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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07화 (107/259)

[107화]

"대체 그 아이가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도주의 가능성을 아예 생각 안 한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것도 나이 차가 엄청나고 소문도 안 좋은 중년 백작과 하게 될 처지였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막기 위해 위험한 임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황실 기사를 6명이나 붙인 건데, 들려온 소식이 이것이니 황제는 황당함을 넘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아아~"

깊은 한숨을 쉰 황제는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곧바로 옷부터 갈아입었다.

바니로 백작과의 혼약은 황실과 제국의 안정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틀어지게 되면 문제가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우선 황실 기사단장과 첩보부장, 그리고 현자의 탑에 있는 2급 마법사들을 모두 불러오게!"

황제는 비상사태인 만큼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요 인물들을 즉시 소집했다.

혹시라도 도망쳤는데 죽거나 다치거나, 아니면 아예 잠적해 버려서 찾을 수 없는 사태가 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움직였다.

***

이틀 뒤.

반면 수도를 나온 베오날드는 약속한 합류 포인트로 향하면서 상처도 치유하고, 세 사람과 합류할 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만들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미리 하이디와 셀리나가 황녀를 구했을 시엔 여러 조치가 필요했으며 숨어들어 가려면 더 필요한 물자가 많았다.

현재 베오날드는 낮 동안 영지를 돌면서 여관에서 물건을 사고, 선술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아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단속이 심한 거야? 평소엔 안 하던 짐칸 수색에, 여자만 보면 아주 미친 듯이 조사하던데. 왜 이래?"

"글쎄? 대강 물어보니 어디 귀한 집의 아가씨가 남자랑 사랑의 도피라도 한 모양이야. 껄껄껄."

"참 나, 요새도 그런 일이 있나? 세상이 온통 전쟁통인데~ 용케도 그런 일이 있군. 아무튼 수도까지 가려면 도시 몇 개를 더 가야 하는데… 짜증 나겠어."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통해 베오날드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젤시 황녀는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 듯했고, 현재 황궁에서는 이 사실을 파악, 하지만 공표하진 못하기에 비밀에 부치고 수색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빠르게 간파해 냈다.

‘…하긴 황녀 전하가 실종이라고 하면 정보가 국외로 퍼져 나가 주변국의 인간들까지 전부 다 몰려오겠지.’

있는 그대로 황녀의 실종을 알린다면 노예 사냥꾼이나 용병, 모험가 그룹은 돈을 보고서 찾아다닐 것이고, 주변국의 귀족들은 황녀라는 외교 카드를 얻기 위해서 몰려올 터인데, 이런 인간들이 모여 어떤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가능한 한 정보를 통제한 채 찾으러 나서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서두르는 거지만… 후우~ 그놈의 결투 때문에…….’

본래라면 대합전이 끝나는 당일에 곧바로 출발해야 했지만, 시답지 않은 결투로 시간이 미루어진 탓에 이 모양이 되었다.

결투에서 하던 그 연기도 원래는 5명과 연속으로 싸운 처절한 기사가 대합전의 클라이맥스에서 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아무튼 시간은 금이기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휴식을 마치고서 물건을 챙겨 다시 말을 타고 달렸다.

‘아! 정말 옛날이었으면 이 정도 거리는 금방! 혹은 그냥 공간 이동 스크롤 줘 버리면 땡인데! 젠장! 젠장!’

밤의 어둠 속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베오날드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렸다.

노이멀 공작 시절, 정말 돈을 펑펑 쓰면서 연구도 하고, 만들고 싶은 거 다 만들고, 비싼 이동 장치와 마법사들을 연구비로 닦달해서 만든 공간 이동 스크롤로 여행과 제국 지배도 편하게 하는 등등, 정말 영광의 시대였다.

‘한시라도 빨리 베노피스로 돌아가고 싶군. 후우우~’

고향과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며 베오날드는 합류 지점으로 향했고, 숨기 적합한 산속을 합류 포인트로 정한 그는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가늠했다.

산속을 포인트로 잡은 이유는 역시 숨기가 가장 적합하며, 웬만한 몬스터나 야생 동물, 길이 없는 것 때문에 수색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보자, 지도에 따르면 이 근처인데…….’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요오오! 삐이요오오오! 삐이이이이!

‘아, 이거 알테리오의 울음소리! 거의 다 도착했군. 내가 주기적으로 울라고 한 덕분이야.’

보통은 깃발이나 표식을 사용하곤 하지만, 그럴 경우 혹시나 수색하는 적이나 다른 모험가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알테리오의 울음소리를 이용한 소재 파악은 최적의 방법이었다.

야생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고, 본래 서식지가 아니더라도 사냥감을 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혹시나 착각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일부러 세 번 울게 했지.’

"아! 베오날드 님이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굶어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아……."

수풀을 헤치고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달하자 반가운 얼굴들이 베오날드를 향해서 달려왔다.

다들 예정보다 오랜 야숙 생활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식량도 부족했는지 주변엔 잡아먹은 토끼와 사슴의 부산물들이 보였다.

베오날드는 말보단 그녀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내밀었다.

"자, 빵과 포도주다. 이걸로 우선 간단히 배부터 채워라. 그리고 야채랑 다른 재료도 가져왔으니 맛있는 밥을 해 주도록 하지."

"윽……! 쓸데없이 센스 좋은 남자 같으니!"

"아, 감사합니다!"

"세세한 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꾸나."

자신이 늦은 탓에 고기와 풀뿌리 같은 것만 먹었을 테니 부족해진 영양 상태부터 채워 줘야 한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식사를 준비하던 중에 하이디의 뒤에 슬쩍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젤시와 눈이 마주쳤다.

"아, 맞아. 황녀 전하라고 해야 하나? 으음~ 일단 지금 기분이 어떠신지요?"

"음, 그게… 아직 잘 모르겠네요. 뭔가 얼떨떨하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 해내서 좋은 기분이고… 처음으로 깊게 자 본 것 같아요."

"그렇군요. 처음으로 맛본 해방감은 각별하겠지요. 하지만… 자유라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닙니다. 져야 할 책임과 이제 모든 삶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단점이 있지요. 아, 혹시 못 드시는 채소 같은 건 있으신지요?"

"그… 당근은… 별로 안 좋아해요, 하면 안 넣어 주실 건가요?"

"하하하하!"

평소의 무표정 그대로였지만 싫어하는 야채를 솔직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베오날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갑갑하게 대화하던 때에 비하면 훨씬 아름답고 사람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벨릭스 폰 노이멀에게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이 추구하던 그 해방감을 간접적으로 느낀 베오날드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본래 이런 건 제가 해야 하는데……."

"아니다. 편하게 있어라. 갑옷을 입고 하는 야숙은 그 자체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크니 쉬는 게 좋다. 아마 네가 가장 고생 많이 했겠지. 아! 알테리오는 배불리 먹였나?"

"물론입니다. 제대로 안 먹이면… 난리를 부리니까요."

"잘했다. 아무튼 얌전히 내가 직접 조리하는 요리 맛을 보도록~ 특별히 ‘후추’도 가져왔으니 말이다."

후추라는 말에 눈을 번뜩 빛내는 하이디와 셀리나였다.

촌구석 귀족인 하이디에겐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넣는 향신료였고, 셀리나도 거의 맛을 못 보는 귀한 것이었다.

반대로 젤시 황녀는 역시 황실 사람이라 그런지 두 사람과 전혀 다른 반응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셀리나, 너는 할 말이 없나? 평소 같았으면 말이 아주 많았을 건데?"

"…애당초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묻고 싶네요. 이거 엄연히 반역이라고요. 황녀 전하를 납치하다니!"

"스스로가 나온 걸 도운 것뿐인데, 납치는 아니지."

"하아아~ 그래서, 이제 이분을 어떻게 할 거죠?"

"그 전에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후추와 버터를 잔뜩 써서 막 구워 낸 스테이크와 신선한 재료를 넣고 조리한 스튜를 내밀면서 자리부터 마련하자는 베오날드였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따뜻하고 인간다운 식사였기에 셀리나는 베오날드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오날드가 한 요리를 맛본 세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외쳤다.

"맛있어!"

"으으으음! 토끼와 사슴 따위론 느낄 수 없는 이 맛… 으으으음!"

"야외에서 이 정도 맛을… 세상에……."

"요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연금술이니 말이지. 재료를 조합하고 가공하고 조리해서 결과물을 만든다. 그리고 레시피대로 하면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 뭐, 직접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나름 연구 좀 했지."

식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행위. 신전에서는 ‘탐식’과 ‘포식’이라는 이름의 경계해야 할 죄악으로 여겼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요리’도 연금술의 일환이라 여기고 전문적으로 연구해 보았던 것이다.

‘그저 맡겨 두기만 하고 확인은 거의 안 한 사업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길 잘했군.’

추구하는 것은 역시 맛있는 것을 건강하게 먹자는 주의로, 연구는 꽤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나 베오날드가 지금 기억하는 건 그중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기록은 모두 자신의 유적이나 전부 다 기억도 못하는 창고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사소한 생각과 함께 식사를 하며 베오날드는 젤시 황녀로부터 그간의 일을 들었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한데 용케도 도망칠 생각을 했군요."

"당신이… 노력하는 걸 알게 되어서… 용기를 얻었죠. 제 도망은 당신에 비하면 아주 작은 용기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네? 아… 아아아! 그렇군요. 하하하! 제가 다른 거랑 착각했네요."

‘용기’라는 말에 베오날드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녀가 말한 의도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이야기를 맞춰 주었다.

히드라의 문양, 뱀의 가문 노이멀에게 있어 ‘용기’란 그저 바보들의 무식함을 치장하는 용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냉정한 판단과 간교함과 지혜를 모토로 하는 가문인데… 신기한 기분이었다.

‘…살다 보니 내가 용기 있다고 듣는 날도 오는군. 훗, 벨릭스 그놈이 다 웃겠어.’

애초에 그가 ‘황제’에게 대항한 것 자체가 승산이 확실히 있어서였다.

철저히 생각해 둔 시나리오. 절대 죽지 않을 방안과 도망칠 방도까지 철저히 계산하고, 변수에 대응할 준비까지 다 해서 실행하는 만큼 ‘용기’라는 말이 절대 안 어울리는 그였는데… 막상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녀 전하. 도망은 성공했지만 이다음 계획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다음……."

"이다음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황녀 전하의 앞날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해야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오날드의 물음에 그녀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 도망은 충동적으로 인해 한 것이 맞았다. 베오날드와는 고작 대화 몇 번 한 정도밖에 없는데 황제의 조치가 너무 심했고, 거기에 용기 있는 베오날드의 마음에 보답하고자 벌인 일이었지 도망치고 난 뒤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았었다.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안 했어요."

달리 둘러댈 계획도 생각이 안 나는 만큼 그녀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이디와 셀리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베오날드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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