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어디 보자. 참 생긴 것도 가지각색이군.’
3황자 유르실 칼레움은 길게 기른 금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성으로 30대 중반이지만 강렬한 외모와 냉철해 보이는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을 보는데도 무기질적인 눈빛을 보니 황제와 많이 닮은 아드님 같았다.
‘이쪽은 황제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군.’
그다음으로 뒤따르는 5황자 에이오른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반항아’나 ‘야인’ 같은 느낌을 가진 자로 거의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뒤로 묶어 올린 흑갈색의 머리칼, 셔츠와 웃옷은 풀어 젖힌 채 걸음걸이도 제멋대로였는데, 마찬가지로 30대나 되고도 이러는 걸 보면 상당한 고집을 가진 강골인 것 같았다.
‘…저쪽은 그 반대로 황제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이겠군. 뭐, 황자라서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겠지만…….’
후계자가 아닌 황자들의 운명은 여러 의미로 계륵 같은 존재다.
딸이라면 다른 귀족 가문에 팔아 치워 버릴 수 있는 우량 상품이지만, 남자는 달랐다.
일단 장자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 ‘예비’로 존재는 해야 하지만, 언제든 후계 구도와 정치권력 구도를 뒤흔드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장자보다 더 엄격하게 교육과 일하는 것을 통제해야 하는데 후계자 예비이니 아주 못해도 안 되고, 너무 잘하면 장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으니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거기다 그 본인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저렇게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전형적인 황실 반항아 케이스고… 마지막은… 으음.’
그 뒤를 이어서 들어오는 7황자 아쟉 칼레움은 자신의 다리로 걸어오는 게 아니라 메이드가 밀어 주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참 기이하게도 황족 중 꼭 한 명씩 있는 병약한 타입인데, 사실 평민들 레벨에선 병약하게 태어난 시점에서 이미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죽어 버리기에 희귀한 것일 뿐이다.
황실은 그나마 신관도 붙이고 식사와 수면도 제대로 할 수 있어서 영양 공급이 좋기에 저렇게 병약해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뿐이고 말이다.
‘많이… 음침해 보이는군. 뭐… 당연하겠지만. 옛날 우리 황제님이 떠오르는군.’
곁다리 황자들이 겪는 스트레스에 몸이 불편한 스트레스까지 합쳐져서 2배로 고통스러운 케이스라 음침해질 만했다.
예전 자신이 목숨줄을 잡고 등에 업은 통일 제국의 황제도 자신감이 모자라고, 엄청 소심하고 나약해서 그 땅 밑으로 떨어지는 자존감을 맞춰 주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한 게 떠오르는 베오날드였다.
‘…그 고생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아. 에휴~’
황자들의 행차가 끝나고 난 뒤, 제3황자 유르실 칼레움이 손을 저으면서 다시 파티를 즐겨도 된다고 말하자, 나란히 서서 예를 갖추던 귀족들은 흩어져서 다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음, 조엔 황태자님이 오시지 않은 걸 봐선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군.”
“그러네요. 뵐른 가문의 가치가 그 정도라고 여기는…….”
베오날드 또한 케드론과 함께 황족들이 오긴 했지만 황태자는 오지 않은 것을 보고 뵐른 가문의 취급과 정치적 계산에 대해 이야기하며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황자 일행 사이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와 베오날드 쪽으로 달려왔다.
“어이! 잠깐 기다려!”
‘…엑!’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잠시 멈춘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달려오는 5황자 에이오른과 그 뒤에서 휠체어를 끌고 다가오는 7황자 아쟉을 발견했다.
베오날드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황자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일단 멈춰서 같이 예를 갖추고 두 황자를 맞이했다.
“와! 진짜였네! 집사장이 한 말이 진짜였어! 이 시시한 파티에 그 결투의 영웅인! ‘베오날드’가 있을 줄이야!”
“저… 저… 사인 좀 해 주세요.”
‘아… 망할 그 집사장! 아주 2배로 엿을 먹이네!’
5황자와 7황자는 베오날드를 보고 마치 동경하던 스타를 만난 듯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고, 썩어도 황족이라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분들인데 거절을 못하니 더 난감한 베오날드였다.
“송구스럽습니다.”
“자자, 딱딱하게 굴지 말고, 대접할 테니 한잔하러 가자. 그때 결투! 정말 굉장했다고! 거기다 그 노친네가 똥 씹은 표정을 짓게 만든 건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하하하하!”
‘이거… 내가 황제를 엿 먹인 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나 보군.’
대충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의 논리 구조다.
이 곁다리 황자들은 평생 권력의 조율을 위해 황제의 엄격한 관리를 받아야 했을 거고, 거주의 이동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 속에서 황제에 대한 반발감이 쌓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 고통스러운 일상 속에서 나타난 존재인 베오날드.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 같은 그의 싸움도 흥미 있었지만, 무엇보다 황제에게 빅 엿을 먹인 결말이 그들에겐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굉장했다니까! 그 노친네, 얼굴이 새파래지고 식은땀 뻘뻘 흘리면서 쩔쩔매던 거랑! 똥 싸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거랑 등등! 하하하하하하하핫! 최고였어! 최고였다고!”
‘아… 황족 관객석에서 그걸 봤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이 둘 다 결투 때 황족들이 잔뜩 모여 있는 관객석에 앉아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튼 이 말에 호응하는 건 황실 모독으로, 저 뒤에 있는 황실 기사들에게 아주 민감한 주제였기에 그는 일단 주제 파악부터 했다.
“그…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안 되지 않을는지요. 게다가 저는 황제 폐하를 모독하고 싶어서 일을 저지른 게 아닌데…….”
“됐어. 어차피 이래 주는 게 그 노친네한테도 좋은 거야. 망나니 황자, 얼마나 좋아? 권력에 지장도 안 줘, 여차하면 버림패로 쓰기도 좋아. 그러니 난 미리 그 대가를 당겨 받는 거라고!”
‘…흠, 거칠어 보이지만 머리가 좀 돌아가는 친구군.’
5황자는 겉으론 가볍고 거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게 현명한 태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처지이고, 갑작스러운 사고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위치는 변할 수 없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한도 내에선 마음껏 즐기자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것도 나름 현명한 처세술로, 혹시나 주변의 권력 상황이나 암투가 진행되더라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
“저기… 저기… 사인 부탁합니다.”
“아, 물론 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근데 어디에다 해 드려야 할지…….”
“아무 데나… 괜찮아요. 그나저나… 정말 아까웠어요. 거, 검만 제대로 된 것이었으면 크멜 가문의 후계자를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예. 제가 생각해도 정말 아쉬웠습니다.”
5황자와 달리 7황자 쪽은 불안정한 혈통과 입장에서도 치열하게 싸워 올라온 베오날드를 순수하게 동경하는 쪽인 것 같았다.
7황자처럼 제대로 된 생활이나 활동을 할 수 없는 아이들 같은 경우 역경을 이겨 내는 영웅들을 좋아하는 성향이 많았는데, 그런 영웅은 대부분 동화나 설화, 소설에서나 존재하는 스타일이었고, 침상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은 7황자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다, 다음엔! 다음엔 꼭 이기길 바랄게요.”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전하.”
“자자! 아무튼 한잔하러 가세나! 아쟉도 널 마음에 들어 하니까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지! 우하하하핫!”
거리낌 없이 베오날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끌고 가려는 에이오른 5황자. 하지만 오늘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도 있고, 케드론을 보필해야 하기에 그는 즉시 거절했다.
“하지만 여긴 뵐른 후작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됐어. 그런 시시콜콜한 업무는 저기 유르실 형님이 해 주실 거야.”
“그리고 저도 엄연히 발데리안 가문의 보좌를 위해서 온 거라…….”
베오날드는 급히 케드론을 향해 구원 요청을 해 보았지만 그 또한 황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애초에 이 뵐른 가문에 온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도주하기 위해서 순순히 베오날드를 넘기기로 한 듯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자네는 황자 전하들을 보필하게. 나는 뵐른 후작님의 생신 축하를 해야 하니 말이지. 따로 돌아와도 되니 잘 모시게.”
“좋아, 허락도 받았으니 가지! 아쟉! 너도 가자!”
“예, 형님!”
‘갑작스러워서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좋은 흐름이군.’
겉으로는 곤란한 척을 했지만 사실 그리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곁다리라도 황족은 황족. 친해져서 손해 볼 구석은 전혀 없었다.
본인 자체는 쓸모없어도 달라붙은 황실 기사만 해도 이용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
하나 세상엔 오로지 긍정적인 감정만이 있는 게 아니다.
베오날드의 행적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대로 열등감이든 어떤 이유로든 싫어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 올 때, 베오날드는 그런 이들을 경계해서 나름 준비를 했지만 다행히 발데리안 가문의 배경 덕분에 해를 입지 않았는데, 황자들을 따라가는 그를 보며 아니꼬워하던 자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근본도 없는 놈이 명성 좀 얻었다고 황자님들과 어울리는 거 보세요.”
“정말 아니꼽기 짝이 없군요. 우리는 함부로 말도 못 거는 분들인데…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인 주제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니까요. 결국 저런 천한 놈이 황녀 전하께 껄떡댄 것뿐인데 말이죠.”
“정말 기가 막힐 수밖에 없네요. 어떻게 할 방안이 없을까요?”
베오날드의 행적은 깊게 보면 확실히 감동스러운 로맨스 스토리이지만, 얕게 보면 위에서 쑥덕거리는 귀족들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도 이 이야기를 깊게 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정통 귀족인 자신들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고 말도 못 거는 대귀족, 황제 폐하 앞에서도 당당한 그가 너무나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발데리안 가문을 끼고 있는 바람에… 어떻게 할 도리가 안 보이네요.”
“하지만 이대로 둘 수 없는 것도 사실 아니겠습니까? 저러다 갑자기 어느 날 더 높은 작위라든가, 어딘가 대귀족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면 우리가 평생 고개를 못 들 테니 말이죠.”
“아! 에스칼 경! 역시 크멜 가문에서도 가만히 볼 수 없나 보군요.”
열심히 구시렁대던 귀족들 사이에 끼는 한 미청년. 윤기 있는 갈색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고혹적인 눈매와 눈물점을 가진 이 남자는 에스칼 크멜, 로이드와 같은 크멜 가문의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의 이 남자는 검사와 기사가 대부분인 크멜 가문에서 귀족 가문으로서의 주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자로, 크멜 가문의 기사들을 호위로 대동하고 있었다.
“예. 결과는 좋게 끝났다곤 하지만 그놈 하나 때문에 우리 크멜 가문의 위상이 떨어진 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놈 하나에게서 일어난 충격의 5연패, 정말로 가슴이 아프고 쓰린 일이지요.”
“아! 그거 정말!”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이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군요. 아무튼 가만히 있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호호호, 역시 크멜 가문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면 크멜 가문의 위상을 떨칠 좋은 기회이기도 하죠. 후후후. 그러니 저는 일단은 놈에 대해 알아보러 가겠습니다. 그럼 좋은 파티 되시길~”
에스칼 크멜은 베오날드의 뒷담화를 나누던 귀족들과 웃으면서 헤어진 뒤, 베오날드 일행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창 5황자인 에이오른이 왁자지껄 떠들고 베오날드와 7황자가 맞장구쳐 주면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그것을 보며 그는 마치 좋은 사냥감이라도 발견한 양 두 눈에 야욕과 간사함을 가득 담은 채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