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거 즐겁게 이야기하시는 도중에 실례합니다. 5황자 전하, 그리고 7황자 전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에스칼 크멜이라고 합니다.”
“어어? 크멜 가문 사람인가? 중요한 용건은 내가 아니라 저기 유르실 형님에게 가 봐.”
“아~ 오늘은 중요한 용건으로 온 게 아닙니다. 그저 저도 옆의 인기 많으신 그분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말이죠. 안녕하십니까? 로이드를 이긴 분이라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
베오날드는 살짝 경계한 채로 에스칼을 맞이했다.
일단 크멜 가문도 대귀족이기에 서로 인사하면서 악수를 나누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눈이 웃고 있지 않음을 눈치챘다.
‘과연, 보통 놈은 아니군.’
‘오, 그 어수룩해 보이는 크멜 가문이지만 이런 놈이 있으니 멀쩡히 굴러가는 건가?’
“에스칼 크멜입니다. 크멜 가문 사람이지만 뭐, 기사는 아닙니다. 이렇게 바깥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군요.”
경계할 대상이라는 걸 파악한 두 사람은 일단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를 가늠하기 시작,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평온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공기는 이상하게 피부를 찌를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한데 로이드 님은 잘 계시는지요? 저는 저택에서 요양하느라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결말은 그럭저럭 좋게 났어도 결국 공작님의 분노를 사서 말입니다. 다들 지옥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물론 로이드 님뿐만 아니라 그 아래 모든 수련생들 전부 지금 영지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겁니다.”
“이거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네요. 저도 무사 수행이라도 가야 하려나요? 하하.”
“그보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황녀 전하의 소식 말입니다.”
“예? 어떤 소식이지요? 신전에 가신 후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베오날드는 능청스럽게 놀라는 척하며 황녀의 신변에 대해 말하는 그에게 다급하게 다가갔다.
물론 그 황녀의 신변은 이미 본인이 확보해서 노예로 위장시켜 놓은 뒤였기에 뻔뻔하기 그지없는 연기였지만 말이다.
하나 수십 년의 짬이 쌓인 연기는 더없이 진짜 같아서 상대인 에스칼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 아십니까? 사실 황녀 전하는 신전으로 간 게 아니라, 바니로 백작과 결혼할 예정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당신이 결투하고 있을 때 이미 그녀는 그쪽으로 향했던 거죠.”
“그럴 수가! 아니, 어떻게!”
쾅!
마치 정말로 낭패라는 것처럼 탁자를 치면서 과하게 반응하는 베오날드. 신들린 것 같은 그 연기력에 두 황자는 물론 에스칼도 전혀 위화감을 못 느꼈다.
베오날드는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아, 나는 결국 작별 인사마저… 하지 못하는 신세였던 거군요.”
뚝… 뚝…….
대귀족 정도 되는 자라면 언제 어디서든 가짜 눈물 정도는 쏟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비탄해하는 모습은 거짓이라고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연기였기에 2명의 황자는 물론이고 먼저 떡밥을 던진 에스칼까지 다가와서 그를 위로했다.
“그… 원래 그 노친네가 음흉한 놈인 건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정말 비겁하네.”
“저, 저희도… 몰랐어요! 세상에… 아버님이 그런 짓을 하, 하실 줄은!”
“호오… 이 정도로 진심이셨을 줄이야.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에스칼도 크멜 가문에서 귀족들과의 대외 업무를 맡은 자로서 나름 눈썰미를 갖추었지만, 수십 년간 귀족계를 지배해 왔던 베오날드의 그 능력을 넘어설 순 없었다.
그의 눈에는 베오날드가 진심으로 황녀를 좋아했으며, 황제에게 속은 것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진심이었나?’
‘…이미 넘어온 눈이군. 아쉽지만 이게 관록의 차이다.’
상대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베오날드의 눈엔 20대 중반 애송이일 뿐이다.
베오날드는 벨릭스 폰 노이멀이 만든 ‘고독(蠱毒)’의 결과물. 그 차이는 명백했고, 이제 자신의 수에 넘어온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아내는 일만 남았다.
‘어쨌든 아무나 알지 못하는 정보를 알고 있고, 그걸 미끼로 나를 동요시키려고 한 건 사실이니… 뭔가 속셈이 있겠지.’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역시 그분도… 보통은 아니신지 바니로 백작가로 가는 길에 혼자 도망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도, 도망이라니…….”
“역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은 싫다는 것이겠지요. 그보다 대단하지요? 황실 기사들과 바니로 백작가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도망이라니 말이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지금 다들 난리입니다.”
“맙소사, 엄청난 일이 벌어졌군요. 하아아~ 대체 황녀 전하는 어디 계신 건지…….”
지금쯤 자신의 연구실을 청소하고 있겠지만, 베오날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찾아 나서고 싶다는 듯한 제스처와 눈빛에 에스칼은 드디어 그에게 조금씩 이빨을 내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만, 힘내십시오. 황녀 전하도 나름 오러에 검술까지 배운 몸이시니 말이죠. 다만 문제는 이제 황제 폐하께서 찾으면 어쩌나 싶은 건데…….”
“먼저… 먼저 찾으러 가야! 혹시 그분께서 사라진 장소를 아십니까?”
“이미 도주하신 지 오래되어서 알려 드려도 의미 없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말이죠.”
“그렇군요… 큭! 이럴 거면 왜……!”
차마 황제에 대한 욕은 하지 못하고 분을 삭이는 연기를 하는 베오날드. 누가 봐도 황제에 대한 증오가 깊이 자리 잡은 상태이리라.
황제가 무리했기 때문에 지금 황녀가 행방불명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고, 여러 노력한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니 감정의 격류가 몰아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아… 으음… 그러니까, 이럴 땐 일단 한잔하자고! 내가 살게!”
“아, 으으으… 어떻게 하죠? 힘내세요. 저, 저희도 도와 드릴게요.”
“으윽… 으으으윽!”
5황자와 7황자는 비통해하는 베오날드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에스칼은 그런 베오날드에게서 황제에 대한 완벽한 증오심을 읽어 내고는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베오날드가 한 수 위였다.
베오날드는 비통의 극에 달해 엎드리는 척 얼굴을 가리면서 에스칼을 힐끗 보고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얼빠진 놈, 표정 관리가 서툴군.’
“자! 한 잔 받아. 이럴 땐 일단 한잔하고 푸는 게 최고야!”
“아, 예. 가, 감사합니다, 전하.”
베오날드는 슬쩍 술잔을 받고서 분을 삭이려는 듯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술이 약한 척 곧바로 휘청이는 연기를 했다.
이편이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기에 베오날드는 전생에도 술이 약한 척을 해서 많은 이득을 보았었다.
“이런 망하르… 세솽이… 끅!”
“이렇게 보니 확 깨는구먼. 하하, 이 친구, 맛이 갔는데?”
“그만큼 심려가 깊었다는 거겠죠. 휴우~ 어? 이제 갈 시간이라고? 하지만…….”
두 황자는 베오날드를 걱정해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3황자의 일이 끝났는지 황실 기사들이 와서 떠나야 한다고 그들에게 전했다.
하나 취해서 완전히 풀어진 베오날드를 보며 난감해하던 차, 에스칼이 능숙하게 베오날드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발데리안 가문의 도련님에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허튼수작 안 하는 거지?”
“안 합니다. 발데리안 가문 도련님도 여기 계신데… 제가 무슨 수를 쓰겠습니까? 저기까지만 가는 겁니다.”
“알았다.”
5황자와 7황자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에스칼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의 감시하에 베오날드를 부축해서 케드론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방향으로 베오날드의 옷 안에 몰래 작은 쪽지를 하나 집어넣는 데 성공하고는 케드론에게 그를 넘겼다.
“너는… 에스칼인가? 크멜 가문의 녀석이 왜 그놈을 데리고 있지?”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애초에 이 친구가 여기 온다는 것도 몰랐는데, 뭘 어쩌겠습니까? 하하하. 자, 여기 있습니다.”
“…….”
미심쩍은 눈으로 에스칼을 쳐다보는 케드론이었지만 베오날드의 상태는 딱 술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 뒤 케드론은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들에게 인사불성이 된 베오날드를 마차에 옮겨 놓으라 지시했고, 짐짝처럼 들려서 마차에 눕게 된 베오날드는 혼자가 되자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에스칼의 쪽지를 꺼내어 열어 보았다.
‘으음~ 보자. 내일 밤 자정까지 북쪽 외곽 관문에 나오라는 건가? 데이트 신청치곤 참 구식이군.’
물론 남자의 데이트 신청 따위 좋아할 리 없었지만, 베오날드는 그의 수상한 꿍꿍이를 알아내기 위해 기꺼이 이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줄 생각이었다.
***
화려한 파티도 결국 새벽이 되면 마치기 마련. 크멜 가문의 에스칼 크멜도 드디어 임무를 마치고 마차에 몸을 맡긴 채 긴장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는 베오날드에 대해 생각하며 보고서라도 쓰는 건지 어두운 곳에서도 눈을 빛내면서 이것저것 작성하고 있었다.
“음, 좋아. 이 정도면 되겠군. 이보게, 잠시 여기서 멈춰 주게.”
“아, 예.”
“15분 정도면 돌아올 걸세.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게.”
“예, 알겠습니다.”
돌아가던 중 그는 갑자기 마차를 세운 다음 기사들도 대기시켜 둔 채 어느 골목길로 혼자 들어갔다.
자주 있는 일인지 기사와 마부들은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고 기다렸다.
크멜 가문의 외부 임무를 맡은 그는 귀족 가문 외에도 상단, 도적 길드 등등… 수많은 비밀을 다루고 있었고, 괜히 그것에 손을 댔다간 목숨이 10개라도 모자랄 거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아무도 없군.’
똑똑똑.
한참 어두운 골목을 달려온 에스칼 크멜은 어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세 번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그림자에 가릴지언정.”
“어둠은…….”
“모든 것을 비추니라.”
끼이이익…….
암호문 같은 대화를 주고받자 문이 열렸고, 에스칼 크멜은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둠 속이었지만 에스칼 크멜과 안에 있던 자는 서로를 알아보고 대화를 하는 것은 물론 그가 준 서찰을 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어땠나? 그놈은?”
“충분히 쓸 만해 보였습니다. 배경도 적절하고, 제국에 대한 반감도 적절한 수준입니다. 조금만 자극하고 끌어들이면 쓸 만한 카드가 될 겁니다.”
“크흐흐, 그렇구먼. 이게 모두 위대한 어둠의 가호인 것이겠지.”
음산하게 웃은 남자가 어둠의 가호를 언급하자 에스칼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예를 갖추었다.
‘어둠의 가호’. 그것은 바로 세계를 어둠으로 물들이고 멸망시키려는 어둠의 신이 내리는 축복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즉 에스칼 크멜과 이 어둠 속에 숨은 남자는 ‘어둠의 신’의 수하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