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폐하, 놈의 행적과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귀족’과 ‘기사’가 생겨난 이후로 전해져 내려온 수많은 이야기, 음유시인과 수많은 작가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젊고 용기 있는 기사가 사랑을 위해 검을 들고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기야 하지. 하나 그럼 내가 역경이라는 건가?”
“물론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철저하시고 영민하신 페하의 판단엔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저 귀족들은 다릅니다. 자신의 가문과 권력 관계 같은 건 어차피 ‘가주’와 후계자만 생각하면 되는 부분. 그 외의 나머지는 오롯이 쾌락과 즐거움에 몰려 있습니다.”
“…으으음!”
“그런 상황에서 지금 그 전설과 음유시인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상황을 겪고 있는 뛰어난 외모를 가진, 무용과 지혜를 겸비한 기사가 나타나면 어떻겠습니까? 심지어 황녀 전하와의 근거 없는 로맨스, 게다가 용병의 피가 섞인 것은 권력적으로는 약점이지만 이야기적으론 오히려 더 극적이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도 있고, 또 어두운 배경이 있으면 빛은 더 밝게 보이는 법.
지금 이 상황에서 베오날드의 출신은 오히려 극적인 장치였다.
심지어 황녀와의 로맨스에서 신분 차이가 더 벌어지니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으로 인해 자극성이 높아져서 귀족들의 구설수에 더 많이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한데 그래 봐야… 촌극이지 않은가? 기껏해야 즐길 거리에 지나지 않는데, 놈이 무얼 할 수 있겠나?”
“가상의 이야기에도 깊이 감명을 받으면 사람은 목숨까지 내놓곤 합니다. 옛 통일 제국 시절에 생긴 유명한 고전 문학 사건 아십니까? 너무나 잘 쓴 소설에서 ‘자살’을 크게 미화하는 바람에 그 당시 유력 귀족들이 여럿 자살했던 사건 말입니다.”
“…그런 일이?”
“가짜에도 깊게 매료되면 사람이 목숨도 내놓는데, 하물며 진짜의 매력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심지어 상대는 가상으로 상상이나 할 법한 주인공상 그 자체입니다. 무예와 지혜, 정치 감각 모두를 가진 아주 멋진 젊은 청년입니다. 그런 그가 젤시 황녀 전하와의 염문이 있고, 그것을 자신이 증명하여 폐하가 관계를 허락한다면 해피엔드로 끝나면서 명예에 상처를 입지 않겠지만…….”
“으으으음!”
그래, 지금 찬란하게 빛나며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스토리를 실시간으로 쓰고 있는 베오날드가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막은 것은 바로 황제 자신이었다.
젤시 황녀는 이미 바니로 백작에게 시집가기 위해서 수도를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공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귀족들 몇몇은 황제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바니로 백작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놈이……!”
축사를 할 때 베오날드가 지었던 미소가 섬뜩하게 황제의 가슴을 찔렀다.
젤시 황녀가 귀빈석에 없을 때, 베오날드는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자신이 일개 학생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놈이 감히 나를! 능멸해?”
“폐하, 어쨌든 이 사안은 쉬이 볼 일이 아닙니다. 이대로 가면 놈은 황제 폐하를 거스르는 무리들을 결집시키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만 해도 벌써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생기는 판국이라…….”
“…그럼 어찌해야 하나? 놈을 몰래 처리해야 하나?”
“이미 처리하긴 늦은 시점입니다. 지금 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어설프게 끄려고 하면 반발이 크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놈이 죽으면 그건 순교가 될 거고, 폐하의 이름은 역사 속에 폭군으로 남게 되겠지요.”
쾅!
결국 제라도 칼레움 황제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시골 촌뜨기 반푼이 귀족 애새끼에게 농락당해서 자기 발등을 직접 찍어 누른 꼴이니 더 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저걸 그대로 두나? 아니면… 정말로 바니로 백작에게 간 젤시를 불러들여서 줘야 하나?”
“그건… 저도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건은 마치 뱀이 엉켜 있듯이 너무나 꼬여 있기 때문에… 손대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끄으으으응!”
뱀. 이 뱀과 같은 베오날드의 방식이 곧 노이멀 가문의 방식이었다.
자연스럽게 웃으면서도 어느샌가 뱀에게 꼬이고, 조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그런 노이멀 가문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궁극의 뱀, ‘히드라’. 결코 쓰러지지 않으며 머리 하나를 자르면 둘이 나와서 물고, 가진 독은 신도 두려워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는 생물, 그야말로 궁극의 뱀이었다.
그리고 뱀에게 완전히 당한 칼레움 제국의 황제가 손쓸 방안을 계속해서 고민하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급보입니다. 지금 베오날드 그자가 기어이 다섯 번째 기사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 결국 혼자서 검과 방패를 꺾어 버렸습니다!”
급히 올라온 황실 기사 하나가 예를 갖추면서 급보를 전했다.
베오날드가 홀로 다섯 기사들을 연이어 쓰러뜨린 쾌거를 이룬 것에 지금 이 공연장에서도 미미한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어이 우려하던 일이……! 현장 상황은?”
“지금 이 진동을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비록 검과 방패 동아리의 최강자 로이드 크멜이 나오지 않았다곤 하나, 혼자서 5연전을 치러 내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아~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폐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두통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있는 건 거구의 남성으로, 입고 있는 옷이 터질 것 같은 강력한 육체를 자랑하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나 거친 외향과 다르게 황실 기사단과 레기온 경이 순간 기척을 놓칠 정도로 기운이 잘 정돈된 달인의 풍모를 지닌 그는 가슴엔 굳건한 나무 모양으로 세공된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오오! 크멜 공작!”
“애초에 우리 가문에 크나큰 모욕을 준 놈을 살려 둘 수 없으니 말입니다.”
피해자는 비단 황제뿐이 아니었다.
‘검과 방패’ 동아리의 주류는 회장이 크멜 가문의 후계자인 로이드 크멜인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크멜 가문에서 검술을 배운 자들이다.
더구나 이런 대회에 나올 자들이라면 일정 이상의 성취를 한 나름 후기지수들인데, 그들이 고작 듣도 보도 못한 시골뜨기 잡종 단 한 놈에게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니, 명문 무가로서 오랫동안 칼레움 제국에 수많은 기사와 장군을 배출해 온 크멜 공작가의 위신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하다못해 발데리안 가문의 일원이라서 혹은 거기서 오랫동안 머물며 뭔가를 배웠다면 몰라도…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희 크멜 가문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폐하, 제가 놈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 크멜 공작.”
“어떻게 하긴요. 없애야지요. 저희 가문에 한해서는 놈을 없애도 될 만큼 지금 치욕적인 상황입니다.”
크멜 공작의 말대로 황제는 베오날드를 없애는 게 불가능하지만 크멜 가문은 베오날드에게 직접적으로 패배해서 굴욕이 쌓인 만큼 그를 죽여도 될 ‘명분’이 존재했다.
황실 기사단장인 레기온 경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의견에 긍정을 표했지만, 문제는 누가 나서서 죽이느냐였다.
“한데… 누구에게 그것을 시킬 것입니까? 설마 우리 제국의 유일한 특급 기사이자 블레이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지신 크멜 공작님이 직접 나서실 건 아닐 테고, 게다가 암살 같은 걸 하면 황제 폐하가 지시했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레기온 경도 농담이 심하시군요. 그랬다간 명예를 되찾기는커녕 치졸한 가문으로 낙인찍힐 겁니다. 학생 레벨에서 벌어진 일은 역시 학생 레벨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며, 치욕은 치욕을 만든 자가 씻어야 하는 법.”
“그러면 설마? 로이드 군을?”
“예. 후계자인 로이드와 정정당당한 일대일, 생사의 결투를 시킬 겁니다. 대합전 대신 말이죠. 그 정도가 되지 않고선 명예를 되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후계자…….”
“이런 치욕조차 극복하지 못한 후계자 따위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일전에 이기긴 이겼다고 하니 못 이기진 않겠지요. 패배하면 그걸로 약한 싹을 제거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귀족에게 있어 가문의 명예란 목숨과도 같은 것. 그것에 상처를 입히고 되찾지 못한 후계자라면 필요 없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이 기회에 후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었으니 황제는 부디 그의 후계자 선에서 베오날드를 쓰러뜨려 주길 바랐다.
크멜 공작은 그대로 예를 갖추고 떠났고,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한편으론 만약 저 결투에서 베오날드가 이기면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리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기에 여신께 한 번 더 베오날드가 죽기를 기원했다.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오날드! 베오날드! 베오날드! 베오날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계획한 일이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거나 그들을 매료시킨다는 건 묘한 흥분이 드는 일이었다.
베오날드는 적극적으로 투구를 벗고 사람들의 환호성에 호응하며 세리머니까지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기적 같은 5연승! ‘검과 방패’ 동아리의 완전한 패배! 심지어 그것을 이룬 것은 시골 캘러메인 영지에서 올라온 다크호스! 베오날드! 추가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며어어언! 그는 무려 황실 기사단 소속! 불굴의 레파르트 경이 추천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인재입니다! 그의 눈은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아아아!”
‘이리저리… 포장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걸? 아카데미 측으로서도 흥행하니 좋은 거겠지만~’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마도구로 해설 겸 아나운서 역할을 하는 학생의 말이 울려 퍼지면서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저쪽은 저쪽대로 기왕 베오날드가 이변을 만든 것을 이용해서 이번 체육제를 제대로 흥하게 할 생각으로 열심히 베오날드에 대해 떠들면서 사람들에게 더욱 극적인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후우~ 이제 남은 건 대합전이군. 아차차~ 지친 기색을 보이면서 힘겹게 걸어야지.’
“하나 아직 상황은 1 대 1! 대합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검의 정원’의 사기는 지금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으며 ‘검과 방패’ 측은 매우 침울한 상황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제 ‘대합전’의 준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다들 기대해 주십시오!”
“수고 많았네. 그런데 정말로 다섯을 모두 이길 줄은 몰랐군.”
“수고했어.”
“크멜 가문 놈들, 완전 X 씹은 표정이더군.”
“잘했어!”
“아주 부럽군. 아무튼 대합전은 우리에게 맡기라고~”
짝짝짝.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검의 정원’ 동아리 사람들이 베오날드를 반기며 박수를 쳤다.
혼자서 공로를 독차지한 건 배가 아프지만 그것 이상으로 경쟁자의 명예에 제대로 먹칠한 것은 어마어마한 성과였고, 1 대 1이 됨으로써 마지막 대합전이 남아 있었기에 그들은 순수하게 베오날드를 축복했다.
‘후우~ 대합전에선 이제 좀 살살 해도 되겠지. 이기기만 하면 되니까. 그럼 자연스럽게 황제 앞에 가서 시상을 하면서 한마디 올리면 되는 거지.’
예고된 대합전도 사실 전망이 매우 밝은 상황인 게, 상대는 이미 5 대 1로 졌다는 패배감에 기세가 눌려 있었다.
승률은 압도적으로 높아진 상황. 그게 아니더라도 이길 생각인 베오날드는 지쳐서 널브러진 척하면서 다음 대합전 때 과연 적이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 아아! 잠시 알려 드립니다. 지금 운영 측 사정으로 인해 긴급회의가 열렸고, 대합전은 취소되었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아! 다시 한번 알립니다. ‘대합전’은 현재 취소! 취소되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긴급회의가 끝나고 난 뒤에…….]
‘…으음? 아, 역시 바보는 아니라서 그런가? 뭔가 대응하려고 하는 것 같군.’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베오날드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짓을 저지를 자는 이미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던 것이다.
자신 때문에 졸지에 러브 스토리의 악당이 되어 버린 황제 아니면 자신 때문에 가문의 위상을 완전히 구겨 버린 크멜 가문, 둘 중 하나뿐.
‘가능성으로 치면… 크멜 가문이 7, 황제가 3. 아니면… 둘이 손잡고 대처했을 수도 있겠군. 자, 어떤 대응을 해 올지 들어 볼까?’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방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