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 유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군.”
“흥미를 가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데온 지역에 있는 유적은 황제령과 크멜 가문 영지의 경계 쪽에 있습니다. 본래는 거대한 숲이고, 몬스터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을 토벌하는 모험가들에 의해서 유적의 존재가 밝혀졌고, 처음에 정보를 얻은 황실 측이 황실 기사단과 병력을 움직여서 발견하고 관리권을 얻었지요.”
“흐음…….”
“하지만 발굴하기엔 꽤 힘든 곳이라서 상당한 자금과 시간이 들어야 해서 세수가 들어올 때까지 보류했는데, 그걸 결국 이번 결투 때 넘기게 된 겁니다.”
“통일 제국 시대의 유적인데… 고작 애들 결투로 넘긴다고?”
500년 전 화려한 통일 제국 시절을 아는 베오날드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처사였다.
“하하하,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열리지 않은 상자입니다. 뭐가 있을지 모르죠. 돈과 인력을 잔뜩 들여서 발굴했는데… 시시한 골동품만 있고,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확실히… 그런 리스크도 있군. 그럴 바엔 차라리 감시만 붙이고 남이 힘쓰길 바라는 게 낫겠지.”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기에 그냥 이럴 때 버리는 카드로 쓰는 게 훨씬 더 이득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직접 ‘발굴’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쓰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가령 남이 발굴한 것을 탈취한다거나, 하는 방법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유적 발굴 작업에 참여시켜 드리죠.”
“그게 전부인가? 아… 그걸로 되는 건가? 거기서 뭘 가져와라, 알아내라, 이런 게 아니라?”
“예. 다만 그 현장은… 상당한 혼돈이 올 겁니다. 후흐흐. 크멜 가문뿐만이 아니라 황제 측도 역시 몰래 들어올 거고, 다른 공작도 끼어들 테고 말이죠. 거기에 휘말릴 각오가 되셨다면 기꺼이?”
“과연… 나도 거기에 혼돈의 재료로 이용하려는 건가?”
이 에스칼이라는 자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대강 눈치챈 베오날드였다.
그저 ‘파멸’과 ‘혼돈’이 일어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놈이었다.
통일 제국 시절의 유적이라고 한다면 어떤 비보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기에 아주 최적의 재료였고, 그것을 가지고 크멜 가문과 칼레움 제국의 분쟁이 시작되어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음, 좋아. 한데… 하나만 묻지. 어느 가문에게 대가를 받아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아~ 대가요? 그건 당연하지만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 알았다. 그럼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지?”
“그쪽은 아카데미 학생이니…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될 때면 좋지 않겠습니까?”
굳이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지만 여유 시간을 가지는 건 좋았기에 베오날드는 즉시 승낙했다.
차후 연락할 방안과 수단을 공유하고 난 뒤, 둘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호위들에게 돌아간 다음 그대로 해산하였다.
***
몇 주 뒤.
그리고 베오날드는 다시 아카데미 학업에 복귀하였다.
로이드 회장과의 결투로 유명해졌지만 불성실한 태도로 수업을 받는 건 여전했는데, 이젠 누구도 수군대거나 뭐라고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나고, 귀족 학부 여성들이 시시각각 자신을 보러 오는 건 좀 거슬리긴 했다.
‘…유명인은 괴롭군.’
“그나저나 베시아 양이 좀 걱정되는군요.”
“나름 잘 적응하고 있지 않나?”
“그 아이, 미색이 뛰어난 편이라 상회에 드나드는 인부들이나 다른 하인들이 가만둘지 모르겠습니다. 일은 반복하면서 배우는 게 되지만, 사람 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니 말이죠.”
머리카락 색이 변한 것일 뿐 외모 자체가 변한 게 아니었기에 베시아, 아니 젤시의 미모는 여전히 뛰어났다.
그리고 신분이 낮고 미모가 뛰어난 여성은 으레 주변에서 손대려 하는 자들이 많기 마련…….
“난 미색이라면 세인도 밀리지 않는다고 보는데 말이지.”
“가,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베오날드 님!”
“아무튼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다. 일단 셀리나에게 관리해 두라고 했으니 말이야. 마탑의 마법사이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거다. 그럼… 나는 오늘도 작업해야 하니 잠깐 눈 좀 붙이마.”
“예, 베오날드 님.”
대화를 마치고 눈을 붙이는 베오날드. 세인은 계속해서 수업을 들으면서 집중했고, 아카데미 수업을 마친 뒤 그들은 다시 데런의 상회로 돌아가 연구실로 향했다.
‘이제 완벽한 거점이 되었군.’
배수와 배기 공사가 완전히 끝나고, 물도 끌어올 수 있게 된 연구실은 예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빛이 들어오는 마법 등도 여러 개 설치해서 확 밝아졌고, 깨끗해진 모양으로 꽤나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물론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인 골동품들을 치워야 해서 갈 길이 멀었지만 말이다.
“끄으으으응! 아아아악!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뭐가 문제인 거냐?”
“아! 마침 잘 왔어요. 전에 알려 준 ‘주문 세공’이요! 이거 되는 거 맞아요?”
셀리나는 베오날드를 보자마자 한창 낑낑대던 작은 금속판을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바로 저 골동품 마도구들에 새겨져 있던 ‘주문 술식’들의 구성 원리를 연구하던 그녀가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도 이렇게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이런 걸 그냥 도구로 썼던 게 맞나요? 주문 세공이라는 거, 실존하는 거 맞아요?”
‘…실존하니까 내가 쓰고 만들었지. 휴우~’
‘주문 세공’. 말 그대로 주문을 세공해서 마정석의 마력만 공급하면 반영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인챈트 기법이었다.
기존에 종이나 양피지에 기록해서 일회용으로 발동시켜서 사라지는 것보다 월등히 편리한 기술이지만, 그 방법이 사라졌기에 대부분 발굴된 마도구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대체 왜 사라진 건지 모르겠네. 마탑 놈들 내전이 그렇게 심했단 말인가? 아무튼 그래서 속이게 되었지만 말이지.’
다만 이 정보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베오날드는 셀리나를 완벽히 속이는 게 불가능했기에 자신의 감정 기술이 좋고, 기술의 이름을 책에서 보았다는 식으로 속이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장 웃기고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주문 세공은 본래 마탑에서 만들어진 기술이라는 거지. 참 내~’
“말한 대로 금속판에 술식을 새기고, 거기에 마력이 다 소모된 마정석을 가루 내서 채워 넣고 있는데… 빈틈이 없게 만드는 게 말이 돼요? 아주 작은 알갱이를 하나하나 짜 맞춰야 하는 레벨이잖아요.”
‘…그래서 그 틈 사이를 메우고 마력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오리하르콘과 미스릴을 배합해서 녹여서 채워 넣었지. 물론 이건 극초기 방식이고, 나중엔 더 싸게 양산하기 위해서 아예 다 쓴 마정석을 순도 높은 강철과 섞어서 녹인 다음 약품 처리를 해서 미리 만들어 놓은 세공 틀에 채워 넣어서 세공을 완료하는 거지만…….’
“그러면 틈에다 다른 걸 채우면 되지 않을까요?”
베오날드가 원래의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찰나 예리한 지적이 옆에서 들려왔고, 두 사람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시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셀리나가 방금 전까지 손대고 있던 주문 세공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끼어든 것이었다.
핵심을 찌르는 말에 베오날드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셀리나도 의외의 장소에서 해법이 나와 충격을 먹은 눈치였다.
‘오오… 설마 여기서 정답이 나올 줄이야. 천재적인 지성은 시대를 넘나든다는 건가?’
“틈을 채운다니… 뭘로 채우죠? 이 작은 틈을? 으으음… 뭘로 메우지? 몬스터의 혈액이라도 넣어 볼까?”
‘그것참 무서운 발상이군! 하지만 나쁘진 않군. 피 또한 생명의 원천이자 마력이 흐르는 요소니까 무리는 아니야. 다만 제품으로 쓰기엔 문제가 많지. 일단 이미지부터가 끔찍하지.’
“저기, 정말로 제조법 모르는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내가 답을 찾느라 고민하는 걸 즐기는 우리 스승님 같은 표정인데?”
“직접 연구해서 성취하지 않으면 의미 없지. 게다가 정답의 견본은 이미 잔뜩 존재하니 말이지.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감정을 해야 하니 알아서 하도록.”
“이이이이익!”
베오날드는 분개하는 셀리나를 두고서 골동품들의 감정을 계속했다.
얼마 안 있으면 할데온으로 발굴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쓸 만한 물건을 건져야만 했는데, 현재까지는 그리 성과가 크지 않았다.
대부분이 폐품이거나 작동이 되지 않는 주문 술식들이었지만, 그래도 그것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문 술식으로 재조립해서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요샌 찾아낸다기보단 만드는 맛에 사는 것 같군. 마정석만 있으면 작동시킬 수 있으니 말이야.’
현재 이 연구실을 밝게 비추는 마도구도 발굴해 낸 것이 아닌 베오날드가 직접 재조립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필요하면서 간단한 것부터 만들어 나가는 베오날드는 전생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짓에 은근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해졌다.
‘뭐, 아니면 원래 이런 게 내 취향이었을지도……. 하긴 연금술 실험도 나름 즐겁게 했었지.’
“…….”
“뭐냐?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한참 열심히 골동품에서 ‘주문 술식’과 필요한 것을 뜯어내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그를 지그시 쳐다보는 베시아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베오날드와 그가 하는 작업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솔직히 누가 봐도 신기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대놓고 바라보는 것에 부담을 느낀 베오날드가 재차 물었다.
“…뭐냐?”
“재미있어 보여서요.”
“재미가 없진 않지만… 으음… 아!”
그 순간, 베오날드의 머리가 번뜩였다.
자신은 혼자서 여러 작업을 해야 해서 효율이 떨어지는 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적절한 두뇌와 오러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자신의 역할을 일부 대신할 수도 있다.
폐품 분해 작업만 도와줘도 자신은 감정에만 몰두하면 되기에 작업 효율이 2배가 될 수 있다는 걸 떠올린 베오날드는 즉시 그녀에게 마도구의 기본 구조와 술식이 새겨진 곳을 안전하게 제거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이걸로 기본 교육 끝! 내가 분류하면 너는 내가 지시한 부분을 뜯고 파쇄해서 분류하는 거야. 알았지? 처음이니까 내가 이거 분필로 표시해서 넘겨줄게. 오늘은 일단 감만 잡자!”
“예! 주인님!”
‘와… 정말 기가 막힌 광경이네요. 황녀님도 그렇고, 베오날드… 저 사람도 그렇고…….’
아무리 스스로 뛰쳐나오고 신분을 위장했어도 젤시 황녀 전하는 황녀 전하인데……. 그것에 개의치 않고 부려 먹어 버리는 베오날드의 태연함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셀리나였다.
하지만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베오날드의 지시에 기뻐하면서 망치와 연장을 잡고 즐겁게 막노동 작업에 들어가는 젤시 황녀 전하였다.
“후우~! 아! 이거 꽤 즐겁네요.”
‘…설마 황녀 전하가… 막노동 체질일 줄이야.’
아무리 머리카락을 염색했어도 그녀는 차가우면서도 우아하고,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매력적인 황실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눈을 빛내며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그녀. 일을 시킨 베오날드도 이때까지와는 완전히 기색부터가 다른 그녀를 보고 기겁할 정도였다.
‘…뭐, 본인이 좋아하면 좋은 거겠지.’
흥겨워하며 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기괴함이 느껴졌지만, 결국 작업도 효율화되고 황녀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기에 베오날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감정을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