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그… 너무… 생각이 없었죠?"
"아뇨. 어차피 사람은 늘 생각이 바뀌는 생물입니다. 내일은 빵을 먹자고 오늘 생각해도, 막상 내일이 되면 또 생각이 바뀌는 게 사람입니다. 더구나 황녀 전하께서는 여태껏 강요된 레일만 타면 되는 생활을 했는데… 이미 계획이 생길 정도면 진작 도망치셨을 겁니다."
"아……."
"보통 세상이라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행운아이십니다. 바로 저 베오날드를 만났으니 말이죠. 타인을 이용하고 더럽히려는 자들로 넘쳐 나는 판국에 저 같은 안내자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언뜻 들으면 자화자찬 같지만 젤시 황녀 본인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베오날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히 누가 황녀를 위해 제국의 황제에게 대항하고, 계략을 짜겠는가?
그리고 확보한 시점에서도 이렇게 그녀를 존중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까지 해 준다.
"자, 그럼 우선 선택지를 봅시다. 일단 두 가지겠지요. 이대로 계속 포기할 때까지 도망을 칠지, 아니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내고 얌전히 돌아가서 다시 혼인을 하러 갈지. 자~ 선택은?"
"돌아갈 거였으면 애초부터 도망치지도 않았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자유인 생활을 계속하시겠다는 거군요. 하지만 그것도 쉬운 길이 아닙니다. 황녀라는 배경을 버리고 출신지가 불분명한 무연고 여성으로 살아가기엔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전 당신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거군요."
"틀린 건 아니지만, 마치 제가 협박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사실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통해서 정리하는 이유는 나중에 혹은 힘든 어느 순간에 후회가 몰려올 때의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그러니까 책임 회피의 소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뭘 원하시나요? 제 몸? 아니면 황실이나 황족의 약점? 혹은 황궁의 구조나 정보?"
얼마 가진 것이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베오날드에게 그것들을 제시하며 물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을 한 채로 그녀에게 답했다.
"조금 구미가 당기지만, 전혀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걸 원해서 한 일도 아닙니다.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해서 저지른 것이지요."
"자기만족?"
"예. 그러니 얌전히 제 지시를 듣고, 따라다니시면서 세상 물정을 파악하고 필요한 지식을 얻으신 그때, 뭘 하든 마음대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이견 있습니까?"
"아뇨. 근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도 되나요? 그럼 앞에서 마치 무슨 선택을 시킬 것같이 했던 대화는 대체……."
"그냥 절차상, 배려상 확인입니다. 왜냐면 이제부터 ‘황녀 전하’에게는 할 수 없는 몹쓸 짓과 행동들을 잔뜩 할 거거든요."
"모, 몹쓸 짓?"
몹쓸 짓이라는 단어에 순간 몸을 떨면서 움츠러드는 젤시 황녀. 잔뜩 오해를 한 것 같은 그녀의 행동에 베오날드는 한시라도 빨리 정정하기 위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움츠러든 그녀는 살짝 겁을 먹는데, 베오날드가 내민 것은 알 수 없는 흑갈색의 액체가 든 병이었다.
"염색약입니다. 일단 그 휘황찬란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서 눈에 확! 띄는 머리카락부터 바꿀 겁니다."
"아… 그거였나요? 힉!"
차갑고 끈적한 염색약의 느낌이 젤시 황녀의 머리에 전해졌다. 베오날드는 가차 없이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염색약이 머리카락에 골고루 발라지도록 마사지를 하는데, 평소 메이드들에게 관리받던 그녀도 낯선 남자의 손가락이 거칠게 두피를 만지는 자극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했다.
"으윽… 저기, 조금만 살살……."
"아쉽게도 제가 미용 기술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말이죠. 조금만 참으시죠. 저는 미리 무례한 짓이라고 했습니다."
"흣! 으읍……."
그저 머리카락 염색을 하는 일이지만 뭔가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셀리나는 혐오스러운 걸 보는 표정, 하이디는 얼굴을 살짝 가리며 두근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손가락을 놀리며 세세하게 머리카락의 염색을 해냈다.
뭔가 뜨뜻미지근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되어 가는 가운데, 어느샌가 황녀의 염색이 끝났다.
"한 15분 정도 기다렸다가 이제 그 옷 갈아입으시고, 냇가에 가서 머리 한 번 감으시길 바랍니다. 여기 비누입니다."
"아… 예. 그런데 손은……."
"저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베오날드의 손도 염색약에 물들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다른 약을 꺼내 자신의 손에 뿌려서 세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은발이 진한 갈색 머리칼로 변한 젤시 황녀의 인상은 확 달라져 있었다.
다만 여전히 또렷한 눈동자라든가, 평민 같지 않은 피부는 여전히 위화감을 주고 있어서 더 위장이 필요해 보였다.
"으음… 위장엔 역시 이거지. 셀리나, 혹시 노예 문장 새길 줄 아나?"
"정신 나갔어요?"
"난 하려면 확실히 하는 남자다. 이 곱디고운 피부의 관리 상태를 봐라. 야숙을 했는데도 이 정도다. 이걸 누가 평민으로 알겠냐? 고위 귀족도 웬만해선 이런 상태가 안 나온다. 이 정도면 완전히 공예품 레벨이다. 위장하려면 결국 노예가 가장 합리적이지. 그래서, 가능하냐?"
"가능은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그… 마법으로 새기는 것도 지지는 것보단 덜하지만 만만치 않게 아프고, 지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셀리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젤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스스로 뛰쳐나왔다곤 하지만 황녀 전하이고, 같은 여성인 것이다. 위장이지만 남의 몸에 노예 문장 같은 걸 새기고 싶진 않았다.
흉도 흉이지만 나중에 지울 때도 엄청 고생할 텐데, 난감한 얼굴을 한 그녀였다.
"그… 마법 술식을 새기는 방식이 아닌 건가? 인챈트처럼 말이지. 손을 올리면 은은하게 표시되는 그거 없나? 술식 해제하면 사라지는 그거……."
"어디서 무슨 이상한 기록을 보신 건지 몰라도… 저는 그게 불가능해요. 전공도 아니고 말이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후우~’
또다시 500년의 격차를 느끼며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위장하기 위해선 결국 진짜 인두를 대거나 아니면 다른 방안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500년간… 세상 꼴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노예 관리를 위한 마법은 상당히 실용적인 거라서 남아 있을 줄 알았건만… 쩝, 어쩔 수 없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 아니, 엄청 기분 나쁜 방법일 겁니다만, 안전하게 가려면 이 방법뿐이니 참아 주실 수 있을는지요."
진지한 베오날드의 말에 젤시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것을 확인한 뒤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들키지 않고 그녀를 안전하게 운반할 방법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
이틀 뒤, 제국 수도 입구.
아직도 젤시 황녀의 행방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국 수도는 그나마 단속이 그리 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황녀의 실종 소식을 최대한 비밀로 하고 있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도망친 황녀가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많은 수도로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대로 수색을 하는 그들의 앞에 낯선 마차가 하나 등장하자 성문 경비가 급히 다가갔다.
"정지.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마탑의 마법사분의 의뢰입니다. 이분이 그 마법사님이죠."
마부로 위장한 베오날드는 마찬가지로 염색약을 써서 머리색을 바꾸고, 얼굴에 가죽을 덧써서 원래보다 나이도 훨씬 들어 보였다.
그의 말에 마부석 옆에 앉은 셀리나는 빠르게 증명하기 위해 가볍게 지팡이를 들어 올려서 마법으로 불꽃을 생성해 보여 주었다.
마법사라는 것을 확인한 경비병은 놀란 눈을 하면서 추가적인 질문을 해 왔다.
"마차를 보니 뒤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뭡니까?"
"저희 짐이랑 그리고… 시체가 하나 있습니다."
"예? 시체요?"
"예, 그… 일종의 실험을 하다가 죽은 건데, 이게 다른 마법사분이 한 걸 저희가 몰래 뒤처리하는 거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예, 예."
"잠깐 기다리게."
마부의 말에 경비병은 손사래를 치면서 물러나려고 하는데, 낯선 마차를 수상하게 여긴 성문을 지키는 기사가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낯선 마차를 제대로 수색도 안 하고 보내는 게 뭔가 찜찜했던 것이다.
베오날드는 망토에 갑옷을 걸친 기사를 보자마자 즉시 말에서 내려서 굽실거렸다.
"시체라고 했나? 그렇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네. 무슨 병이나 질환을 옮길지도 모르고, 또 시체라고 속이고 수상한 자를 들일 수 있으니 말이야. 마법사님에게도 미안하지만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다만 절대로… 본 것을 누설하면 안 됩니다, 기사님."
"예.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요. 따라오게."
기사는 마부로 위장한 베오날드를 데리고 마차 짐칸으로 향했고, 베오날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짐칸에 있는 관 쪽으로 올라가서 뚜껑을 살짝 열었다.
그 안에서는 불길해 보이는 보랏빛 연기와 녹색 빛이 은은히 흘러나왔는데, 그 사이로 새까맣게 변해 버린 여성의 시신이 보이자 기사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다가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저저저저, 저게 뭔가, 대체? 위험해 보이지 않는가? 빠, 빨리 닫게!"
"예, 그… 마법사분이 제게 설명하신 말씀에 따르면 시약의 실험을 하다가 그만 실험 사고로……. 하지만 문제가 저기 묻은 시약과 마법도 엄연히 마법사분의 연구 자료라서… 매우 귀중한지라.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알았네! 알았어! 절대 누설하지 않지. 통과하게!"
"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차는 손쉽게 통과하게 되었고, 아무런 제지 없이 데런의 상회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변장을 푼 베오날드는 즉시 데런과 세인을 만나서 마차를 인적이 드문 곳의 비밀 창고로 옮겼고, 주변에 누구도 없는 것이 확인이 되자 짐칸으로 가서 관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자, 공주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도착했습니다."
"설마… 이게 통할 줄 몰랐어요. 짐칸을 조사한다고 했을 땐 긴장했는데……."
시체로 누워 있던 여성이 벌떡 일어나 눈을 뜨자 그 안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빛을 내며 보였다.
젤시 황녀는 이런 방법으로 수도 관문의 검색을 통과했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베오날드를 바라보았다.
거무죽죽한 피부, 그리고 지금도 빛나고 있는 이 녹색 빛 모두 베오날드가 야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낯선 상황과 자주 접하지 않은 위협적인 색을 보면 물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벌레와 몬스터의 마정석으로 만든 빛나는 색소에도 속을 수밖에 없는 거죠. 거기에 마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된 겁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아무튼 얼른 나오셔서 씻으시죠. 그 약들… 오래 접촉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더욱 무례해지겠지만, 황녀 대우가 아닌 제 노예이자 메이드로 취급하게 될 겁니다. 그리 알아라, 베시아."
"아, 예. 주인님."
젤시라는 이름도 황녀의 이름인 만큼 이 수도에서는 잘못하다간 들킬 염려가 있기에 가명까지 주는 베오날드였다.
베시아. 알테리오와 마찬가지로 과거 자신의 딸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황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베시아라는 이름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