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베오날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진한 보랏빛 오러와 검이 하나 되어 마치 폭주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의’란 그 가문의 꿈과 이상이 담겨 있는 형태. ‘히드라’는 노이멀 가문의 상징, 하나가 베이면 둘이 자라고 결코 죽지 않는 뱀의 머리를 형상화한 검(劍).
‘10식-쌍두사(雙頭蛇)’는 그저 이 ‘오의’를 배우기 위한 계단, 2개의 머리는 9개의 머리를 구현하기 위한 초석일 뿐이다.
‘드디어 비장의 수를 뽑은 건가?’
검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번쩍이는 보랏빛 섬광.
로이드는 눈을 번쩍 뜨고, 오러를 집중한 채 그 검을 파악하고자 했고, 전력을 다해 집중한 결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단번에 자신을 베기 위해 덮쳐지는 8개의 검광으로, 자신을 물기 위해 보랏빛 뱀의 머리들이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모습이었다.
‘과연, 이런 것이었나?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비장의 수지!’
로이드는 끌어 올린 오러를 검에 실어서 일제히 날아오는 뱀의 머리들 중 강한 것들 다수를 한 번에 쳐 낼 수 있는 궤적을 찾아내어 휘둘렀다.
갈색의 오러를 실은 검이 날아오던 8개의 검광 중 5개를 분쇄했고, 팔과 다리 옆구리를 각각 찔러 들어오는 3개는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큭! 하지만 이걸로 놈의 비장의 수는…….’
‘아직 남았다.’
하나 히드라는 보통 9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라고 알려져 있다.
9번째 머리의 검(劍)은 보랏빛 검광 안에 감추어진 새하얀 검.
뱀의 가문. 간교한 지혜와 하나가 실패해도 두 개의 계략이 새로이 나타나게 되는 노이멀 가문다운 오의였다.
‘이런 젠장! 정말 간교한 뱀 같은!’
‘역시… 나는 실전파라니까! 혼자서 할 땐 더럽게 안 됐는데! 적절한 상대를 만나니 되잖아!’
베오날드는 드디어 오의를 성공했다는 환희와 역시 자신의 가문의 검술은 결국 악의와 간교함,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것이라서 적이 있어야 제대로 펼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9번째 머리의 검은 대비를 하지 못한 로이드의 갑주와 투구 사이의 틈을 정확하게 노리고 찔러 들어갔지만…….
쩌적! …파캉!
하나 검은 목에 닿기 직전에 갑자기 유리가 깨어지듯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검의 내구도가 지금까지의 공방에서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베오날드가 끌어 올린 오러의 양을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베오날드의 오의는 성공했고, 완벽한 승리 타이밍을 잡았지만 실패해 버렸다.
"참… 세상일이 웃기네요."
부서진 검을 쥐고 씁쓸히 웃는 베오날드. 그리고 죽음 앞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로이드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검을 쥐었다.
그리고 생각하기 전에 일단 오러를 끌어 올리고 검부터 휘두르며 그는 베오날드의 패인을 짚어 주었다.
"그러게 더 좋은 검을 들고 왔어야지."
‘크멜 가문 검법, 종형(終形)-나뭇잎은 다시 피어날지어다’.
콰아아아아아!
대련장의 바닥이 파이고, 갈색의 오러의 파도가 베오날드를 덮치며 그를 날려 버렸다.
오러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지만 그래도 갑주는 모두 다 부서져 버렸고, 부서진 부분은 제대로 방어가 안 된 건지 작은 칼날들로 난도질한 것 같은 상처가 나며 피를 흩뿌렸다.
"크억!"
그리고 그대로 날아가서 하늘 높이 떴다가 자유낙하해서 땅에 떨어진 베오날드는 땅을 구르면서 괴로워했다.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고, 이것도 자신의 시나리오 중 하나였지만 역시나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으아아악… 따가워. 젠장! 이런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지만…….’
"안 돼. 베오날드 님!"
"아아아아!"
"하필 거기서 검이 깨지는 바람에!"
"거의 다 이겼는데!"
"베오날드 니이임! 일어나세요!"
‘클라이맥스에… 최고의 연출이니 참아야지.’
자신이 생각해도 최고의 연출이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가운데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서 비장의 화려한 오의를 써서 완벽한 승리의 각을 잡았는데, 그게 딱 검이 부서지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역습을 당하는 그림.
모든 일이 이렇게 풀리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베오날드 스스로가 봐도 아주 멋진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까 거기서 딱 잡았어도 좋았을 텐데, 이거 너무 아프군.’
"승부는… 난 것 같군. 간교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검이었다."
"…크으으윽!"
처절한 모습으로 베오날드는 신음을 냈지만 일부러 일어나지 않고 쓰러진 채로 괴로워했다.
그사이 다가온 로이드가 베오날드의 눈앞에 검을 겨누었다.
이 결투는 대련이 아니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야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유언 정도는 들어 주지."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됩니까? 애초에 검을 들어서 여기까지 온 건… 황제 폐하께 한마디 드리고 싶어서였거든요."
"그러도록. 허튼 생각 하면 그대로 검으로 벨 걸세."
‘역시 순혈 기사 집안답군.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베오날드는 힘겹게 일어나서 천천히 황제가 앉아 있는 황족 전용석 쪽으로 최대한 다가갔다.
멋진 외모가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절뚝절뚝 가는 모습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다음, 고개를 들어 관객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크게 황제에게 말했다.
"결투의 패배 직전 황제 폐하께 한 가지 청을 올리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그 요청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가 하마터면 로이드를 이길지도 몰랐던 순간엔 가슴을 졸였지만 검이 깨진 순간 다행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저놈이 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어 더욱 짜증이 난 상태였다.
‘저 망할 놈이 대체 무슨 짓을…….’
웅성웅성…….
마음 같아서는 그 부탁을 거절해 버리고 그냥 죽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 없는 게, 여기 결투장에 모여 있는 관객과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었는데 다들 베오날드의 청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부한다면 자신은 영락없는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될 공기라는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은 황제였다.
하나 허락한다면 베오날드가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워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황녀 문제 때문에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건가?"
"아니, 저렇게 처절하게 싸우고 죽기 전에 하는 부탁인데 그것도 못 들어줘?"
"황제 폐하가 참……."
웅성웅성…….
모인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까지 이 처절한 싸움을 한 아름다운 청년의 부탁을 고민하는 황제에 대해 잔혹하다고 생각하며 실시간으로 그의 평가가 깎여 내려간다.
단순히 평가만 내려갈 것인가? 황실에 대한 신뢰 자체가 저 한 놈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상황이 되어 버리니 도저히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고려할 수 없었던 황제는 결국 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랐지만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청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하는 것을 허락… 하노라."
"예. 감사합니다, 폐하. 제 청은… 지금 이 자리에 안 계신 젤시 황녀 전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작별… 인사라고?"
"예. 제 자신이 황녀 전하에게 어울리지 않는 반푼이의 몸이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가 먼저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 황녀 전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그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웅성웅성…….
이것이 베오날드가 준비한 마지막 쐐기이자 관객들에게 주는 반전.
지금까지 이토록 피 흘리며 열심히 싸워 온 이유가 오직 황녀에게 ‘작별 인사’를 위함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서 관객석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저 신분을 넘어선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을 위해 치열히 싸운 베오날드를 보며 슬퍼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싸움, 그리고 위기, 고난 속에서 그것을 돌파해 나갔지만 마지막에 안타깝게 ‘검’이 부서져서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죽기 전 마지막 청을 올린 것이 ‘작별 인사’라니. 후세에 길이길이 눈물과 함께 전해질 로맨스 새드 스토리였다.
"폐하… 이거 큰일 난 것 같습니다. 저놈의 비장의 카드가 하필 저것일 줄은……."
"으으음……."
"심각한 사태입니다."
이 사태를 보고 있던 레기온 경이 재빠르게 분위기를 읽고 황제에게 조언을 해 왔다.
안 그래도 황제는 이 로맨스 스토리의 악역인데, 지금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처절히 싸운 이 혼혈 기사의 마지막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묵살해 버리며 배드 엔딩을 장식한다면……?
수도 전체에 이 이야기가 퍼져서 황제에 대한 여론이 박살 나는 건 기본이고, 살과 뼈가 더 붙어서 음유시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는 건 양반, 주변국에까지 퍼지고 기록으로 남아서 재위 기간 동안의 모든 역사의 이야기가 부정당하고 이 로맨스 새드 스토리의 악역 황제로 남을 판국이었다.
"지금 젤시는 수도에 없는데… 그걸 말해야 하나?"
"…큰일 났군요. 그걸 말했다간 폐하의 이름은 물론……."
황실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게 된다는 걸 차마 말 못하는 레기온 경이었다.
고작 잡종 애송이의 촌극에 황실의 명예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지금 그는 수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의 마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옛 로마에서도 인기를 얻은 검투사는 황제조차 어떻게 하지 못할 권력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의 힘은 때론 그 어떤 권력보다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곤 했다.
베오날드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반대로 황제는 그것을 너무 우습게 봤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어, 어쩌지?"
"폐하?"
"…말씀이 없으시다는 건, 결국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거군요. 예, 알겠습니다… 덧없는 꿈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아무나 나중에 혹시 그분을 만나게 된다면… 부디 고마웠다고 전해 주십시오."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는 베오날드의 마무리 대사. 그리고 그는 얌전히 로이드에게로 돌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베어 내라는 듯 목을 내놓았다.
그러자 관객석에선 안타까운 탄성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귀족 부인들과 여성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베오날드 님! 죽으면 안 되에에!’와 ‘황제 폐하께선 뭘 하시는 거람!’이라고 황제에게 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완벽한 죽음의 피날레, 새드 엔딩.
이게 이루어지면 앞으로 역사 속에서 제라도 칼레움의 모든 업적은 부정이 되고, 오직 ‘기사 베오날드’ 이야기의 악역으로 남는 것과 동시에 그의 혈통이 전부 폭군의 자식으로 점철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자, 그럼 시원하게 한 번에 보내 주십시오."
"알았네. 걱정 말게."
그리고 로이드는 어차피 이 결투에서 승리해야 가문의 명예가 살기 때문에 황실의 문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검을 들고 오러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검이 휘둘러져서 베오날드의 목을 지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상황. 레기온 경은 다급히 황제를 바라봤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그에게 이 사태를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그럼 부디……."
"멈춰!"
채앵!
베오날드의 목으로 검이 휘둘러지던 그 순간, 황실 기사단장 레기온 경이 황족 관중석에서 단숨에 뛰어내리면서 창을 던져 그의 검을 막아 내어 결투의 처형을 중지시켰다.
베오날드는 그 소리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즐거운 마음이 들었으나, 아직 연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