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리고 황녀 젤시, 이젠 베시아라는 이름의 노예로 완전히 위장을 끝낸 그 시각.
황실 기사단과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어 꾸려진 수색대는 미친 듯이 조사하고 다녔지만, 황녀가 사라진 그곳 근처에서 더 이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법사와 첩보부, 황실 기사단 본대가 왔을 땐 이미 바니로 백작가 사람들과 같이 있던 황실 기사들이 제멋대로 수색하다가 현장을 엉망으로 만든 뒤였기에 수색이 더더욱 힘들어졌다.
유일한 단서라면 현장에서 빛을 내뿜었던 마도구로 보이는 상자뿐이었고, 황실에서 자문역과 연구를 맡은 6, 7급 마법사들이 분석해 보았지만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이건 통일 제국 시대의 마도구로 추측됩니다. 이 ‘술식’의 세공 방식이 그 시대에 나온 마도구들과 유사하군요. 술식은… 빛을 내는 라이트 주문과 증폭의 술식… 그리고 다른 술식도 새겨져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술식도 과거의 것이라 가지고 가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언어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듯,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술식과 언어도 조금씩 변형이 되거나 개선이 되곤 한다.
단, 오래 사는 엘프나 드워프 같은 장생종이 사용하는 술식은 시간이 지나도 큰 변화가 없지만, 문제는 그들은 너무 보수적이라서 주문이나 마법의 개선이 거의 없고, 인간이 따라 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소속이나 누가 소유한 건지는 전혀 모르겠습니까?”
하나 황실 기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시시콜콜한 사실들이 아니었다.
이게 누구에게서 나오고 누가 사용했는지를 알고 싶은 거였는데, 전혀 단서가 없는 대답에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통일 제국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밖에……. 다만 사용법을 알고 있는 자가 이것을 다루었을 테니, 마법사 혹은 그에 준하는 마도적 지식을 가진 자라고밖에 할 수 없겠군요. 하나 이걸 설치해서 시선을 끌 생각을 한 걸 보면 아마… 처음부터 황녀 전하를 빼내는 데 도움을 준 협력자가 있는 걸로 보입니다.”
“협력자라고? 아니, 대체 황녀 전하가 어떻게 협력자를 만든 거지?”
“글쎄요. 어쩌면 바니로 백작가와 황실이 손잡는 것을 싫어하는 자가 꾸민 일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내부에서는 황녀 전하의 결혼 소식이 전혀 새질 않았네.”
“그러나 수도에서 나가는 마차를 본 평민들은 많습니다. 더구나 황실 기사가 여섯이나 나갈 일은 그리 흔치 않지요. 현재 국경에서 딱히 분쟁도 없고, 제국 아카데미에서 행사 중인 상황인데… 바니로 백작가 사람들과 함께 나간다는 걸 본다면?”
“으으음…….”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서로가 서로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첩자나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사소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 슬럼가에 거주하는 도적 길드에 몰래 의뢰를 하거나 시녀나 하인들에게 돈을 줘서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정보를 통제한다고 해도 결국 새는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후우~ 돌아가면… 목을 내놔야겠군. 하아아아~”
결국 이 호위대의 대장을 맡았던 황실 기사는 막막한 기분과 함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사실 한 명, 한 명이 엄격하게 심사해서 뽑고 단련시키는 황실 기사이기에 이 실수로 죽임을 당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젠 주요 임무에서 배제되고, 위험하고 험한 임무로 투입하거나 혹은 첩보부로 소속을 옮겨서 더러운 임무를 맡게 될 터였다.
아무튼 이제 더 이상 명예와 영광의 길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주변 영지에 연락과 국경 봉쇄 등등… 다양한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 결국 찾지 못하면 황제 폐하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할 거라 생각한 그는 다시 일어나서 어떻게든 황녀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
제국 수도, 상회 지하 연구실.
그렇게 황제와 기사단, 마법사, 첩보부가 총동원되어서 열심히 찾는 황녀는 현재 수도 지하에서 노예 생활 중이었다.
예법과 황실, 귀족의 법도에 익숙한 그녀는 메이드가 되기에 더없이 적합한 인재였기에 세인의 지도 아래 메이드로서 일을 배워 나갔다.
주로 하는 일은 베오날드와 하이디, 셀리나의 시중 및 그가 분류하고 감정한 물건을 운반하거나 포장하는 일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체력이 좋으시네요, 베시아 양. 물론 베오날드 님이 데려온 사람이니 못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요.”
“아, 예. 감사합니다.”
“게다가 혼자서 일하긴 외롭고 힘들기도 해서…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때까지 말은 안 했지만 세인 혼자서 베오날드, 하이디, 셀리나의 시중을 모두 드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시중, 청소, 식사, 세탁까지 맡는 건 물론 개인 공부까지. 솔직한 말로 힘들지 않다곤 할 수 없었는데, 아주 적절하게 인원을 붙여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만 매우 특이한 점은 아무리 후임 메이드라곤 해도 황녀인 그녀를 너무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베오날드가 일부러 그녀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 주면 분명 신경 쓰느라 제대로 일을 가르치지 못할 게 뻔하다. 아무리 베시아 네가 괜찮다고 해도… 밑의 사람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그러니 감추는 게 상책이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고 말이다.’
황녀라는 걸 알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걸 생각해서 내린 베오날드의 조치였다.
세인이 먼저 알아보면 또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베시아가 젤시 황녀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알아채고도 숨기는 건가 싶어서 몇 마디 떠보긴 했지만, 정말로 그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떻게 저를 몰라보는 걸까요? 몇 번 본 것 같은데…….’
‘그야 그녀는 메이드 생활이 길었거든. 그것도 전 주인은 아주 강압적이고, 무섭고, 폭력을 쓰는 인간이었지. 그래서 높으신 분을 대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어째서 그런 게…….’
‘신분이 낮은 이들이 사는 방법을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아무튼 이참에 세상 공부를 실컷 하도록 해라.’
그래서 몰락 귀족 출신 노예로 완벽하게 신분 세탁을 해낸 그녀는 세인의 지시를 받으면서 고된 노동을 하는 중이었다.
보통은 서툴러서 잘 따라가지 못하고 일에 방해가 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좋은 두뇌를 가진 데다 오러를 단련한 덕분에 신체 능력도 좋아서인지 세인의 지시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피부가 너무 곱고 해서 처음엔 일을 잘 못할까 걱정했는데… 하긴 베오날드 님이 웬만한 사람을 데려왔을 리가 없죠.’
‘이게… 내가 모르던 아랫사람들의 일상.’
반대로 베시아, 아니 젤시 황녀는 고된 노동과 수많은 업무 속에서 평민과 그 아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편하게 갈아입는 옷, 식사, 무엇 하나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과 수고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체험하며 땀 흘리고 살을 태우면서 부단히 노력해 나갔다.
“휴우~”
“노동을 해 보시니 어떻습니까? 전하.”
세탁한 빨래들을 가지고 와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리는데, 지하에서 각종 골동품 감정을 하던 베오날드가 어느새 나타나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대놓고 ‘전하’라고 부르는 말에 깜짝 놀란 베시아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허둥대었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아, 괜찮습니다. 누구도 상상 못할 거거든요. 멀리서 봐도 그냥 제가 추근거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하핫.”
능글맞은 베오날드의 태도. 겉으론 곤란한 척을 해도 베시아는 그런 그의 태도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서로 편하게 대해 줄 수 있는 인간관계를 그녀는 소망해 왔던 것이니 지금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빨래를 널면서 이번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힘들긴 하지만… 마음이 편하네요. 후우~ 아무도 절 신경 안 쓴다는 게 이렇게 평온할 줄이야.”
“편해요? 하하, 노예 신분이고 시종이라서 강제되는 일이 많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황녀의 삶이 어떤 건지 알면 그런 소리를 못할걸요?”
“그거 압니다.”
“안다고요?”
당당하게 긍정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베시아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베오날드의 입에선 직접 본 것처럼 그녀가 당했던 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부터 운동 시간, 식사하고 밥 먹는 양을 모두 체크하고 성적과 검술 실력 관리 등등, 감시자가 2~3명씩 붙는 건 기본이고, 아마 신체 사이즈는 주간 혹은 일간 단위로 관리해서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했지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황실 내의 일이 소문으로 퍼진 건가?”
‘어떻게 알긴……. 그런 놈이랑 살아 봤으니 비슷하게 견적이 나오는 거지. 게다가 전에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눈치 봐야 했던 것도 보면… 더 확실하고 말이야.’
과거의 사건도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자신의 부친, 벨릭스에게 지독하게 ‘후계자 수업’을 당했던 자였다.
그나마 경쟁자가 많았을 때는 덜했는데, 경쟁자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면 나갈수록 후계자에 대한 윤곽을 잡기 위해 베오날드를 비롯한 후계자들을 철저하고 지독하게 관리했었다.
“아무튼… 자유를 누리고 지금 생활에 만족하시는 건 알겠지만,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없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아직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하는 이미 한 번 인생의 변화를 크게 겪었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안 되었을 땐 결국 남의 손에 휘둘려야 한다는 걸 겪었죠. 나중에 또 한 번 상황이 변했을 때, 그때도 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
“그러니 검술이면 검술, 지식이면 지식, 일상의 기술 모두… 익히려고 하십시오.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시면 안 됩니다. 기밀성을 요구한다면 제 연구실을 써도 됩니다.”
데런이 여기 있었다면 ‘거긴 제 창고입니다!’라며 반박했겠지만, 이미 베오날드는 자신의 연구실로 인식하고 있는 웃픈 상황이었다.
아무튼 시간을 확인한 베오날드는 슬슬 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마지막 조언을 해 주었다.
“저는 그럼 다시 감정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 혹시나 다른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다면 곧바로 제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무리 머리카락 색을 바꾸고, 대강 얼굴을 가렸어도 미모는 여전해서 껄떡대는 놈들이 꼭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특히 변명할 때는 몸과 마음을 이미 저에게 바쳤다는 거짓말을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명분이 살거든요. 명분만 확실하면 이제 두 번 다시 반항 못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다면 할게요.”
“아니면 실제로 바치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그 재능과 능력, 미모 모두 제게 맡기면 잘 써 드릴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마지막으로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건넨 베오날드는 즉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상황은 당분간 문제없을 거라 생각하며 지하 연구실로 내려갔다.
그냥 창고였던 곳이 이젠 꽤나 연구실의 자태가 살아났지만, 구석의 벽이 무너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아예 눌러앉을 생각이라서 여러 공사와 개조 중인 상황으로 공기의 순환을 더 잘되게 하고, 내부에서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실험과 세척 문제 등등… 물과 환기는 필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야 저 물건들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으니 말이야.’
연구실 안에 쌓여 있는 골동품들을 보며 베오날드는 한시라도 빨리 공사를 끝내고자 가죽 장갑을 끼고 직접 망치와 곡괭이를 잡고서 오러를 담아서 휘둘렀다.
전생에 대귀족이었지만 그는 엄연히 ‘노이멀 영지’를 버리고 ‘베노피스’라는 새로운 터전을 직접 만들고, 각종 연구 시설 설계 및 공사를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새롭게 의뢰하거나 돈 쓸 필요 없이 빠르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