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뭘 하라고 했었죠?"
"도시나 마을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야숙하는 날, 깊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서 가능한 한 아주 큰 소란을 일으키라고 하셨습니다."
"소란… 만 일으키면 되는 건가요?"
"예. 주신 유물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최대한 소란을 키워라, 그리고 절대로 붙잡히거나 죽어선 안 되니 적절한 거리를 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베오날드의 명령을 기억하는 하이디. 며칠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짧은 휴식 정도만 취하고 알테리오를 타고 왔음에도 그녀는 지치거나 졸린 기색 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기괴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그녀를 보며 질린 기색을 한 셀리나는 일단 눈앞의 진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게다가 저 군대… 안에 황실 기사단이 있잖아요? 맙소사! 제정신인가?"
"그래도 베오날드 님의 명령이니 해야 합니다."
"…하는 거야 하는 건데~ 솔직히 다른 여자를 꼬시는 일에 협조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지 않나요?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데… 여자로서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아뇨. 안 그렇습니다만?"
"……."
"……."
셀리나는 도저히 핀트가 맞지 않은 하이디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어쩌라는 시선으로 돌려주었다.
기사와 마법사. 서로 화제의 공통점이라곤 베오날드밖에 없는 상태인데, 그 화제마저 이렇게 핀트가 엇나가니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니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후우~ 아무튼 너무 위험한 일인데, 이걸 그냥 해야겠나요?"
"해야 하니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상대가 차원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일단 우리도 푹 쉬고, 작전을 세워서 움직이자는 거예요. 베오날드 님이 분명 그걸 생각하고 절 당신과 같이 보낸 게 아닐까요?"
"아… 그렇군요. 그럼 우선 야영지를 마련하죠."
셀리나의 설득에 둘은 간단한 야영지를 마련하고 불을 피운 다음 식사를 준비했다.
어차피 저 거대한 행렬과 거리를 상당히 벌려 놓았기에 그들이 수상쩍게 여기거나 다가올 가능성은 없었다.
하이디는 이제는 능숙하게 알테리오와 어울리는 듯 그에게 고기를 썰어 주면서 식사를 준비했고, 셀리나는 주변 지도와 상황을 본 뒤 베오날드가 전해 주라는 유물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이게 뭔지 모르겠네요. 그 상인에게 뭔가 더 들은 게 있나요?"
"아뇨. 유물의 정체는 베오날드 님만 안다고, 사용법은 무조건 적당히 먼 곳에서 버튼을 누르라고만……."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건지. 에휴~ 좀 제대로 알려 줘야 써먹든가 말든가 할 텐데……."
"그냥 베오날드 님이 시키신 대로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유물이라는 게 위험한 물건이니 말이죠."
셀리나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하이디의 모습에 그냥 입을 다물고 유물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유물은 꽤 큼직한 금속 상자로 되어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여기저기 녹슨 부분과 칠이 벗겨진 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베오날드가 말한 특이한 버튼과 함께 상자 한구석엔 히드라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으으음~ 안에 마정석이 있는 건 느껴지는데, 술식이 뭔지 전혀 모르겠네.’
셀리나는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 탓인지 계속해서 상자를 여기저기 살펴보며 뭐 하는 물건인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고위 마법사도 아니고, 아직도 연구와 수련을 반복하는 그녀로서는 500년 전의 마도구를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대체 베오날드 님은 뭘까? 이게 어떻게 유물이라는 걸 알아내고… 사용법까지 파악한 거지? 내가 그때 질문했을 때는 전혀…….’
‘예? 아,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제가 몇 개 예시로 가져온 물건을 보여 드렸는데, 베오날드 님이 ‘이거다!’ 하고 눈을 빛내면서 슥슥 닦고 만지더니 돌려주셨습니다. 그 이후 전혀~ 이 물건에 대해선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서 오래된 마도구의 사용법과 정체를 파악한 건가? 그게 가능한 건가?’
마탑의 마법사인 그녀는 여러 과목을 수강했고, 당연히 오래된 유물이나 마도구의 감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깊은 역사학적 지식과 여러 문화에 대한 해박한 이해도가 필요하고, 거기에 마도구는 어떤 술식과 마법적 작용을 하는지 조사해야 해서 더 난이도가 높고 어려운 일인데, 베오날드는 무슨 길거리에서 물건을 찾는 것인 양 판별해서 쓰라고 던져 준 게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이 지식들을 저 나이에 다 습득한다는 게 말이 되나?’
도저히 올해 18세라곤 생각할 수 없는 양의 지식이다.
감정, 연금술, 귀족의 문화 등등… 지식이 많아도 너무 많고 노련해서 경이를 넘어 기괴함까지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전혀 못 느끼니 더욱 답답할 노릇이었다.
‘천재의 영역이라기엔 도가 지나쳤다고! 이건 무슨 마족이라고 해야 설명이… 아!’
마족.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암흑신과 마왕의 권속들. 유구한 삶을 살며 세상을 파멸시키려고 하는 어둠의 존재들로 현재는 저 북쪽 먼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내려와서 세상을 파멸시키려 하는 자들이었다.
‘마족인가? 하긴 그러면 설명이 가능하긴 해.’
너무나 많은 지식의 양과 언제나 여유 넘치는 태도, 매력을 비롯한 의문점이 한 방에 설명이 되어 버리는 마족설이었다.
하나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르는 판이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마족과 손을 잡은 것 자체가 교단은 물론 모든 인류 문명에 반역하는 일이기에 그녀는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어쩌지……?’
"식사 다 됐습니다, 마법사님. 먹고 얼른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아, 예. 알았어요."
하이디의 말에 정신이 든 그녀는 일단 식사를 하면서 지금은 이대로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마족설이든 뭐든 아직 추측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계속 베오날드의 곁에 있어야 하는 만큼 지속적으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어둠이 깊게 깔린 밤. 먼 곳에서 하이디와 셀리나가 보고 있는 젤시 황녀는 계속해서 틈을 찾고 있었지만 역시 황실 기사단의 호위와 바니로 백작가의 병력을 혼자서 뚫고 도망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병력이 너무 많아. 게다가 전부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틈을 찾는 것도 불가능해. 어쩌지……?’
바니로 백작가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꽤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이제부터는 대부분 마을이나 성안에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도망칠 틈을 찾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그러니 숲에서 야영하는 날에 승부를 봐야 했지만, 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지라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역시 성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아냐. 그것도 힘들 것 같아.’
성에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높은 성벽을 넘기도 힘들고, 그리고 도망쳐도 인근 영지들의 성이 봉쇄될 게 뻔해서 도망치기 매우 힘들 것 같았다.
마음이 꺾일 것 같은 난관과 답답함. 하지만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늦은 밤에도 자는 척하면서 언제든 도망칠 찬스를 찾고 있었다.
"이봐! 저기 저거 뭐야?"
"저게 대체 뭐지?"
‘뭐지?’
번쩌억!
어느 순간 갑자기 모두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젤시도 그곳을 보자 거기엔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추는 거대한 빛기둥이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동화나 신화에서 신의 사자가 강림할 때 저런 게 나올 거라고 상상하던 것과 같은 거대한 순백색과 황금빛이 섞인 아름다운 빛의 기둥이었다.
너무나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기둥이었기에 그녀뿐만 아니라 황실 기사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저게 대체 뭐지?"
"젠장! 대장님, 어떻게 하죠?"
"일단 병사들을 보내 봐라! 예사 징조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자는 애들 다 깨워!"
"아, 알겠습니다!"
황실 기사단원들은 상급자의 명에 따라서 긴급히 대응하기 시작, 바니로 백작가의 병사들과 기사들과도 합류해서 급히 모였다.
그리고 신기한 빛기둥은 점점 거대해졌고, 정찰을 보내긴 했지만 아직 기별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저 기현상의 정체를 밝히고자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게 뭘까요? 왜 빛나는 거지?"
"나도 모르겠소. 일단 병사들을 보냈으니 상태를 파악하겠지. 뭐가 있을지 모르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허어~"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빛이군요. 으으음……."
황실 기사단과 바니로 백작가의 기사들은 그 빛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찬란한 금빛이 섞인 백광, 어릴 적 모험담에서 들은 것 같은 그런 빛이 밤을 빛내는 광경. 어두운 밤 감성적이게 되다 보니 더욱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정찰 도착했습니다!"
"아, 왔는가? 그래, 빛은 뭐였나?"
"그… 빛이 있는 곳에 웬 상자가 있었습니다. 저 빛기둥의 빛을 뿜어내는 상자였습니다. 다만 거기서 엄청난 소리와 빛이 강해서! 도저히 다가가서 손을 댈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상자라. 마도구나 유물인가?"
각자 자신들이 보낸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바니로 백작가의 기사와 황실 기사단.
두 쪽 모두 눈앞에 지금 거대한 빛기둥을 뿜어내고 있는 유물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말에 결국 기사급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양측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상서롭지 않은 유물이라…….’
‘이게 왜 갑자기 나타나면서 빛을 뿜은 걸까? 함정인가?’
‘위험한 물건이려나? 빛과 소리가 강렬하다고 했으니, 뭔가 마도구일 가능성이 높은데…….’
‘유용한 유물이나 마도구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데…….’
비단 전란의 시대가 아니라도 신비한 힘을 가진 유물이나 보물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 바니로 백작가의 기사들은 현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그런 마음은 마음으로만 접어 둬야 한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상대는 황실 기사단. 하나하나가 제국에서 인정받은 괴물들만 모인 집단이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깔끔하게 물러난 것이다.
"저희는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알았네. 그럼 우리가 조사하도록 하지."
눈치가 있는 바니로 백작가의 기사가 알아서 물러나고, 황실 기사단 대장은 3명의 황실 기사를 추가로 데리고 움직였다.
남은 황실 기사는 둘에다 병사들도 우왕좌왕하면서 모두 빛에 시선이 쏠린 상황. 마차 안에 있던 젤시 황녀는 어쩌면 이것이 도망칠 유일한 찬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탈주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