추가로 공부해야 해서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녀가 새롭게 배우고 있는 것은 바로 ‘수학’이었다.
수를 다루고 계산을 하는 학문. 수치가 들어가는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근본 중의 근본 학문이기에 베오날드는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 맞았어요. 하지만 정답만 도출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지식도 결국 기초를 잘 쌓아야 나중에 어려움을 맞이해도 견뎌 낼 수 있어요. 그러니 복습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오늘 일을 마치고 복습하겠습니다.”
세인은 그렇게 돌아가서 메이드의 업무를 이행했다.
후임으로 붙인 베시아가 갑자기 막노동꾼으로 전직했지만 그래도 베오날드의 일을 하기 전에는 여전히 같이 업무를 하였기에 업무 강도는 예전에 비해서 낮아진 상태였다.
거기에 베오날드는 자신의 ‘정원’에 들어온 자들을 관리해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을 놓고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이제 좀 조직의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군. 역시 사람은 머릿수가 중요해. 게다가… 재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지.’
일을 분담할 사람이 늘어나자 업무 강도가 줄어든 것에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베오날드 본인이었다.
자신은 여기 있는 골동품들의 감정만 하고 팔 만한 것들은 데런에게 넘겨서 팔고, 쓸모없는 것은 베시아에게 파괴 혹은 분해 작업을 맡겨서 손이 덜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이디에겐 알테리오를 돌보는 것과 외부 업무를 맡기게 되니 최적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쉬운 건 역시 여기선… 대박 템은 나오지 않는군.’
적당히 재조립해서 이용할 만한 쏠쏠한 편의성 마도구들은 종종 나왔지만 베노피스의 위치라든가, 아니면 연금술의 핵심이 되는 마도구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아쉬운 베오날드였다.
서적들도 열심히 읽어 봤지만 죄다 시시한 역사서나 문학 아니면 기록들일 뿐, 그가 원하는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문명 퇴화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해독하는 것은 둘째 치고 말이야. 그나마 성과라면… 지난 500년간 대충 어떻게 문명 퇴화가 일어난 건지 알 수 있다는 것 정도인가?’
시시한 역사서와 문학들에서 실려 있는 내용이라 신뢰성은 낮지만, 지난 500년간 베오날드가 열심히 길러 낸 문명이 퇴화한 이유에 대해서 자기 나름으로 답을 낼 수 있었다
우선 자신과 사이가 안 좋았던 여신교에서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정보 은폐를 했다는 것이 첫 번째.
자신의 죽음 이후 통일 제국에서 일어난 대분열과 내전의 시대에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서 유실된 것이 두 번째.
자신의 유산을 두고 싸운 마탑의 내전이 세 번째. 여기까진 기존의 대략적인 정보를 통해서 알 수 있던 것이었고, 새롭게 얻은 네 번째 이유가 있었다.
‘암흑신 교단… 놈들까지 끼어 있었군.’
그래, 그 어떤 시대와 혼돈이 있어도 인간의 상승 욕구와 힘과 권력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유산을 두고 싸웠다면 누군가가 승리해서 그것을 차지한 채 쭉 갖고 있었어야 하는데, 사라진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물론 자신도 열심히 모은 재보와 유산들을 잘 숨겨 두긴 했지만, 그래도 바깥으로 드러난 재산과 지식만 해도 엄청난 양이어서 그것을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쓸모없는 기록이지만 추론엔 도움이 되었지. 아직도 의문이 많이 남지만 말이지.’
암흑신의 군세가 북쪽에서 내려왔고,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통일 제국이 밀려나면서 여러 나라로 분열한 것까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계속 공격을 오지 않는지부터 시작해서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기록의 공백은… 신전에 가 봐야 하나?’
그나마 알 거라 생각되는 곳은 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조직을 존속하고 있는 교단. 놈들은 남의 기록은 없애고 사라지게 만들어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조작하고 있을 것이리라.
그리고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서 진실도 한구석에 적어 놓았을 테니 분명 찾아가면 있겠지만, 전생부터 교단과는 너무나 사이가 안 좋아서 껄끄러운 베오날드였다.
‘나도 나름 여신의 선택을 받아서 내려온 사람인데… 으으음… 협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베오날드 공작! 제발 적당히 하시오. 어디까지 세계의 균형을 부수려고 하는 것이오?’
‘이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이오? 베오날드 공작!’
‘베오날드 공작! 베오날드 공작!’
‘어우…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위장이 아파 오는 것 같아.’
함부로 손대지도 못하고 지배하지도 못할 놈들과 손잡을 바엔 그냥 없이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에 대해선 또다시 배제하자 생각하고 계속해서 골동품 감정을 하던 차, 오랜만에 데런이 이곳으로 내려왔다.
“자~ 일은 잘되시는지요?”
“그럭저럭. 너야말로 바빠 보이던데, 무슨 일이지?”
“덕분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골동품들도 확실하게 감정하니 재판매도 쉽고 말이죠.”
“딴지 거는 놈은 없었나?”
500년 전 살던 사람이 직접 감정해 준 것이지만, ‘물건 감정’이라는 것은 때론 그것을 하는 이의 권위 앞에서 어긋난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과 권위를 위해서 옳은 것도 그르게 만들고, 그른 것도 옳게 만드는 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었고, 그래서 베오날드는 걱정된다는 투로 물었지만 데런은 전혀 문제없다는 듯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그런 걱정 없습니다. 애초에 엄청! 혁신적인 레벨의 물건도 아니었고 말이죠. 그리고 어차피 구매 가격은 전에 도박으로 제대로 한탕 당겼잖습니까? 어쨌든 팔면 이득입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무슨 용무지? 그런 이야기만 하러 온 게 아닐 텐데?”
“아, 크멜 가문의 에스칼 도련님에게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여기…….”
“드디어 왔군.”
베오날드는 데런이 내민 전갈을 받아서 즉시 뜯어보았다.
안에는 전달 사항이 적힌 편지, 할데온 지방의 지도와 유적의 자세한 위치, 그리고 크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발굴 작업에 참여한다는 서류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철저한 준비. 남은 건 이제 자신들이 가면 되는 것이었다.
“음… 이건 나 혼자 가는 게 좋겠군.”
“무슨 내용입니까?”
“기밀이다.”
“또 그러신다~ 슬슬 허락해 줄 때도 안 됐습니까?”
“아쉽지만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어쩌면 정말로 통일 제국 시대의 유산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곳은 황실과 크멜 가문의 암투가 벌어질 장소라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몸을 가볍게 해서 자신 혼자서 조용히 유적인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는 편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거였다.
“그러므로 당분간 여길 비운다. 셀리나, 네가 책임지고 다른 사람들을 지켜라. 한 2주일 정도면 될 거다.”
남은 멤버 중에서 그나마 신분이 보장되는 자는 역시 마탑의 셀리나뿐. 세인은 하녀이고 젤시는 도망자 신세, 하이디는 자작가의 여식이지만 아직 서임받은 기사도 아니고 이런 수도에서 먹힐 신분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는 소리에 셀리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갈 거면 같이 가야지, 혼자서 일 벌이고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다른 애들한테도 말할 거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볼일이 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하다. 나도 가능하면 정찰만 하고 금방 도망칠 생각이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내가 한 달 동안 아무 기별이 없으면… 여기서 도망치고, 데런에게 남은 물건에 대한 처분과 재산 분배를 지시해 놓지.”
그렇게 말한 베오날드는 세인, 하이디, 베시아를 불러서 세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했다.
크멜 가문에서 온 전갈과 할데온 지방으로 가는 것만 대강 알려 주고, 그곳에 볼일이 있지만 혼자서 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
하나 이미 이들에겐 베오날드는 더 이상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기에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라.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 그저 확인만 하고 돌아오는 거다. 거기에 통일 제국 시대의 유적이 있어서 그걸 확인하러 가는 거다.”
“그… 혹시나 던전이라든가 있으면,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문제는 거기가 상당히 위험할 거라는 거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를 여기에 대기시키는 거다. 알았나?”
베오날드의 설득에도 다들 아직 고민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안전을 생각한다는 그의 말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말린다고 해도 들을 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베오날드가 중요한 일에는 홀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떤 면으론 납득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가 처음인 베시아는 불안하다는 듯 베오날드를 붙잡고 간절히 바라보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말한 건 만약의 경우를 상정한 거니 말이야.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해서 출발하겠다.”
베오날드는 빠르게 짐을 꾸린 뒤, 알테리오를 데리고 곧장 할데온 지방으로 출발했다.
통일 제국 시기의 유적이 아니라면 시간 낭비겠지만, 만에 하나 그곳이 자신이 전생에 만들고 손댄 작품 중 하나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
알테리오와 함께 수도를 떠난 베오날드는 3일째 되던 날, 할데온 영지의 경계에 도착하게 되었다.
“흠, 수도에서 왔다고? 근데 그 그리폰은… 위험하지 않나?”
“제가 잘 길들였습니다. 여기 크멜 가문의 인증서도 있습니다.”
“…크멜 가문이라면 뭐, 어쩔 수 없지. 들어가라.”
영지 경계에 있는 초소를 무사히 통과한 베오날드는 다른 길로 가지 않고 곧바로 유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들과 산길을 돌파해서 도달한 그는 산 한가운데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여긴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군.’
보이는 것은 우선 펄럭이는 크멜 가문의 깃발과 야영을 위해 설치된 수많은 텐트들과 열심히 유적을 발굴하는 인부들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한적한 곳이라서 그런지 경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고, 기사들은 대부분 유적이 발굴되는 현장에 모여서 뭐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저건!’
그리고 베오날드는 한창 꺼내져 나오는 잔해의 정체를 파악해 내고는 놀란 시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