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다음 날 오후, 데런의 상회.
에스칼이라는 남자의 비밀 데이트 신청을 받은 베오날드는 세인을 데리고 상회로 돌아왔다.
세인은 베오날드가 일을 보는 동안 고급 여관에서 푹 쉬어서인지 아주 쌩쌩한 상태로 돌아왔고, 베오날드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의욕이 넘쳤지만 베오날드는 오늘은 우선 쉬라고 전했다.
“예? 이미 푹 쉬었는데…….”
“그러면 연구실 치우는 걸 도와다오.”
“예! 베오날드 님.”
‘흐음~ 보자… 그 수상한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끌어들이려고 하는 걸까?’
에스칼 크멜. 일단 크멜 가문의 사람이며, 외부 업무를 담당하는 자다.
본인 말로는 ‘검’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본래라면 알려 주지 말아야 할 크멜 가문에서 얻은 정보를 모조리 베오날드에게 풀면서 반응을 보았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건 호의적인 시선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가능성은 날 이용하려 들거나 아군으로 손잡으려고 하려나?’
나름 전통 있는 기사 명문가인 크멜 가문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라면 생각보다 권력이 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본인의 영향력과 야욕을 위해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 혹은 크멜 가문의 권력에 더욱 큰 구멍을 내기 위해서 자신을 끌어들이는 것 등등… 상상할 여지는 많았다.
아무튼 최소한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름 미끼를 좋은 걸 던져야 할 텐데… 음~’
어설픈 미끼면 거부하면 되는데, 문제는 놈이 무력적인 수단을 사용할 때였다.
자신을 납치해서 회유하거나 이용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오날드는 그래서 내일, 아니 이제 오늘 밤에 계획을 세우기로 하고는 우선은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컨디션 조절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 판단력과 지혜는 두뇌에서 나오기 때문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6시간 뒤.
연구실에서 자리를 깔고 잠이 들었던 베오날드는 눈을 떴다.
연구실 안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세인과 베시아, 거기에 대기하고 있는 하이디와 다른 책상에 앉아 마법 연구를 하고 있는 셀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 다들 있었나?”
“잠을 잘 거면 멀쩡히 마련해 둔 방에서 자지 그래요?”
“아~ 생각을 좀 하느라. 그래도 잘 만한 곳이야. 내가 벌여 놓은 것 때문에 먼지가 좀 많은 게 단점이지만 말이야. 하아아암~ 생각해 보니 저거 공사도 끝내야 하는데… 이것 참 일이 많군. 읏챠!”
뚜두둑!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던 베오날드는 연구실을 바라보자 골치가 아파졌다.
체육제 이후 한가할 거라 생각해서 벌인 일인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일이 생기자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하나하나 확실히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벌떡 일어나서 공사부터 끝내 버리기로 했다.
“하이디, 밤 11시쯤에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으니 수련과 알테리오를 돌보는 걸 마치고 시간 맞춰서 수면을 취해라.”
“아, 예! 하지만 베오날드 님은?”
“나는 이 엉망진창인 상황부터 정리해야겠다. 셀리나, 네 도움이 필요하다. 시간이 촉박하군.”
“…혹시 절 무슨 마도구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에휴~”
한숨을 푹 쉬는 셀리나였지만 이내 지팡이를 들고 일어섰다.
이러나저러나 베오날드의 말을 들어준다는 의미이리라.
사실 이미 적응되기도 했고, 베오날드의 곁에 있으면 연구 거리가 넘쳐 나는지라 투덜대면서도 마법으로 그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자, 그럼 저희는 식사를 준비해 오죠. 여기서 드실 것 같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인과 베시아는 자신들의 일로 돌아갔다.
하나 공사를 계속하는 와중에도 베오날드는 에스칼의 초대에 대한 생각을 결코 멈추지 않고 어떻게 대응할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밤이 되었고,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이디는 단단히 무장을 한 상태, 베오날드 또한 검을 차고 옷 속에는 가벼운 무장, 사전에 준비한 다량의 약물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밤중에 이동하는 것은 경비원들이 보통 제지할 테지만, 베오날드는 발데리안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었고 또 은근슬쩍 그들의 밀명을 받은 식으로 이야기하자 쉽게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역시 수도의 경비들이 눈치가 좋군.’
“베오날드 님, 저기… 아래에 누군가 있습니다.”
“왔군.”
하이디가 발견한 대로 관문 근처에 있는 다리 아래엔 수상한 그림자가 3개 있었다.
횃불도 쓰지 않아서 달빛에 겨우겨우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베오날드는 하이디에게 무기에 손을 올리고 경계하라고 지시하고는 천천히 다가가며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이트 매너는 좋군. 장소 선정이 나쁜 것만 빼면 말이지.”
“하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근데 뒤에 있는 흉흉한 아가씨는 누구인지요?”
“내 호위이자 가신이다.”
“아아~ 뭐, 저도 호위를 데려왔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잠깐 같이 걸으시겠습니까?”
어두운 밤이라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예상한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호위를 놔둔 채 단둘이 강가를 걷기 시작했다.
달빛이 강물에 비치며 흐르는 배경을 두고 걷는 이 장면은 남녀 간이었으면 로맨틱했겠지만, 서로를 경계하는 사내놈들 둘이었기에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어제 일은 어디까지 기억하시는지요?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기거나 하진 않으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그래서, 황녀 전하의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군. 현재 제국이 나서서 찾지 못할 정도고, 시간도 너무 지난 마당이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말이야. 후우우우우~”
‘…과연 예상대로의 반응이군.’
달빛이 은은히 비추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두운 가운데, 에스칼은 어둠의 가호 덕분에 아주 훤히 보이고 있었다.
베오날드의 표정에는 피로함과 무력감, 절망감이 담겨 있었기에 일절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계속해서 사전에 세운 계획에 따라 베오날드를 떠보았다.
“황제 폐하도 참 무심한 분이죠. 혈통이 조금 어긋났다고 해서 이렇게 귀중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도 나름 그런 고통을 잘 알거든요.”
“…고통?”
“예. 보다시피 크멜 가문의 외부 일을 맡고 있지만 저는… ‘검’을 쥐지 못하는 몸이라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참 많은… 고된 일들이 있었죠.”
“아, 대강 알 것 같군. 가문들이 추구하는 것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대부분 노예나 하인만도 못한 취급이지.”
“아하! 아시는군요.”
“상식이니까…….”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하는 일로, 명문가는 그 명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노예나 하인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된다.
어느 곳이든 존재하는 일이었지만, 하필 베오날드는 그 정도가 극단적인 벨릭스 치하 시절에 봐서 더욱 가혹했다.
‘아무런 재능이나 능력 없는 사내놈들은 바로 광산이나 염전으로 던져 버리고, 여자아이들은 가신이나 기사,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뿌렸었지……. 게다가… 크윽!’
밤이라 감수성이 더욱 짙어져서 그런지 스스로도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아 봉인했던 기억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전생에도 수십 년 동안 겨우겨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놈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라 버린 것이었다.
‘네가 왜 여길 들어와? 그 복장은 뭐고?’
‘…오빠야, 아버님이… ‘밤 시중’을 들라고…….’
자신이 후계자 경쟁을 하던 시절, 가문을 위한 공을 세웠을 때 갑자기 포상이라면서 방에 가면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벨릭스가 말했었고, 반신반의하면서 갔더니 거기에 있던 것이 바로 배다른 여동생이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노이멀 가문의 어둠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던 한창 시기의 베오날드에게도 엄청 충격적인 일로 그조차 질겁했었고, 안 그래도 깊었던 부친 벨릭스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뚫을 정도로 깊어졌던 일이었다.
‘하필이면 잊고 있던 그게……! 그게!’
‘오오… 저 피어오르는 어두운 감정의 소용돌이! 그분의 권능은 굉장하군요.’
기억에 시달리는 베오날드를 바라보는 에스칼의 손에서 은은한 검보라색이 일렁이고 있었다.
보다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서 받은 ‘어둠의 신’이 내린 권능 중 하나로, 밤의 감수성이 짙어지는 것에 효과가 합쳐져서 어두운 기억과 기분을 끄집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면서 에스칼은 베오날드를 ‘설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가끔은… 이 세상이 정말 부조리하게 짜여 있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하하핫.”
“…그렇지.”
“그래서 때론 그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증오스러운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평온해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야.”
“…예?”
뭔가 흐름이 이상했다.
에스칼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여기서 보통은 어두운 감정에 휘말려 동조하면서 비탄 섞인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베오날드처럼 유능하고, 지혜로우면서 갖가지 능력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세상의 한계에 대한 절망감이 더 클 터였고, 지금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이 그것을 증명하지만 그는 달랐다.
“없으면…….”
“예?”
“내가 만들면 된다. 그편이 더 쉽지 않나?”
비틀어졌지만 방향이 다르다.
보통이라면 같이 어둠에 먹혀 비통해해야 하겠지만, 베오날드는 그 어둠을 뚫고 정점에 섰던 남자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배제하고 지배하여 자신의 정원을 완성해 본 자.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아들을 너무 믿은 탓이었으니 누구를 탓할 게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부정적인 감정과 어둠에 휘말리고 있었어도 고고하고 당당했다.
“…큭! 만든다니…….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해 봤는데… 말이지.’
“뭐, 좋습니다. 아무튼… 아직 어리니 그 정도 패기가 있을 만하겠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본론?”
“예. 당신이 결투하던 날, 그 결과를 황제 폐하께서 끼어들어서 엎었을 때, 그분은 우리 크멜 가문과 모종의 거래를 했습니다. 그 거래 내용은 바로 할데온 지방에 있는 유적의 발굴권을 넘기는 것이었죠. 그 유적은 참고로 과거 통일 제국 시절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더군요.”
‘통일 제국’ 시절의 유적이라는 말에 베오날드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룩했던 황금시대의 잔재. 지금도 그것과 그 유물들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그 유적을 발견한 것도 모자라서 발굴한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베오날드는 즉시 에스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