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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102화 (102/259)

[102화]

‘하지만 이걸로 가능할까? 아직 둘이 남아 있는데… 하나, 지금이 바로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기회야. 내가 다른 소란을 일으키면서 도망치면…….’

"뭐야? 이거 왜 이래?"

"야, 얀마! 진정해!"

히이이히히히힝!

소란을 키워서 도망칠 생각을 하던 그때, 갑자기 말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기사들은 말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고, 젤시 황녀는 신이 자신을 위해 축복이라도 내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상황이 더 좋게 흘러가자 더 이상 오늘 말고는 도망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 불이야! 불이다! 식량 마차에 불이!"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왜 갑자기 불이 이렇게? 빨리 진화해!"

‘이건… 진짜로 신의 인도?’

유물일지도 모르는 빛, 거기에 날뛰기 시작하는 말,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까지. 도망치기 좋은 사고들이 연이어 터지자 그녀는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우연이 너무 겹치면 필연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수상했지만, 지금 이 찬스를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황녀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컥!"

"미안해요."

우선 자신의 옆에 붙어 있는 시녀를 기절시킨 다음 곧바로 드레스 치마를 찢고, 시녀가 신고 있던 부츠를 빼앗아 신어서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경계해야 할 황실 기사들의 움직임을 살핀 다음 마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그대로 모든 오러를 끌어 올려서 단숨에 다른 마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각 마차의 구성과 물자가 어느 것인지는 다 파악해 둔 상태야. 그러니…….’

그동안 각종 핑계를 대며 진영과 각 마차들을 둘러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 파악과 도주로 설정엔 문제없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숲으로 몸을 숨기고 싶었지만 그래도 막 서두르진 못했다.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움직이면서도 마차에 불을 지르거나 말을 찔러서 난동을 부리게 하여 소란을 키우고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횃불들이 많아서 정말 다행이야.’

야간 경비와 몬스터, 동물을 쫓기 위해 곳곳에 불을 피워 둔 만큼 그녀는 손쉽게 이 소란을 더 키울 수 있었고, 동시에 최소한의 물건들을 편리하게 챙길 수 있었다.

단검, 검, 경무장, 부츠와 가죽 갑옷, 사이즈가 크고 냄새가 나지만 받쳐 입을 내의 등등, 물건들을 챙기면서 그녀는 빠르게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소란을 만든 주범들인 셀리나와 하이디는 알테리오를 탄 채 행렬을 돌면서 불을 피우고, 난동을 부리면서 계속 소란스럽게 만드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이 소란을 일으킨 것엔 그리폰인 알테리오와 마법사인 셀리나의 힘이 아주 컸는데, 알테리오가 진심으로 포효를 하면 말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발버둥 치면서 도망치려 했고, 셀리나의 마법은 별도로 횃불이나 기름병 같은 걸 준비하지 않아도 쉽게 불을 붙일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호호홋! 모조리 불타 버려랏!"

"이번엔 저번과 다르시네요."

"미리 메모라이즈를 해 두는 거랑 아닌 거랑은 엄청난 차이거든요! 심지어……."

"알았으니 말을 줄이십시오. 혀 깨뭅니다! 알테리오!"

삐이이익!

숲속을 빠르게 기동하며 마법으로 불을 지르는데, 정교한 마법 컨트롤을 보여 주는 셀리나의 솜씨에 하이디는 내심 감탄했다.

하늘 같은 베오날드 님에게 틱틱거려서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지만, 마법사라는 존재가 워낙 희귀하기도 하고, 그래도 실력은 있으니 말이다.

‘하긴 실력이 없었다면 진작 베오날드 님이 곁에 두지도 않았겠지.’

베오날드는 상냥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정원’에 들어온 자에게만 한정된다.

그렇지 않은 자는 적이거나 아예 무관심의 대상. 매너 있게 대하더라도 그저 거기서 끝이고 더 이상의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셀리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베오날드의 ‘정원’에 들어올 수 있는 후보군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하이디는 계속해서 알테리오와 함께 숲을 질주하며 혼란을 일으켰고, 베오날드가 내린 다음 지시를 떠올렸다.

***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그리고 지금도 거대한 빛기둥을 만들어 내고 있는 유물로 향한 황실 기사단원 넷은 현재 본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늘로 뻗은 빛의 기둥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피부를 찌릿하게 하는 파동과 함께 공기를 누르는 진동이 무겁게 일어났는데, 시끄러운 소리까지 나니 서로의 목소리가 전달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빛도 성가신데! 망할 소리까지! 피부가 찌릿할 정도야! 안에 대체 뭐가 있기에? 빛도 너무 강해서 눈을 뜰 수가 없고… 젠장!’

보통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빛과 소리의 짜릿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는 게 당연했지만 이들은 썩어도 황실 기사, 개개인이 모두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른 절대 강자들. 오러를 몸에 두르고 서로 수신호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전진했다.

‘하나 빛과 이 소리를 빼면 다른 위협은 없는 것 같군. 그나마 다행인가? 하나 방심해선 안 된다. 과거의 유물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현재 이 호위팀의 대장인 기사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빛의 중앙을 향해 다가갔다.

위협이 없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되었기에 그 속도는 상당히 느렸고, 너무나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을 감고 시끄러워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곳에서 오직 ‘오러’로만 앞에 존재하는 상자의 존재를 감을 잡고 전진해야만 했다.

‘다 왔다. 다행히 아무런 조짐이 없군. 상자에서 마력이 느껴진다. 마도구가 확실해.’

대장은 그대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잡아 올렸고, 이 빛을 사라지게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만져 보았다.

하나 웃기게도 그가 들어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빛이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공기를 짓누르는 찌릿한 소리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대체… 이건?"

"대장님! 성공하셨습니까?"

"대체 이건 뭡니까?"

마찬가지로 빛과 소리가 사라지자 황실 기사들은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이 수상한 상자를 다들 계속 이리저리 만져 보며 정체를 밝히려 하지만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이미 이동하는 행렬의 불길은 밤을 비출 정도로 거세졌고, 멀리서 황실 기사 넷을 찾기 위해 정찰병의 기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

같은 시각, 데런 상회의 비밀 창고.

어느 정도 연구 시설로 개조를 완료한 베오날드는 밤잠도 설치면서 신나게 골동품들을 뜯거나 감정하는 중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아까워서 대변과 소변을 따로 받아 두는 통까지 놔둘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그것을 갈아 주고 식사와 식수를 가져오는 데런의 입장에선 지옥 같은 일이었다.

그는 새로이 갈아 온 배변용 통을 놔두면서 베오날드에게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베오날드 님."

"무슨 일이지?"

"하이디 양과 셀리나 마법사님에게 준 유물 말입니다. 그거 대체 어떤 물건입니까? 문득 생각해 보니 궁금해서 말이죠."

"그거? 아… 그다지 가치 있는 건 아니다."

"가치 있는 거였으면 꼭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겠죠. 하지만 그걸 어디에 쓰는 건지가 궁금하다는 겁니다. 황녀 전하께 가면 그……."

데런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베오날드를 노려봤고,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정말 별거 아닌데… 궁금하다면 뭐, 말해 주지. 그거… ‘조명’이다."

"예? 조명?"

"그러니까… 라이트 마법이라고 혹시 아나? 빛이 나는 작은 마법구를 생성하는 마법이지? 그걸 이제 마법을 쓸 줄 몰라도 마정석만 넣으면 작동하게 만든 상자다. 넣으면 빛을 뿜어내지."

"그런 거였습니까? 하지만 그걸 하이디 양에게 준 건 대체……."

"그것도 때론 조정하면 무기가 될 수 있거든. 가령~ 빛을 뿜어내는 출력을 올려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쏘게 한다거나 등등, 별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도 조금 손을 보면 다른 가능성이 보이기 마련이지."

베오날드는 그 조명 마도구를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본래 용도는 베노피스 영지에 있는 ‘대극장’이나 ‘공연장’, ‘연회장’, ‘연설장’ 등에서 쓰는 조명 기구로서 빛을 뿜어서 밤을 밝히거나 아니면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용도였다.

‘정말이지 우리 가문의 문양을 안 새겼으면 나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

베오날드가 발견할 당시엔 본래 안에 끼우는 마정석도 없어서 그저 수상한 상자 형태로 존재했던 물건으로, 히드라 문양을 보고 이리저리 만져 본 끝에 기억 속에서 용도를 되살린 것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그것을 직접 개조, 마력 소모량이 올라가지만 빛의 출력을 올려서 새로운 용도로 탈바꿈시켰다.

‘직접적으로 술식을 건들 필요도 없고, 비싼 마정석을 넣고 몇 가지 위치를 바꾸면 되는 일이니 아주 간단한 개조였지. 추가적인 아이디어도 좋았고…….’

빛뿐만 아니라 소리를 위해서 추가로 찾은 다른 음향용 마도구에 있는 술식이 깃든 부품을 떼어 내어 재조립해서 완성. 아주 단시간이지만 강렬한 빛과 소음을 뿜어내는 마도구로 개조에 성공한 것이었다.

‘아무튼 하이디와 셀리나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도 오는 것이지만, 과연 젤시 황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사실 베오날드의 시나리오에선 그녀가 수도에 없어도 큰 지장은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상정해 놓은 시나리오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처럼 부친의 강요와 지배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상황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정말… 기대가 되는군.’

그녀가 기껏 자신이 준 기회를 살려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바니로 백작의 품에 안기는 결과를 맞이해서 더 이상 날개를 펴지 않고 새장 안에서 죽을지. 베오날드는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물건들의 감정을 계속해 나갔다.

***

젤시 황녀는 어느새 마차의 대열에서 나와 숲을 가로질러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마나 호흡법을 배우고 평소 단련을 한 덕분인지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게 가능했다.

그녀는 드디어 자유를 쟁취했다는 해방감과 고양감에 가슴이 벅찼지만, 아직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그나마 드레스에 붙은 보석을 떼어 내긴 했지만 돈으로 바꿀 곳이 없어. 그리고…….’

황실 기사들의 능력을 잘 알기에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 오러를 불태웠다.

그리고 자신의 흔적을 끊어 버리기 위해 강으로 가자고 생각한 그녀는 근처 마을에서 본 지도를 떠올리고 강이 흐르는 곳을 향해서 계속해서 달리는데, 뒤에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벌써 나를 쫓아왔다고?’

"역시 이 오러의 기운은… 젤시 황녀님의… 아! 찾았다! 여깁니다! 여기입니다! 황녀 전하! 베오날드 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알테리오를 몰고 가던 하이디는 진형의 주위를 돌다가 오러의 빛을 뿜으며 진형 밖을 질주해 가는 한 사람을 겨우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척을 쫓아온 결과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내곤 곧바로 베오날드의 지시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날개가 하나 없는 그리폰? 정말?’

하이디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본 젤시 황녀의 눈에 어두운 달빛에 빛나는 부리와 깃털의 자태가 들어왔다.

제국 아카데미 입학식 날, 그리폰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등교하던 베오날드의 사건을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그것이 베오날드의 그리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그리폰을 기다렸고, 하이디는 곧바로 내려서 예를 갖추고 그녀에게 베오날드의 전갈을 전했다.

‘세상에……!’

베오날드가 자신의 의지를 알아주고 미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깨닫자 젤시 황녀의 온몸에는 전율과 환희, 기쁨이 몰아쳤다.

물론 그녀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저 혼란만 일으키고 끝나는 일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능성을 봐주고,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생각해 준 베오날드에 대해 한 번 더 감동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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