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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03화 (103/259)

[103화]

하나 감격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하이디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고, 아직 안전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수도에서 베오날드 님이 보냈습니다. 황녀 전하께 도움을 주라고 해서 말입니다."

"베오날드가… 보냈다고요? 게다가 저에게 도움을?"

"예. 그분께선 황녀 전하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리라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급합니다. 우선 얼른 타시지요."

"여기에 세, 세 사람이나 탈 수 있을까요?"

"이래 보여도 소나 말을 잡아먹는 생물이라 충분히 가능합니다. 자리는 좀 좁겠지만… 아니면! 무례를 용서하시길!"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하이디는 그대로 젤시를 짐짝처럼 들쳐 메고 한 손으로는 알테리오의 고삐를 잡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오러의 흔적을 읽어서 왔으니, 황실 기사들도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그런 만큼 한시라도 빨리 달려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꽉 붙들어 매십시오."

"예!"

"휴우~ 정말로 이게 무슨 짓인지……."

삐이이이~

셀리나의 푸념에 알테리오는 동감한다는 듯 작게 울고는 계속해서 숲을 질주해 나갔다.

그렇게 젤시 황녀는 자신의 의지로 빠져나왔고, 베오날드의 선견지명 덕분에 구출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

대장을 비롯한 황실 기사단 4명이 돌아왔을 땐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마도구를 무사히 획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말을 타고 온 정찰병의 보고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 뭐라고? 황녀 전하가 사라졌다고?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알스터와 맥그러스는 뭘 하고 있나?"

"그게 지금… 보시다시피 갑자기 불이 나고, 말들이 날뛰어서 혼란스러운 상태라……."

"이런 젠장!"

대장은 안색이 파래진 채로 마도구도 내팽개치고 그대로 달려갔다.

황녀가 사라진 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심각한 문제로 자신의 목은 물론 집안의 명예와 존속까지 걸린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를 따르던 다른 기사들도 미친 듯이 달려서 도착했을 땐 이미 어느 정도 불길을 잡고, 도망치거나 날뛰는 말들을 진정시키고 엉망진창이 된 마차를 고치는 등등 분주한 상황이었다.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너희는 대체 뭘 한 거야? 황녀 전하의 신변 보호가 가장 먼저 아니었나?"

"워낙 불이 빠르게 번지고 말들이 도망치려고 한지라 저희까지 나서서 지켰어야……."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이 없는 거냐? 너희는! 황실 기사단 자격이 없다. 황실의 안녕과 안전이 가장 최우선이라는 걸 잊은 거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냔 말이야!"

"하, 하지만 불도 그렇고, 말들의 상태가 이상한 게 외부의 공격자를 찾는 게 더 먼저인지라. 오러의 자취를 쫓아서 가는 것과 대응이 먼저… 커억!"

대장은 분노를 담은 주먹을 휘둘러 부하를 가격했다.

그가 말한 대로 황실 기사단의 본분은 황실의 안전과 황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것인데, 그것을 저버리고 황녀가 실종되게 만들었으니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나름 변명도 합리적이긴 했지만, 결과가 개판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변명도 쓸모없는 것이다.

"젠장! 황녀 전하의 흔적이나 상황은? 찾았나? 목격한 사람은?"

"황녀 전하께서 입었던 드레스 쪼가리들이 떨어져 있는 건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목격자는 안 보였습니다. 그… 황녀 전하도 나름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익히고 못해도 ‘중급 기사’급의 재능을 가지셔서……."

"이런 젠장!"

"더구나 예전 상황을 보면 여기저기 인사 다녔던 것이… 아무래도 도주 루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게 계집에게 그런 걸 왜 가르쳐 가지고!’

황녀의 값어치를 올리겠다고 마나 호흡법과 검술, 거기에 각종 지식을 가르친 황제가 원망스러워지는 대장이었다.

하나 더욱 원망스러운 것은 이 망할 남겨 둔 2명의 황실 기사 놈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황족의 곁을 지키는 것이 황실 기사들의 의무인데, 이 정도 일에 대응도 제대로 못한 것이 화날 만했다.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황녀 전하가 타이밍을 잘 잡아서 도주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대로 감탄과 원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 하나 대장님, 이미 수색엔 나섰고, 바니로 백작가의 병력과 기사들에게도 이야기해 놨습니다. 아직 이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거라도 안 했으면 지금 내가 네 목을 쳤을 거다. 젠장할!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이곳에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놔두고 병사들은 모두 수색에 나서라! 안 그럼 우리 목이 날아간다! 어서 빨리 움직여! 그리고 혹시 모르니 이 근처에 있는 영지와 마을에 전령을 보내라! 황녀 전하를 발견하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대장의 지시 아래 황실 기사와 병사들, 바니로 백작가의 병사와 기사들 모두 다급히 숲속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황녀는 떠난 지 오래였다.

뭘 하고자 해도 어두운 밤의 수색은 훨씬 더 힘든 노릇. 거기에 오러의 흔적도 사라진 지 오래라서 그녀의 행방은 완전히 오리무중 상태가 되어 버렸다.

***

1일 뒤, 제국 아카데미.

드디어 대망의 결투 날이 되었다.

데런 상회 지하에 만든 연구실에서 잠을 자던 베오날드는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상회 쪽으로 나갔다.

데런은 오늘이 그의 목숨이 왔다 갔다 결투 날인데도 너무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그를 챙겨 주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뭔가 성과가 있었겠지요?"

"음? 아, 있긴 있었지. 여러 마도구와 골동품들을 살리고, 새로이 조합하고, 쓸 수 있는 물건과 술식이 새겨진 파츠가 잔뜩 늘어나서 아주 기분이……."

"아니! 결투 준비 말입니다. 뭔가 무기나 무장을 얻으신 건?"

"아, 그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네. 좀 아쉬운 일이더군."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크멜 가문에선 아주 단단히 준비하고 나올 텐데……!"

‘그래 봐야 500년도 안 된 핫바지 가문…….’

물론 자신의 시대에 이름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500년 전 제국을 지배했던 베오날드의 기억에 없는 가문이라면 결국 제대로 활약한 역사가 50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내가 여기에만 있었어도 아무 조치도 안 한 건 아니다. 세인을 통해서 전갈을 보냈던 거 기억하나?"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기가 메인 아닙니까?"

"여기서 좋은 걸 건진다면 여기가 메인이었겠지만, 아니라면 발데리안 가문에서 적당한 무구를 빌릴 생각이었다. 지금쯤 가지고 오겠지. 거기선 내가 현재 폐관 수련을 하는 중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그것참 기가 막힌 변명이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투는……."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읏챠~ 나는 언제나 이미 이기고 있으니~ 끄으으으~ 역시 아침 물이 차갑군."

쏴아아~

여유로운 태도로 우물가에서 물을 끼얹으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런 그를 보던 데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할 일을 하러 갈 뿐이었다.

그 뒤, 시간에 맞춰 발데리안 가문의 기사와 함께 온 세인의 시중을 받으며 베오날드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오오……! 베오날드다! 세상에, 그동안 쥐 죽은 듯이 보이지 않더니 어디서 나타난 거지?"

"결투 반드시 이기세요!"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대에게 경의를!"

"역시 발데리안 가문에서 지원을 해 준 건가? 오오오오오!"

그리고 이젠 완벽하게 유명인이 된 탓인지 아카데미 앞의 광장에서부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베오날드는 일약 스타가 된 기분을 느끼면서 그들의 환호에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면서 호응해 주었다.

지금 이 수많은 팬들이 자신의 힘이었고, 호응이 크면 클수록 황제에게 먹일 수 있는 빅엿이 커지기 때문에 그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인사와 사인, 팬 서비스도 적극적으로 해 주면서 이동했다.

"아주 광대가 따로 없군. 알았나? 로이드. 저런 놈에게 절대 지면 안 된다."

"어차피 질 생각이 없습니다. 패배는 곧 죽음이니 말입니다."

"그저 이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아주 철저하게! 잔혹하게! 짓밟아야 한다. 어설프게 이기면 오히려 네 패배나 다름없다. 알았나?"

그리고 아카데미 내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멜 공작은 후계자인 로이드에게 베오날드를 처절히 쳐부수라고 지시를 내리며 목에 핏대를 올렸다.

썩 마음에 드는 놈이긴 했지만 지금은 어쨌든 가문의 적이며, 앞으로도 자신들의 편이 되지 않을 거라면 가문의 우환이 되기 전에 냉정하게 처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님, 놈은… 아직도 밑바닥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전 처음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 급하게 오의로 맞섰다가 역으로 당할 뻔했습니다."

"밑바닥을 모른다고? 하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언제 전쟁터가 네 사정에 맞춰 주던 적이 있더냐? 이건 결투다. 그래, 일대일로 하는 전쟁이란 말이다. 그래서 너에게 어지간해선 꺼내지 않는 보물고에 있는 무구를 모두 챙겨다 준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현재 로이드가 손질하고 있는 갑주와 투구, 망토, 검, 반지와 팔찌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문의 보물고에 잠들어 있던 무구들로 던전에서 발굴된 것을 모험가에게 사들이거나, 전쟁터에서 적에게 노획하거나, 혹은 최고급 소재들을 모아서 대장장이와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직접 의뢰를 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질 수 없을 것 같군요. 오오오……."

"흥, 본래 가문의 시급한 위기나 중요한 전장에서나 꺼내는 것들이다. 이따위 어린애 장난에 꺼낼 리가 없는 물건이란 말이다. 하나하나가 가문의 비기이다. 알았나?"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도… 만지고 있는 지금 더 잘 알 것 같습니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그이기에 자신의 손에 들려진 이 무구들에 깃든 마력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보조 마법 같은 것이 걸린 마도구만 해도 상당한 가격을 자랑하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그것들 중에서도 최상품 중의 최상품들. 값을 잘 받는다면 한 개당 영지 하나도 살 수 있을 정도의 힘과 능력을 지닌 것들이었다."그래, 그걸 안다면 절대 질 리가 없지. 하지만 상대는 ‘뱀’이다. ‘뱀’은 죽고 머리만 남더라도 독니로 깨무는 놈이다. 그러니 조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다짐하고 또 다짐해라. 그리고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라."

다짐하고 또다시 다짐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어느덧 시간이 지나 드디어 결투의 시간이 되자 로이드 회장은 곧바로 가문의 보물들을 착용한 다음 결투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먼저 나온 베오날드가 마찬가지로 완전 무장을 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무장 상태를 본 로이드 회장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저건? 발데리안 가문의 일반… 기사들이 쓰는 무장이 아닌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자신은 겉보기로도 휘황찬란한 가문의 보물들을 잔뜩 걸치고 나왔는데, 상대는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사정이 안 돼서 그런 건지, 발데리안 가문의 검회색 빛의 투박한 갑주와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은 무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자신과 대비되는 그 모습에 로이드 크멜은 역으로 경계심을 잔뜩 올리면서 그를 바라봤고, 두 사람은 곧 결투장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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