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온 방송의 내용은 공교로운 것이었다.
[아아! 아아! 베오날드 캘러메인 학생, 베오날드 캘러메인 학생, 시급히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 학생, 베오날드 캘러메인 학생은 지금 바로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후우~ 그러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보러 가 볼까?”
베오날드는 벌떡 일어난 다음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검을 차고서 곧바로 대련장으로 향했다.
자신은 여기저기 원한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이 정도 대비는 상시 해 둬야 한다.
지금 생각한 인간 외에도 시샘과 질투, 열등감 그런 걸 가진 인간이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야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기본이었다.
‘과연 어떤 수를 나에게 쓸까? 기대가 되는걸?’
베오날드는 누가 어떤 수를 쓸지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이 아직도 경기장의 관람석에 남아 있는 가운데, 그곳에 서 있는 자들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화려한 로브를 걸친 노인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나무 모양의 엠블럼이 달린 귀족 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 거기에 다른 하나는 완전 무장을 한 로이드 회장이었다.
‘…저 노친네는 아마 아카데미의 총학장일 테고, 저 귀족은… 뿜어내는 예리한 기운 하며 가슴에 있는 문양으로 보건대 크멜 가문의 사람이겠군. 로이드 회장과 같이 온 걸 보면 뭔가 심상치 않다.’
“저놈인가? 으으음…….”
“왔군요. 허허허.”
로이드 회장을 빼고 베오날드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두 사람의 시선. 하나 베오날드는 당당하게 그들의 시선을 받아치면서 마찬가지로 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학장의 눈은 현기가 있긴 했지만 살짝 탁해진, 전형적인 권력에 아부하는 타입, 그리고 거구의 남성은 언뜻 거칠고 단순해 보이지만 안에 예리함이 깃들어 있는 날카로운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타입이었다.
‘이 귀족, 보통 남자는 아니군. 뭐, 옆에 저 로이드인가 하는 친구가 눈치 보고 있는 것만 해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놈, 상당히 꺼림칙하군. 배짱은 두둑하지만 이 시선은… 마치 뱀인가?’
그리고 크멜 공작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베오날드를 보면서 그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고, 뱀이라는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적의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꿍꿍이속이 느껴지는 시선, 하나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간교한 뱀. 서로 빠르게 탐색을 끝내고 난 뒤 학장은 태연히 베오날드에게 말을 걸어왔다.
“크흠, 한참 크나큰 격전을 치르고 대합전을 준비하기 위해 쉬는 중에 불러서 미안하네만 급한 용무가 생겨서 말이지. 소개하지. 이분은 바로 제국의 전선 한 곳을 책임지고 있는 크멜 가문의 가주이자, 제국 최강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진 크멜 공작님일세.”
“앗!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켈러메인이라고 합니다.”
베오날드는 신분에 대해 알자마자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공작이라고 하면 귀족 중에서 최고 서열. 게다가 무인으로서도 정점이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 없이 높으신 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일어서도 좋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이다음 열릴 체육제의 대합전을 멈추고 자네를 부른 것은 바로 날세. 이유에 대해서 짐작 가는 곳이 있나?”
“어찌 없겠습니까? 제가 크멜 가문 아래에서 배운 자들을 격파한 것 때문이 아닐는지요.”
“맞다. 하나 그것은 사건일 뿐, 왜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까지 아는가?”
“음, 무례할 수도 있는 발언을 허락하신다면 생각한 것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허락한다.”
“저 때문에 크멜 가문의 명예와 위신이 깎이고, 그로 인해 현재 크멜 가문의 후계자인 로이드 회장님의 입지가 곤란해져서인 게 아닙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베오날드는 흐트러지거나 막힘없이 자신이 이긴 것으로 인해 크멜 가문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말했다.
이는 베오날드에게는 아주 쉬운 문제로, 귀족 가문 내부에 관한 일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파악하는 건 아주 쉬웠다.
“정답이다. 아주 정확하게 파악했군. 제법이야. 보통은 잘 몰라서 설명을 요구할 텐데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러면 역으로 묻는 게 빠르겠군. 그 명예와 위신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는가?”
“역시 직접 싸워서 절 이기는 것이겠지요.”
“아니, 그보다 더한 걸 보여 줘야 하는 법이지. 로이드!”
턱!
크멜 공작이 로이드 회장을 부르자 베오날드의 몸에 무언가 던져졌다.
새하얀 장갑 한 켤레.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결투 신청 방법이었다.
베오날드가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크멜 공작을 바라보았고, 크멜 공작은 곧바로 입을 열고 대답해 주었다.
“바로 생사(生死)의 결투로, 우리 가문의 명예와 위신을 깎은 적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고작해야… 아직 애들 싸움인데, 수가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애들이라곤 해도 15세가 지난 이상 엄연한 성인이지. 책임을 져야 할 땐 져야 하는 법이고, 저 아이는 우리 크멜 가문의 후계자일세. 그 무게는 엄연히 다르지.”
“그건 애당초 가주이신 공작님의 책임 아닙니까? 가문을 후계자에게 안전하게 물려주는 것, 그것도 가주의 책무일 텐데요. 고작 어린아이 재롱잔치 레벨에서 졌다고 위협받을 정도라니 말이 됩니까? 오히려 큰 패배에 무너지기 전에 작은 패배를 맛본 덕분에 자만심을 누르고 다시 일어설 기력이 생긴 걸 좋아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베오날드의 당찬 말에 로이드 회장과 아카데미 학장은 안색이 새파래지며 벌벌 떨었다.
미사여구가 붙었지만 그냥 대놓고 직설적으로 ‘네가 잘못한 걸 왜 나한테 따지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말이 맞고 틀리고 이전에 제국의 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직언을 하는 것 자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이나 다름없었기에 크멜 공작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핫! 이거 한 방 먹었군. 맞아! 맞아! 네놈 말이 틀린 게 아니지. 봤냐? 로이드! 남자라면 이 정도 배짱과 의기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있는 배짱 말이야! 크하하하하핫!”
‘그것도 모르나? 참 나.’
“그래, 그러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도록 하지. 내가 잘못한 덕분에! 이 녀석이 실수를 하면 곤란한 상황이 되었고, 자네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이력에 오점이 남게 되었지. 그래서 내가 대합전을 취소시키고 이렇게 결투를 하자고 주장하게 된 걸세. 이제 됐나?”
“그러면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다지 결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놓고 거절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크멜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에 대해 제대로 모르지만, 설마 공식적으로 건 결투를 거절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허! 그렇게 나오는 건가?”
“예. 받아서 득이 될 게 없으니까요. 이겨 봐야 명성이 늘어나도 크멜 가문의 후계자를 죽였다는 부담만 늘어나고, 그리고 로이드 회장님에겐 이미 한 번 패배한 몸이라서 겁도 나고 말이죠.”
“도망치면 비겁자라는 말을 들을 거고, 기껏 여기까지 얻은 명예에 흠집이 날 텐데?”
“어차피 잃어 봐야 저는 기사도 아니라서 그저 불성실한 학생, 시골뜨기, 잡종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간교한 놈 같으니……!”
궁극의 뱀인 히드라를 상징으로 삼는 노이멀 가문에겐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었다.
애초부터 ‘귀족’이라는 존재의 미덕이 ‘간교함’인데, 그걸로 비난을 하다니 개그가 따로 없는 거였다.
베오날드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장갑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래서 본래는 이 장갑은 받지 않는 게 순리이지만, 이번엔 특별히 받도록 하죠. 읏챠.”
능글맞게 웃으며 베오날드는 땅에 떨어진 장갑을 주웠다.
이로써 베오날드와 로이드의 생사(生死)를 다투는 ‘결투’가 성사된 것이었다.
“네놈… 무슨 꿍꿍이냐?”
“공작님, 이제부터는 결투 당사자인 성인끼리 이야기해야겠지요.”
“큭! …네노옴.”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돌려받은 공작은 이를 갈면서 베오날드에게 살기를 피웠지만, 그는 500년 전부터 이미 적응된 상태라서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
공작은 꿈쩍도 안 하는 베오날드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발 물러서면서 로이드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아버님은 웬만한 사람의 말에는 꿈쩍도 안 하시고… 또 명실상부한 이 제국 최강의 ‘검’인데…….”
로이드에겐 거의 절대자나 다름없는 것이 아버지인 크멜 공작이었는데, 그를 상대로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며 대화하는 베오날드를 보자 그동안 품었던 감정과는 다른 존경심이 생겨난 상태였다.
“그냥 제가 겁이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도… 제 아버지에겐 별말 못했습니다. 하하하.”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는 지금 생의 아버지인 더스티클록 자작이 아니라 500년 전 자신을 가혹하게 키웠던 벨릭스 폰 노이멀이지만, 로이드는 대강 알아듣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결투는… 당연히 지금 하는 건 아니고, 오늘 열심히 싸웠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지금으로부터 3일 뒤, 정오에 이 자리에서 하게 될 것이다. 승패는 말했다시피 생사(生死)의 결투.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것으로 한다. 무장은 서로 마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하고, 증인은 각자 귀족 신분 이상으로 2명씩 데려온다. 여기에 이의 있나?”
“그렇게 해야 속이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대합전은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결투가… 대합전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아마 아버님이 그렇게 조정해 두실 게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지요.”
결국 결투에 합의하고 물러나는 베오날드. 굳이 승낙하지 않아도 되는 결투를 받은 것은 이렇게 하는 쪽이 분위기가 더 끝내주게 달아오르기 때문이었다.
시시한 아카데미 학생들의 체육제를 넘어서 진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결투’로 격상된다면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어떤 수를 쓰나 걱정했는데 고작 결투라니, 나야 반갑지. 오히려 최고의 흥행 요소이니 말이야. 우선은…….’
“자네, 무슨 일이 있었나?”
“아, 그게 말입니다.”
베오날드는 돌아오자마자 케드론에게 자신이 크멜 가문의 심기를 너무 크게 건드린 바람에 결투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케드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멜 가문의 비겁한 행동에 대해서 분노했다.
“아무리 가문의 명예와 위신이 깎여도 그렇지! 그래 봐야 아카데미의 체육제인데 공작이 직접 나서다니! 심지어 멋대로 대합전을 폐기시키고 결투로 바꿔? 이건 심각한 월권이네!”
“아마… 황제 폐하와 암묵적으로 합의된 거겠지요. 공식적으로 아카데미의 주인은 그분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럼 어떻게 할 텐가?”
“당연히 준비를 하러 가야겠죠. 이번 결투는… 무장은 마련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준비한다, 라고 했으니까요.”
“잠깐, 그거… 이런 비겁한 놈들 같으니! 뻔히 가문에 내려오는 마법 무구나 보구 같은 걸 쓰겠다는 거 아닌가?”
은근슬쩍 결투 조건에 들어간 저 문장의 속셈을 눈치챈 케드론은 분노했지만 베오날드는 태연했다.
그 또한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은 것이었다.
보통은 오래되고 부유한 무가인 크멜 가문에서 준비하는 무구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베오날드 또한 이런 일에 대비해서 따로 준비를 해 두었기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케드론을 안심시키고는 결투 준비를 위해 아카데미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