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그리고 자신의 딸이 지금 자신이 있는 제국 수도에서 노예로 위장해서 메이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황제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바니로 백작의 항의문을 보면서 두통을 앓고 있었다.
“아니, 대체… 대체 그 아이가 어떻게 사라진 거지? 게다가 누가 그 아이랑 사전에 모의를 한 거란 말이냐?”
“나름 검술과 오러를 익히셨으니 야생에서 활동하는 건 문제없을 거고… 모의에 대해서는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감시하던 첩보부의 보고서 및 황궁 내에서 일하던 메이드 및 하인들에게 전부 조사하고 있습니다.”
“바니로 백작 측은 어떤가?”
“아주… 노발대발 난리가 났습니다. 신부 돌려내라면서 당장이라도 수도로 뛰어올 기세입니다. 아직 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하아~”
보고하는 신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고, 황제도 두통이 더 심해지는지 지끈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바니로 백작. 돼지 목에 진주라고, 그 영지의 규모와 귀족의 자리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자였지만 적법한 혈통의 승계자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선대부터 함께해 온 가신들과 잘 닦아 놓은 기반 덕분에 지금까지 어떻게든 운영을 해 나가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심지어 전쟁! 전쟁을 한다고 난리 부리는 걸… 바니로 백작가의 가신들과 기사들이 간신히 말렸을 정도입니다.”
“그 머저리를 주군으로 섬기는 자들이 불쌍할 지경이군.”
“폐하, 이대로 수색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도 모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후우~ 알았네. 일단 계속 찾아보도록 하게. 또 연락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오고.”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일단 그를 내보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일이 틀어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구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와중, 누군가가 들어온 건지 집무실을 지키는 황실 기사가 신원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여신교의 대주교! 안세레아입니다, 황제 폐하!”
“들어오라고 하라!”
뭐라도 해야 했기에 그는 곧바로 대주교의 입장을 허락했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거기엔 황제보다 더 늙어 보이는 백발이 무성하고 허리가 굽은 노인, 대주교 안세레아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들어오고 있었다.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인물로 80세까지 수도의 신전에서 살아온 광신의 괴물이었다.
“허허, 이 늙은 신의 종, 안세레아가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잘 왔네. 상황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 도움을 받고 싶네. 대신관이 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허허허, 대신관님께선 지금 성국(聖國)의 대회의에 가 계십니다. 아무튼 도움이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성기사단을 동원할까요? 아니면 각 지역 신전에 있는 연락망을 사용할까요?”
“‘기적’의 도움이 필요하네.”
“허허허.”
‘기적’. 불경한 자들은 그것을 마법과 비슷하다고 ‘신성 마법’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여신교에서는 엄연히 여신이 내려 주는 권능이라고 생각하기에 ‘기적’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 힘은 단순히 상처나 병을 고치는 것도 있지만, 좀 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신의 사랑을 받는 종에겐 더욱 특수한 ‘기적’이 허락되곤 한다.
“폐하, 이 신의 종이 잠깐 조언을 드려도 될는지요?”
“말하게.”
“‘기적’이라는 것은 엄연히 신의 은혜이며, 그것을 부여받은 자들은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따님인 황녀 전하를 잃어버린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황제 폐하, ‘기적’은 간편히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운명에 간섭하는 일이죠.”
좋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이 대주교 안세레아가 하는 말의 의미는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대가를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인자한 성직자의 얼굴로 내뱉는 속 뒤집어지는 소리에 역겨움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일상과 같은 일이었기에 황제는 일단 참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하나 묻지. ‘기적’을 사용하면 젤시를 찾을 수 있나?”
“제가 여신께 부여받은 ‘기적’을 사용한다면 찾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 불확실하군.”
“그야 도망친 젤시 황녀님에겐 여러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무사하시면 가장 좋지만, 죽거나 혹은 여신님의 가호가 미치지 않는 곳에 계실 가능성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적’을 사용한다고 해도 찾을 수 없지요. 크흠! 이거 제가 너무 무례한 소리를 해 버렸군요.”
“끄으으응…….”
“진실이란 때론 가혹한 것입니다, 폐하. ‘기적’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런 것을 모두 감안하시고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가까지 지불해 가며?”
언뜻 냉정하게 들리는 대주교의 말이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저 신관들이 가진 ‘기적’이라는 것을 사용하려면 만만치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만약 그랬다가 젤시의 상태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결국 ‘대가’만 지불하고 끝나는 것이었다.
이미 잃은 것이 많은 황제는 결국 ‘기적’의 사용을 포기하기로 한다.
“허허허, 그러시군요. 안타깝습니다, 폐하. 성전(聖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가’란 이들 교단이 성전(聖戰)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나 확실히 찾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모를까?
불확실한 ‘기적’에 엄청난 국고와 자원을 소모하기엔 그의 ‘이성’은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 다 봤으니 나가게나.”
“예. 그럼 이 늙은 신의 종은 물러가겠습니다. 허허허.”
인자하게 웃으면서 물러나는 대주교의 태도가 심기를 건드렸지만, 교단이 지배하는 성국(聖國)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기에 황제는 가까스로 화를 참아 냈다.
결국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바니로 백작에게 손녀들 중 하나를 내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딸들을 설득할 생각에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
며칠 뒤, 발데리안 가문 저택.
체육제가 끝나고 난 뒤 아카데미의 일정은 기말고사와 그다음엔 여름 방학 시즌이 시작된다.
아직도 요양을 핑계로 베오날드는 골동품의 감정과 연구실 공사로 바쁜 와중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발데리안 가문에서 호출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저택으로 얼굴을 비치러 가야만 했다.
베시아의 안전 문제에 대처를 해야 하기에 하이디와 셀리나는 두고, 오늘은 세인하고만 단둘이 조용히 움직였다.
“왔나? 몸은 좋아 보이는군. 뻔뻔스럽게 밖에는 중태라서 두문불출이라고 해 놓고는 뭘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게냐?”
“저 같은 반푼이는 여기저기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세인, 그것을…….”
베오날드가 지시하자 세인은 들고 있던 고급 옷감으로 포장된 상자를 발데리안 가주에게 넘겼다.
그는 그 상자를 받으면서 의아해하는 동시에 베오날드에게 물었다.
“뭐지?”
“할 일에서 얻은 성과이자 선물입니다. 열어 보십시오.”
“훗, 나는 상관없지만, 다른 놈에겐 예의 차린다고 그래 봐야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이면 오히려… 호오? 이건?”
근엄하게 조언을 하려던 발데리안 가주는 상자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안에는 금으로 세공이 된 작은 담뱃갑이 있었다.
화려한 문양과 장식이 가주의 눈을 만족시키는 가운데, 그의 코가 그 안에 있는 것을 감지해 냈다.
“안에… 안에 담배가 있군. 하나… 이 향기는 많이 낯설군.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기야. 하지만 결코 싸구려는 아니군. 대체 이건…….”
애연가인 그는 담배의 향기만으로도 안에 든 물건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더욱 진한 향기와 함께 곱게 정렬이 된 시가 10개비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먼 옛날, 통일 제국 시절의 담배입니다.”
“호? 이걸 어떻게? 아니… 통일 제국 시절 물건이라면 멀쩡할 수 있나?”
“한번 피워 보시면 알 겁니다.”
“흐음, 어디…….”
통일 제국 시절의 물건이라는 것에 대한 진위 여부는 잘 모르나 발데리안 가주는 처음 맡아 보는 이 그윽한 향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한 개비를 들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런 다음 천천히 빨아들이면서 맛을 보는데, 한 모금 빨아들이고 연기를 뱉은 그는 자신의 무릎을 소리가 날 정도로 딱! 치면서 감탄했다.
“이거 정말 기가 막히는군. 오오오… 내 유일한 취미이자 낙이 이건데, 생전에 이런 담배 맛은 처음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크하하하하핫! 스으으으읍… 하아~ 오오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는 담배의 맛에 감탄하고 있었다.
새로운 맛에 대한 충격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피워 온 그 어떤 담배보다도 고급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깊이가 있었다.
발데리안 가주가 좋아하는 모습에 베오날드는 미소를 지으면서 담배의 출처를 설명해 주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 담배는 골동품 항아리를 깨뜨리자 그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안에 양피지로 한 번 싸고, 그다음에 기름 먹은 종이로 싼 뒤에 항아리 바닥에 놓은 다음 진흙을 덮고 굳혔더군요. 그 덕분에 오래 지나도 보존 상태가 좋았던 겁니다.”
“기가 막힌 방법으로 보관했군.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보관했을까?”
“밀수 같은 걸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밀수인데 양이 적은 건… 사실 발견했을 땐 거의 40개비 정도가 있었습니다. 보관이 그렇게 되어도 조금 썩어서… 살아남은 건 안쪽의 그 10개비뿐이었죠. 아무튼 덕분에 이렇게 제가 발견했고, 가주님께서 맛을 보시게 됐으니 좋은 일이 아닐는지요.”
“하하핫! 그래! 그게 중요하지. 히야아~ 하지만 정말 아쉬워. 고작 10개비… 아니, 9개비군. 이제… 정말 중요할 때만 피워야겠군.”
“운이 좋다면 더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반드시 가져와라. 내 값은 잘 쳐주지. 스으읍… 후우~ 하~ 정말 기가 막히는군.”
그의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시대와 역사가 지나도 귀족 사회는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500년이 지나도 명품, 술, 담배, 보물… 인간의 탐욕과 쾌락을 자극하는 물건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게 500년 전의 담배를 거의 끝까지 다 탈 때까지 한껏 즐긴 발데리안 가주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를 부른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좋은 선물 고맙네! 하하핫!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 아무튼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뵐른 후작의 생일에 초대를 받았는데 우리 케드론 녀석이 본격적으로 귀족 사회에 데뷔하려고 하더군. 나중에… 아카데미 졸업하고 하든가,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고 하든가… 씁.”
“아…….”
“하나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허례허식 같은 것에 영 껄끄러워서 말이지. 그래도 칼밥 먹은 실력 덕에 다른 귀족들이 덜 구시렁거리고, 또… 자네라면 이해하지 않나? 말이 생일 파티이지, 사교계는 또 다른 전쟁터라는 걸 말이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이나 생산력, 인구수가 받쳐 주지 않는 이상 결국 같은 나라 안에 있는 다른 귀족들과의 협력, 무역은 필수불가결이다. 사교계는 그런 협력과 파벌을 가르고 협박, 혼약 등등… 다양한 수단으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또 다른 전쟁터이기도 했다.
그런 곳을 사전 준비도 없이 무모하게 들어가는 건 맨몸으로 전쟁터에 참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 녀석을 도와주게. 사소한 시비가 걸린다든가, 웃음거리가 된다든가 하면 곤란하니 말이야. 아니면 이번에 더 큰 명성을 얻은 자네가 주의를 끌어서 그 녀석이 편하게 사교계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줘도 괜찮고. 어떤가?”
“물론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그리고 베오날드에겐 과거 500년 전부터 이쪽 전쟁터가 주요 활동 지역이었고, 귀여운(?) 조카의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기에 당연히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