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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12화 (112/259)

[112화]

“자, 긴장 푸십시오. 저희가 할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공식적인 일은 이제 안에 들어가서 뵐른 후작의 생신을 축하하고, 선물을 드린 다음에 적당히 파티를 즐기다가 돌아오면 됩니다.”

권력 암투나 귀족 파벌 간의 거래, 협의 등등… 특별한 목적이 없는 단순한 친목 혹은 얼굴 비치기 레벨의 사교 파티라면 그렇게 긴장할 거 없고 할 일도 많이 없었다.

더구나 발데리안 가문이면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통일 제국 시절의 명문가이며 귀족 파벌의 거두(巨頭). 그 후계자인 케드론을 대놓고 적대하거나 해코지하려는 어설픈 놈은 없으며, 본래 가풍까지 소문이 나 있어서 다소의 실수도 그러려니 하고 무마할 수 있다.

“그러니 긴장 푸시지요. 선배… 아니, 도련님.”

“그… 그래, 그러지.”

‘이상하네. 이렇게 과하게 긴장할 이유가 없는데… 황녀와도 그냥 신경전을 해 버릴 정도로 강골이고, 실제 전쟁터까지 가서 칼밥 먹은 녀석인데 이해가 안 가네. 뵐른 가문에 뭔가 껄끄러운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쩔쩔맬 필요가 없었는데 그러고 있는 케드론이 이상했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단서가 없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 저택 입구에 도착해 뵐른 가문의 경비병들에게 신원 확인을 받고 입장한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파티가 열리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횃불과 촛불, 거기에 마련된 화려한 요리들과 술, 그리고 음악단의 연주와 몇몇 곳에선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서커스와 마술사들의 공연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본래 목적인 뵐른 후작의 생일 축하식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많은 귀족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500년이 지나도 여전하군. 아니, 베노피스에 하던 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파티 구색은 맞췄지.’

그의 기억에 남은 500년 전의 파티 광경과 대조해 보면 너무나 초라하지만, 그래도 이건 나름 후작가에서 진행하는 대귀족의 파티여서 규모와 화려함은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비교 대상인 베오날드의 파티가 오히려 정신 나갔다고 해야 할 만큼 대단한 거였다.

“이거 발데리안 가문에서 와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드론 경. 저는 집사장인 안톨이라고 합니다.”

“아, 아닐세. 초대해 주셔서 오히려 이쪽이 감사하지.”

그사이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저택 내로 향했고, 노령의 집사가 이들을 맞이하며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집사장이 온 걸로 봐서는 나름 발데리안 가문에게 대귀족급의 대접을 해 주는 거라 볼 수 있었다.

‘파벌이 서로 다른 귀족이지만… 그래도 적대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오히려 이 뵐른 후작가는 같은 파벌인 크멜 가문의 아래에서 짓눌리는 입장이었기에 역으로 발데리안 가문을 후대해 주면 나중에 좋을 거란 생각이 드는 베오날드였다.

일단 서로 벽을 칠 정도까지의 적대감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과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문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이득을 보는 것 모두 귀족가를 다스리면 저절로 배우게 되는 기본적인 공식이었다.

“한데 옆의 분은?”

“오늘 내 보좌를 맡은 베오날드라고 하네.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오! 그 크멜 가문의 후계자, 로이드 경과 백중세를 펼쳤던! 이 수도에서 저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거 예상을 능가하는 멋진 손님이 또 와 주셨군요. 허허, 저도 그때의 사투 지켜봤습니다, 베오날드 님.”

아무리 최근 명성을 떨쳤다곤 하지만 ‘보좌’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자신을 대할 때와 달리 너무나 화색을 띤 채 말하는 집사장의 태도에 케드론은 벌써부터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어느 귀족이라도 이 부분은 불쾌할 터였다.

그리고 보통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서 난감해해야 했지만 베오날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지. 그래, 암~ 이래야지.’

이건 자신을 우대한 것에 대한 즐거움이 아니었다.

바둑이나 장기에서 상대의 수(手)를 보고 하는 감탄 같은 것으로, 집사장의 수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이 집사장은 자신과 케드론을 이간질시키려고 일부러 자신을 과하게 우대하면서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이대로 케드론이 불쾌해하면서 작게라도 균열이 생기길 바라는 아주 작은 수(手). 사소하지만 좋은 것이었기에 베오날드는 즐거워하며 대응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기도 하고, 케드론 님을 보좌하기 위해서 왔으니 인사만 받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도련님.”

“…알았네.”

‘일단 가면 쓰는 법부터 가르쳐야 하나? 이 정도 수(手) 찌르기는 일상인데 말이지.’

케드론이 대놓고 기분 상한 표정이 된 것을 본 베오날드는 안쓰러워하면서도 그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생일 선물에 관해서는 이 정도 대귀족이면 일일이 받는 게 아니라, 이미 하인과 기사들을 통해 별도의 창구로 접수가 되고 있기에 그들은 파티와 축하 행사에만 참여하면 될 뿐이었다.

“아까 전 집사장의 행동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직접 몸으로 겪으셔서 알겠지만, 이 귀족들의 사교장은 이런 음흉한 수 싸움이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곳입니다. 아셨습니까? 도련님.”

“으으음… 이런 건 정말 체질에 맞지 않는군. 그보다 자네는…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군.”

“어중간한 혈통 덕에 눈치 챙기는 건 빨리 배워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 힘내십시오, 도련님. 우선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웃는 법부터 연습하십시오. 가면 쓰는 표정 연기는 당장은 무리일 테니 말이죠.”

“노, 노력은 해 보겠네.”

시작부터 사교계의 쓴맛을 본 케드론은 베오날드의 조언을 들으며 안면 근육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나 안에 들어가서는 미리 예상한 대로 이 뵐른 가문의 인맥에서는 발데리안 가문과는 딱히 엮일 것이 없고, 또 뭔가 권력 다툼이나 경계할 일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간단한 인사만 나누는 정도만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오히려… 제 쪽에 인사가 더 많았군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귀족가의 여성들은 물론 여러 가문의 귀족들이 같이 이야기하자면서 추파를 던지고 술자리에 초대한 것이 더 많았지만, 베오날드는 처신을 알기에 모두 거절했다.

“뭐, 최근 가장 화려하게 뜬 슈퍼스타이니 이해하네… 라고 하고 싶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와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군. 전쟁터는… 정말 속 편한데 말이지. 나도 가끔은 그냥 마음 편하게 집 안에서 하라는 대로 해 보고 싶긴 하네. 우리 가문 이미지도 이미 그렇고. 후우~”

“그런데도 귀족의 체면을 차리시려는 건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 비밀로 해 줄 수 있나?”

“어디 말할 곳도 없습니다.”

“…저쪽을 보게.”

조심스럽게 어딘가를 가리키는 케드론. 그곳엔 아직 자리에 없는 이 파티의 주인공인 뵐른 후작이 앉을 의자가 있었고, 살짝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엔 한창 대화를 나누는 중인 뵐른 후작가의 딸들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베오날드는 단번에 이 먼 후손 조카님이 왜 이러는지를 한 방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하! 그렇군.’

“…눈치챘나?”

“예. 별문제도 아니었군요.”

“별문제가 아니라니! 나에겐! …크흠!”

얼굴을 붉히면서 버럭 하는 케드론. 그 태도에 베오날드는 더더욱 확신하면서도 후손 조카의 귀여운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 이 귀여운 후손 조카님은 뵐른 후작가의 따님에게 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분입니까? 여러 명이 모여 있어서 잘 모르겠는데 말이죠.”

“말할 수… 없네.”

“이미 밝히신 거, 세세하게 알려 주시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더더욱 말해 줄 수 없네. 이건… 내 싸움이니 말이야. 크흠!”

‘…이건 자기 선조랑 꼭 닮았군. 케르웰, 미친개처럼 날뛰던 그놈이 반한 여자가 생겼다고 상담 좀 해 달라고 왔을 땐 많이 놀랐었으니 말이지.’

발데리안 가문의 시조이자 선조인 케르웰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베오날드는 케드론의 사랑앓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면서도 도울까, 말까 고민에 빠겼다.

순수한 사랑은 보기엔 훈훈했지만 그들의 신분은 모두 귀족. 더구나 케드론은 발데리안 가문의 차기 가주로 촉망받는 후계자였기 때문에 주판을 두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궁합은 상당히 나쁘지 않은걸? ‘멀리 있는 적과는 친하고, 가까운 적과 싸운다.’에 딱 맞아. 크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겠군. 거기에 뵐른 가문은 제국의 정통 가문이니까 정치적으로도 호흡이 잘 맞아. 본격적으로 혼약을 생각해도……!’

주판을 굴려 보니 썩 나쁘지 않은 혼약이라서 베오날드는 이 귀여운 후손 조카의 사랑을 위해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500년 전, 발데리안 가문의 선조인 케르웰의 혼약도 자신이 주선하고 진행해 주었기에 추억도 떠올리면서 그는 우물쭈물하며 멀리서 바라만 보는 케드론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움직이셔야지요.”

“아, 아니… 나는…….”

“사랑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입니다! 우선 정보 수집부터 해 나갑시다. 아, 부끄러우시면 제가 정보를 얻어서 돌아오지요.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이 부끄러움 많은 후손 조카가 나서지 않자, 베오날드는 기꺼이 사랑의 정찰병이 되고자 스스로 나서려고 했지만 케드론은 다급하게 그녀들에게 가는 베오날드를 붙잡았다.

“그건 안 돼!”

“왜 그러십니까? 일단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물론 저도 저 안에서 어느 분이 도련님이 연모하시는 분인지 알기 위해서…….”

“그러다 자네에게 반하면 어떻게 하나? 자네는 지금 수도의 슈퍼스타라는 걸 잊은 겐가?”

‘…난 지금 황녀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 같은 건데… 어떻게 갑자기 다른 연애담으로 넘어가?’

베오날드에겐 황당한 소리였지만 케드론으로선 혈통과 무력 빼고는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베오날드의 매력에 자신이 연모하는 뵐른 가문의 따님이 정말로 반할지 두려웠던 것이다.

“…에이, 뵐른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정통성이 깊다면 저 같은 잡종은 거들떠도 안 봅니다. 발데리안 가문 정도 되는 역사와 전통, 거기에 실제 세력이 있어야 혼약이 진행되는 거죠.”

“남녀 간의 연애는 다르지. 심지어 자네는 그 철벽같은 황녀도 꼬시지 않았는가?”

‘…꼬신 게 아니라, 그쪽에서 친근하게 대한 건데! 하긴 남녀가 찰싹 붙어 있으면 애라도 나올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게 현실이니…….’

그런 점 때문에 실제로 황제라든가 다른 이들이 난리 쳤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우려가 납득이 되기도 했다.

대신 후손 조카를 놀려 먹는 맛이 꽤나 좋았기에 그는 만족하면서 파티를 즐겁게 보내던 와중, 갑자기 저택 경비병이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티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알려 드립니다! 지금 대칼레움 제국의 황실에서 뵐른 후작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손님들이 도착했습니다! 곧 입장하실 테니 다들 예의를 갖출 준비를 하십시오!”

‘…아, 하긴 대귀족의 생일이니 황실에서도 와야겠지.’

귀빈 중의 귀빈이니만큼 이렇게 요란을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베오날드와 케드론도 얼른 움직여 황족을 맞이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잠시 뒤 마차를 호위하는 황실 기사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황족들이 행차하자 저택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일제히 그들의 입장을 다시금 외쳤다.

“칼레움 제국 제3황자! 유르실 칼레움 님이 납십니다!”

“칼레움 제국 제5황자! 에이오른 칼레움 님이 납십니다!”

“칼레움 제국 제7황자! 아쟉 칼레움 님이 납십니다!”

경비병들은 일일이 황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입장을 알렸다.

하나 황자들이라곤 하지만 전부 다 서른이 넘은 장성한 남성들로, 나온 배가 달라서인지 다들 형제라고 보기 힘든 외양과 개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과연 그 황제가 어떤 자식들을 키웠는지 보기 위해 슬쩍 그들을 보며 판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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