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렇게 합의한 뒤, 자세한 일정은 차후 전갈로 보내 준다고 한 발데리안 가주의 말을 듣고서 베오날드는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세인과 함께 곧장 돌아가려던 베오날드는 문득 너무 고생만 시켰다는 생각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공부도 공부였지만, 수도 외곽에 자리 잡은 저택의 철수 및 그녀에게 시킨 일이 근래에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바쁘게 다니는 동안 혼자 일해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나?”
“예?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수고가 더 힘든 법. 감시하는 눈이 없다고 해서 허술하게 일하고 책임을 방기하는 자들이 더 많다. 우리 상황이 특수하기도 하지만, 세인 너는 잠시 눈을 돌렸다고 해서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지.”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휘둘리기 마련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매우 적고 귀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인은 정말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고, 베오날드는 그녀의 가치를 알기에 이렇게 시간이 났을 때 보상과 환기를 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자, 아무튼 가능한 범위라면 웬만해선 들어줄 수 있으니 기탄없이 말해 보도록.”
“딱히 물질적인 것은 갖고 싶은 게 없습니다. 다만…….”
“다만?”
“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싶습니다. 베오날드 님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신분과 배경으로 정해지지만, 결국 그 사람이 가진 능력과 지식의 힘으로 그것을 바꾸거나 혹은 제약을 풀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요.”
메이드로서 무력하게 살았던 그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치우고 없애 버리는 베오날드의 힘과 지혜에 매료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귀족가의 사생아인 세인도 혈통이 불안정한 베오날드와 비슷한 처지. 물론 남성과 여성은 이 시대에 큰 격차가 있었지만, 이미 포기하고 순응해 버린 자신과 다르게 두려움을 이겨 내는 베오날드의 의지가 너무나 대단해 보인 것이었다.
‘…이것도 그 젤시처럼 내 전생 후의 나이대와 다른 행보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가?’
“저기… 제가 너무 주제넘은 부탁을 한 걸까요?”
“아니, 오히려 대견한 부탁에 감탄한 거다. 물질적 재산은 결국 힘이 없으면 빼앗기지만, 지식과 지혜는 머릿속에 들어 있기에 함부로 빼앗을 수 없지.”
“…보통은 거기선 ‘빼앗기지 않는다.’가 아닐는지요?”
“아니, 빼앗을 순 있다. 시간과 돈, 노력이 물질을 빼앗는 것에 비해서 너무나 오래 걸릴 뿐이지.”
‘그건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네! 아무리 자네라도 안 돼! 황실의 비전을 어찌… 어찌! 차라리 날 죽이고 쿠데타를 저지르게!’
과거에 자신이 통일 제국의 황제에게서 황실 비전의 마나 호흡법과 검술을 빼앗을 때 했던 노력과 저항하던 황제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 순간 그의 얼굴은 아주 잠깐이지만 통일 제국을 지배하던 시절의 지배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을 본 세인은 마치 괴물을 본 듯 안색이 파래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히익?”
“아무튼~ 네 의지는 알았다. 보다 진정한 가치에 눈뜬 자를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으음~ 그러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여느 귀족 가문에서도 쉽게 가르치지 않는 지식을 선사해 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베오날드의 장담에 세인은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건 늘 그렇듯, 이상은 높지만 실현해 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 만큼 베오날드는 각오를 다지라고 말해 주었다.
“물론 다만…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예!”
“그리고 시간이 남은 김에 들를 곳이 있으니 따라와라.”
곧이어 베오날드는 그녀를 데리고 잡화점에 들러 몇 가지 물건과 약초, 가벼운 옷가지를 사고는 갑자기 고급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즉시 가장 좋은 방을 결제해서는 세인을 데리고 올라가는데, 그녀는 시간이 남는다는 베오날드의 말과 잡화점에서 무언가 구매한 것을 보고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씻고 이걸로 갈아입어라.”
“예? 아! 예!”
설마 베오날드 쪽에서 이렇게 갑자기 요구할 거라는 걸 몰랐던 세인은 얼굴을 붉힌 채 곧바로 여관방 안에 있는 샤워실로 향했다.
고급 여관이라서 그런지 일반 여관이었으면 어림도 없을 따뜻한 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샤워 도구들도 다 좋은 물건이었다.
다만 이른 대낮에 갑자기 이런 요구를 받는 게 당혹스러운 그녀였지만, 그래도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괜찮아. 나는 이미 그분에게 모든 것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베오날드가 새로 준비한 옷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옷은 아주 편한 한 벌로 된 통옷으로, 벗으면 바로 알몸이 되는 물건.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녀는 수줍게 베오날드를 바라보는데, 그는 방 안에 있는 탁자에서 무언가 음료 같은 것을 제작하고 있었다.
‘어라?’
“나왔나? 자, 이거 마시고 침대에 누워서… 한숨 깊게 자라.”
“…예? 자라… 고요?”
“그래. 화장으로 감추려고 해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다크서클도 짙고, 걸음걸이도 중간중간 끊기는 게 피로 누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마음 놓고 오늘은 푹 자고, 내가 올 때까지 쉬고 있어라.”
엄연히 과거 통일 제국 황제의 주치의였던 베오날드다.
물론 연금술의 힘으로 생명을 지속시키는 야매 의사였지만,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맡으면서 의술 연구도 해 본 몸이기에 세인의 상태가 피로 누적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계까지 무리하다 쓰러지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거다. 자기 관리에 대해 토로할 수 없는 위치인 건 이해하지만, 쉴 수 있게 배려했을 때 거부하지 마라. 그러니~ 얌전히 약 먹고 푹 자거라.”
“저… 정말 감사합니다.”
자비로운 주인의 마음씨에 대한 감동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몰려온 세인은 결국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베오날드가 준 약을 받아먹고는 침대에 홀로 누웠다.
주인이 옆에 있는데 눕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 이상 베오날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저… 다른 일을 보셔도 됩니다, 베오날드 님.”
“잠들 때까지만 있을 거다. 눈 감고 쉬어라.”
“감사… 정말 감사합니다. 베오날드 님을 모셔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그래. 푹 쉬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함에 흘러내리는 세인의 눈물을 닦아 주며 베오날드는 그녀가 잠들기까지 기다려 줬고, 베오날드의 예상대로 상당히 피로한 상태였는지 그녀는 금방 잠이 들었다.
먹을 것과 식수가 있으니 깨어나도 괜찮을 거라 본 베오날드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방을 나와서 홀로 데런의 상회로 돌아왔다.
“어라? 세인 양은 어쩌고 혼자 오셨나요?”
도착하자 상회 입구에서 셀리나가 베오날드를 맞이해 주었다.
그녀는 풀밭의 나무 아래에서 마법서로 보이는 책을 한가롭게 읽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피로한 상태라서 여관에 재워 두고 왔다. 그보다 베시아는?”
“아… 전… 크흠! 그녀라면 지하에서 일하고 있을 거예요.”
“알았다.”
곧바로 베시아를 찾아서 지하로 내려가는 베오날드. 거기엔 현재 그의 창고를 치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지하에서 공사를 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자주 치우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몸에 해로웠기에 틈이 날 때마다 계속해서 치워 줘야만 했다.
베오날드는 그녀에게 가서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베시아, 용건이 있다.”
“예? 아, 무슨 일이신지요? 주인님.”
“이 제국 수도에서 유행하는 사교계의 패션과 문화를 비롯한 전반적인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다.”
예법은 그 시대에 딱 맞게 정해져 있지만, 사교계의 유행이란 돌고 돌기에 현상 파악을 위해선 가장 잘 알 법한 인물에게 묻는 게 최고였다.
발데리안 가문은 애초에 사교계와 거리가 멀었고, 그다음으로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역시 황제에 의해 사교계의 최전선에서 뛰면서 여러 귀족들을 유혹하고 판돈을 끌어 올리는 데 주력했던 젤시 황녀였던 것이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케드론 발데리안 선배님이 뵐른 후작의 생일잔치에 참석하는데, 저보고 보조하라더군요. 아시다시피 발데리안 가문은 그… 사교계와 거리가 원래 먼데, 케드론 선배님은 그런 가풍을 바꾸기 위해서 나서는 것 같습니다.”
“아~ 확실히 그 사람은 발데리안 가문이지만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딱딱하고 귀족스러웠죠.”
베시아, 아니 젤시도 맞장구칠 정도로 발데리안 가문의 평판이 어떤지 다시 한번 깨달은 베오날드가 감탄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곧장 속성으로 현재 귀족 사교계의 트렌드에 대해 알려 주기 시작했다.
역시 황제에 의해서 혼약 도구로 쓰였던 만큼 귀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수업을 배워서인지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뵐른 후작가라면 우선 영토는 크멜 공작의 남쪽 이웃이에요. 칼레움 제국의 건국 때는 제국 동부 전역을 다스리던 대귀족이었지만, 크멜 가문의 등장과 활약으로 많은 지분을 빼앗겼고, 사실상 반쯤 귀속되어 있는 상태죠.”
“사교계 트렌드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가문 분석이 나올 줄은 몰랐군요.”
“알고 있는 거니 말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 복장 유행은 역시 난세인 상황이라서 그런지 무(武)를 나타내는 장식 같은 게 유행이에요. 순수 무가(武家)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가문 문장이 있으니 문제없고, 본가가 아닐 경우는 수련을 받은 증거라든가, 황실에서 전쟁 때 받은 훈장이라든가, 그런 게 없으면 이제…….”
역시 교육은 전문가에게 받는 게 제일이라는 말이 있듯, 젤시는 아주 심도 깊은 사교계 트렌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사사하기 시작했고, 베오날드는 그것을 들으며 자신에게 마련된 이 새로운 전장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된 사교계에… 진출하는 건 참 오랜만이군.’
젤커드 자작가에서 파티를 하긴 했지만 그건 사교 파티라기보다는 그저 승전 축제 같은 것이어서 전혀 경계할 부분이 없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규모의 사교 파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베오날드는 500년 뒤의 사교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내심 기대하며 할 일을 해 나갔다.
***
2주일 뒤, 뵐른 후작가 수도 저택.
크멜 가문에게 밀려서 세력이 줄었다곤 해도 후작가라는 이름은 죽지 않은 건지 수도에 상당히 큰 대저택을 가지고 있는 뵐른 후작가였다.
아마 이 가문의 전성기에 마련한 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베오날드는 홀로 케드론 발데리안을 비롯한 발데리안 가문 일행에 합류해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수도 대귀족의 파티는 규모부터가 다르군요. 음? 선배님?”
“후우… 후우… 후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케드론 발데리안은 검은색 기반에 빛을 비추면 은은한 적색이 나타나는 정장에 가문의 문양과 기사의 문장과 전투에 참여했던 훈장이 빛나고 있는 멋진 모습이었지만, 본격적인 사교계 투입이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긴장한 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 안에서도 안 하던 짓을 하려니 탈이 나는 거지. 에휴~’
그 옆에 있는 베오날드는 그를 보좌하기 위해 일부러 검은색 바탕에 훈장이나 엠블럼 하나 없는 수수한 차림이었는데, 긴장한 케드론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조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