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폐하, 이게 무슨 짓이옵니까?"
"크멜 공작, 그대 가문의 명예가 중요한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나 또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황실의 명예와 혈통의 가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네. 설마 자네… 제국이 무너지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으으음……."
"할데온 지방에 나타난 ‘유적의 발굴권’을 자네에게 넘기지."
"어쩔 수 없군요."
결국 작은 성의(?)가 추가가 되자 크멜 공작은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사실 이미 저 결투장에서 보여 준 베오날드의 강함 때문에 이젠 당당하게 이긴 거라서 그냥 물러나도 된 것이지만, 절박해 보이는 황제에게서 하나라도 더 뜯어낸 것이었다.
‘같은 파벌이라도 챙길 건 챙겨야 하는 법이지.’
‘망할 놈 같으니!’
황제는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의 인생 전부가 부정되고 제국의 안위가 흔들리는 것에 비하면 매우 싼 대가였다.
크멜 공작의 합의가 있자 황제는 손으로 음성 증폭 마도구를 가져오라 지시하고는 벌떡 일어나 결투장을 향해 말을 했다.
"들어라! 결투장에 선 두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용맹과 아름다운 싸움은 잘 보았다. 이런 영웅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도 우리 제국에게는 축복! 이 난세, 적국으로 둘러싸인 이 상황에서 이런 인재들을 서로의 검에 둘 중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안 그런가?"
"오오오오오! 맞습니다! 맞습니다!"
"북쪽엔 볼레아와 다이나! 동쪽엔 가르칸과 한! 남쪽엔 이민족!"
"당연히 아깝죠!"
"암! 제국의 영웅이 될 싹인데 죽으면 아깝지!"
난세라는 적절한 상황을 미끼로 삼았고, 죽을 뻔한 베오날드를 살리기 위해 구사한 언변에 사람들은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배드 엔딩보다는 해피엔딩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난세엔 그 말대로 영웅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자 황제는 안심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이여, 들어라. 현재 젤시 황녀는 이곳에 없다. 수상한 논란과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다른 영지의 신전에 몸을 의탁한 상태다. 그러니 오늘 네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그러니! 그 목숨 아껴, 더 큰 공과 영광을 쟁취하여 당당히 황녀를 만날 기회를 얻도록 하라! 이 결투는 서로의 명예와 기량을 모두 멋지게 펼친 양자 승리로 판단하여!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미적지근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새드 엔딩보단 나은 건지 황제의 판결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베오날드는 대충 이런 결말이 날 거라 예상한지라 크게 동요하지 않고 정중하게 황제에게 예를 표하고, 로이드와 나란히 서서 얌전히 승리의 영광을 나누기로 하며 그에게 립 서비스를 건넸다.
"이거 운이 아주 좋았네요. 서로 죽을 일도 없고, 명예와 영광을 다 나누고 말이죠. 하하하."
"…설마 일이 이렇게 풀릴 걸 예상한 건?"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치료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해결되었고, 공연은 끝났기에 베오날드는 천천히 무대를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관객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지치고 힘든 연기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투장을 내려가자 케드론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붕대와 포션 병을 가지고 다가왔다.
"정말 보는 사람이 다 심장 떨리게 만드는군. 그러게 빌려 준다고 할 때 제대로 된 무장을 걸치고 갔어야지."
"하지만 이게 가장 좋은 결말이지 않습니까? 크멜 가문도 명예는 챙겨서 더 이상 원한 살 일도 없고, 저희는 저희대로 황제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줬으니 말입니다. 발데리안 가문에게도 득이면 득이지, 실은 아닐 겁니다."
"그런 걸… 다 계산한 거란 말인가?"
"하하, 전부 다~ 까진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 흐름은 예상하고 움직였죠. 윽! 아오! 따가워라!"
이래저래 설명하면서 치료를 같이하는데, 출혈도 많고 몸에 박혀 있는 깨진 칼날과 돌과 갑주의 파편을 일일이 뽑아내야 했기에 특히 고통스러웠다.
주변에 있는 다른 가문의 기사들과 케드론이 안쓰러운 듯 보면서 그의 치료를 도우려는데, 베오날드는 한사코 거부했다.
"정말 괜찮겠나?"
"그… 제가 하겠습니다. 포션도 미리 챙겨 왔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뜨뜨뜨! 씁하!"
"신관을 원한다면 불러도 된다만?"
"아, 괜찮습니다. 전 별로… 신관을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죠."
저승까지 다녀오고, 여신을 직접 만나 본 이상 신성력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평생 신관들과 사이가 안 좋았기에 지금에 와서 가까이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나중에 세상을 구하니 어쩌니 할 때 협력을 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결국 하나 해 주면 더 해 줘, 더 해 줘, 더 해 줘 하는 자식들이라. 후우~ 지금도 그러려는지 모르겠네.’
‘노이멀 공작! 헌금 늘려 줘!’
‘노이멀 공작! 이단 잡게 병사 빌려 줘!’
‘노이멀 공작! 종교세 물지 말아 줘!’
‘노이멀 공작! 예배 나와!’
‘노이멀 공작! 그 섭리에 어긋나는 연구 하지 마. 멈춰!’
‘노이멀 공작! 우리 비리 덮어 줘!’
…….
…….
…….
까득!
생각할 때마다 이가 갈릴 정도로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고, 짜증 나는 기억만 잔뜩 있어서 화가 나는 베오날드였다.
대체 종교라는 건 뭘까? 여신이라는 건 존재한다고 쳐도 그 쓸모없는 좀 같은 놈들은 생전 도움이라곤 되지 않았기에 지금도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연금술과 접목해서 의술도 발전시켰고 말이다.
‘쓰으으읍! 후우우우~ 시간 나면 나중에 마취제를 만들든가 해야지.’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 뭐, 아프긴 하니까요. 이제 붕대만 감으면 됩니다. 후우우~ 아무튼 선배님, 부탁이 있습니다."
"늘 부탁만 하는군."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도 꼭 해야 하는 일이니 그런 거겠지.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네. 지금까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줬으니 말이야. 그래, 뭘 하면 되나?"
"제가 매우 위중한 상황이라서 저택에 입원 중이라고 소문내 주십시오. 그래서 면회 금지를 해 두면 한동안 못 나올 이유로 충분할 겁니다. 오러의 소모가 극심하니 뭐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못할 것도 없죠."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군. 알았다. 그리하지."
케드론은 베오날드의 부탁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베오날드는 그대로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는 것을 끝내자마자 바로 일어섰다.
상처 쪽은 자신이 엄살 부린 거라고 쳐도 결투는 엄연히 전력을 다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몸 안에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이를 악물고 움직여 아카데미 밖으로 나아갔다.
"이랴! 가자!"
그리고 자신의 말을 타고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과연 젤시 황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얼른 가서 합류한 다음 그녀를 숨길 방안을 이야기하고 대처를 해야만 했다.
그녀가 그대로 바니로 백작가에 시집을 가는 선택지를 택했다면 걱정 안 해도 되었지만, 만약에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도망을 쳐서 하이디와 셀리나와 합류했을 때는 보통 사달이 나는 게 아니었기에 자신이 꼭 가야만 했다.
‘…부디 인간으로서 자신을 잃지 않은 선택을 하길.’
베오날드는 가능하면 그녀가 도망치는 선택을 했길 원하며 빠르게 말을 채찍질했다.
말이 흔들려서 상처 쪽이 아프긴 했지만 지금은 시간 싸움이었기에 꾹 참아 내며 달려갔다.
***
몇 시간 뒤, 칼레움 제국 황궁.
콰아아앙!
아카데미의 행사가 모두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칼레움 제국 황제는 분노에 못 이겨서 주먹으로 자신의 책상을 후려쳤다.
손에 시큰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의 화는 불타오르고 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깟 고통, 오늘 받은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히 나를! 그깟 놈이 나를! 감히 황제인 나를 능멸하다니!"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이게… 진정할 일인가? 그따위 시골 천한 잡종 귀족 출생이! 나를 이렇게 능멸했는데! 심지어 놈은 하마터면 나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 뻔했어! 이 사악한 뱀 같으니!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현재… 발데리안 가문에서 요양 중이라고 합니다. 결투에서 생명력까지 짜내 오러를 사용하는 바람에 무리가 왔다고, 면회도 거절할 만큼 위중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 그럼 이참에 없애 버릴까?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감정적으로 나오는 제라도 칼레움 황제. 하찮은 벌레 같은 존재에게 자신이 한발 물러나는 건 물론 중요한 유적 발굴권까지 손해를 본 게 너무나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그답지 않게 매우 감정적으로 나와서 제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죽일 생각을 꺼낸 것이었다.
"폐하, 정말 아쉽지만 발데리안 가문 내의… 귀빈실은 저희 암살청으로도 무리가 있습니다. 발데리안 가문의 저택엔 상급기사도 여럿 있을뿐더러, 이젠 귀빈으로 취급할 것이기 때문에 보안은 더욱 엄중할 겁니다."
"크으으으……!"
"그러니 진정하시고, 차후 기회를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푹 쉬시옵소서."
"후우… 알겠네.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군. 이런다고 뭐가 변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후우~ 후우~ 후우… 결국 놈의 농간에 놀아나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기도 했으니 문제는 없지."
결투는 흐지부지되었고, 크멜 가문과 살짝 마찰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황실의 명예와 혈통도 지키고, 다른 귀족과 평민들에게서 인기도 지켜 내었다.
승패로 따지면 아직 진 게 아니고, 오히려 수비를 잘한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정신 승리 같지만 이것도 맞는 말이기에 황제는 빠르게 진정하고 독한 술을 들이켠 다음 잠에 들기로 했다.
***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난 황제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이 되어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한 것을 확인했다.
어제 자기 전에 생각한 대로, 제국의 황제라는 자가 일개 반푼이 귀족에게 휘둘린 것 자체는 자존심이 상할 문제였지만 그런 위기들 속에서 자신은 아주 적은 희생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해서 황실을 지켜 내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당한 것은 갚아 주면 될 터. 그래,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도록 하지.’
"폐하! 폐하! 큰일 났습니다, 폐하!"
"허허, 뭐냐? 또 전쟁이라도 난 게냐? 이번엔 어디서 난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전쟁이 아니오라 그… 바니로 백작과 함께 갔던 황실 기사단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는데… 그게… 그… 젤시 황녀 전하께서 도망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기껏 푹 자고 일어나서 컨디션을 회복했건만, 황제는 다시 혈압이 오르면서 격정에 휩싸였다.
어제 일만 해도 심적으로 상당히 고된 일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바니로 백작가에 보낸 젤시가 도망이라니! 황실 기사단원 6명을 붙여 놨는데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시종이 가지고 온 전갈을 빼앗아 읽어 보았지만 그 말 그대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젤시가… 도망을… 대체 어떻게?"
충격적인 사실에 황제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글 내용을 확인하지만, 사실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