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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97화 (97/259)

[97화]

“어머, 어떻게 해? 지쳤나 봐.”

“그야 4명이랑 연속으로 싸우니까…….”

“처음에 빨리 쓰러뜨린 건 이런 걸 예상해서였나?”

베오날드가 적절히 위기를 연출했다는 걸 모른 채, 사람들은 피와 땀을 흘리면서 휘청휘청하면서도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베오날드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더구나 그는 3명의 기사와 연속으로 싸우고 4명째 맞서는 중. 사람들은 아슬아슬한 그의 싸움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교대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 싸우는 거지?”

“글쎄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크멜 가문의 후계자님이나 황제 폐하를 바라보지 않았던가요?”

“아, 그럼 혹시 폐하와 모종의 거래를?”

웅성웅성…….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말 무궁무진하다.

베오날드가 별말을 하지 않고 그저 행동만 보여 줬는데도 사람들은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이런저런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거기다 그동안 있어 온 일과 정보가 합쳐지고 보태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부풀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걸 보니,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이야기가 부풀려지고 있겠군.’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귀족가에 퍼지는 소문이 얼마나 밑도 끝도 없이 과장과 확대를 통해서 살이 붙는지는 베오날드가 더더욱 잘 안다.

치열하게 연기하는 싸움 속에서 베오날드는 슬슬 또 상대가 지치기 시작하자, 타이밍을 잡고 상대의 검을 쳐서 날린 다음 목에 겨누고 말했다.

“제, 젠장! 이런!”

“승부… 난 것 같군요.”

“큭… 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아주 준수하게 오래 싸웠지만 검을 떨어뜨리고 제압당했으니 결국 승패는 갈리게 된다.

그러자 사람들의 환호성은 이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본래 기사 전공도 아닌, 비극적인 혈통 때문에 검은 제복을 입은 평민 학부 관료 전공의 학생이 지금 홀로 기사 전공에 하나같이 명문 무가에서 수련을 한 검과 방패 동아리의 기사 넷을 연이어 쓰러뜨린 것이니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굉장해! 정말 굉장해!”

“레파르트 경이 왜 추천했는지 알겠군요. 혼자서 넷이라니!”

“근데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아, 하긴 한 번만 해도 힘든 격전일 텐데, 그걸 네 번이나 하면 확실히 힘들겠죠.”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싸우려는 것 같은데요?”

밖에서 보기엔 베오날드는 무릎을 꿇고 힘겹게 숨을 고르면서 체력을 비축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사실 좀 힘들긴 했다.

연기하면서 싸우려니 집중력은 2배, 상대에게 손속을 봐주면서 자신은 연출까지 해야 하니 시력이 2배로 들어가다 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후우~ 아무리 그래도 이거… 쉬운 건 아니군. 투기장의 검투사들이 얼마나 힘든지 다시 보게 될 것 같군. 후우… 후우…….”

“…혼자서 재미 보는 건 좋네만? 슬슬 교대해도 되지 않나?”

“지금 이 분위기를… 후우… 후우… 깨시려고요?”

“베오날드! 오오오! 베오날드! 힘내라! 베오날드! 5명째도 가는 건가아아아? 베오날드! 와아아아아아! 베오날드! 일어나라라라!”

사람들의 환호성. 귀족들도 체면을 잊고서 베오날드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이 화려한 호응 속에 잠시 퇴장해도 되겠건만, 베오날드는 역으로 이것을 이유로 다섯 번째 기사와 싸움을 하고자 고집했다.

케드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반대로 검과 방패 동아리 측은 지금 전원 X 씹은 표정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나 다섯 번째 기사는 준비하면서 완전히 분위기에 압도된 표정이었다.

“…어… 어어.”

“무랄드 경, 괜찮으십니까?”

“젠장, 완전히 얼었어. 로이드 회장님, 어쩌죠? 기권이라도 시킬까요?”

검과 방패 동아리 쪽의 다음 선수는 완전히 얼어붙은 상태. 지금 경기장은 베오날드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분위기와 압력에 공기까지 뜨거워지고 있는데 저기로 들어간다?

파도나 태풍과 맞서서 이기고자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이미 베오날드 혼자서 4명을 쓰러뜨렸는데, 이긴다고 해도 상대측엔 아직 쌩쌩한 4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든 승산이 없었기에 멘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로이드 회장은 안타까운 눈으로 보면서도 여기서 물러나선 안 되기에 그를 설득했다.

“도망치면… 그보다 더한 굴욕이 없다. 때론 패배가 확정된 싸움에 몸을 맡겨야 할 때도 있는 법. 네가 도망치면 너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문, 제국 아카데미, 우리 검과 방패 모두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다. 알았나?”

“예, 예. 회장님.”

“그리고 여기서 패배한다고 해도… 다음 대합전에서 반드시 이겨서 최후에 승리하면 더 큰 명예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러니 정신 차려라, 무랄드 경! 어차피 여기서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으니 말이다.”

“예!”

간신히 설득이 된 듯 그는 각오를 다지고 대련장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섯 번째 경기. 베오날드는 사람들의 환호성에 보답해 주고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경기를 시작했다.

비록 지쳐 있어도 이미 흐름은 그가 완전히 탄 상황이기에 여기선 힘이 없어도 힘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 쇼를 황제 폐하가 쭉~ 봤어야 했는데 말이지. 역시 높으신 분은 바쁘시군.’

비어 있는 황제의 자리를 보며 베오날드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는 베오날드의 두 번째 경기가 끝나고 세 번째 경기가 지연되고 있을 때, 이번 대전의 승패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어서 더 이상 볼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장소도 둘러보기 위해 사라졌을 것이다.

귀족 학부에서 진행하는 행사는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있었고, 평민 학부에도 얼굴 정도는 비춰야 황제로서 모두를 돌본다는 이미지를 구축할 테니 말이다.

‘하나에 집중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는 크지.’

연출과 동시에 황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베오날드의 연기는 완벽하게 먹혔고, 황제가 돌아왔을 때 갑자기 인기가 폭발하게 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는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환호성 속에서 다섯 번째 경기가 드디어 시작, 베오날드는 다시 한번 화려하게 위기를 연출하기로 했다.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바로 대합전에서 이루어질 테니까.

***

한참 베오날드가 인기를 얻고 있을 무렵, 칼레움 제국의 황제, 제라도 칼레움은 현재 귀족 학부에서 주최하는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오로지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설계되고 건축된 공연장이기에 바깥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는지 절대 알 수 없는 상황.

심지어 초대된 대귀족들 외엔 황실 기사단과 상급 기사들이 깔려 있어서 다른 이야기는 일절 차단되고 있었다.

‘…지겹군. 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

황제는 지루하다는 본심을 감추고서 음악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이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든가, 아니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길 원했지만 황제로서의 체면과 귀족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듣는 중이었다.

“음, 이번 곡은 특별히 좋은 것 같군요.”

“예. 유명한 작곡가인 베른리 자작의 신곡이라서도 좋지만 역시 연주하는 아이들이 잘하는 것도 있겠지요.”

“허허허, 그렇군요.”

‘속물 놈들…….’

대체 이런 게 뭐가 좋은 건지? 서로가 칭찬을 하면서 하하호호 해 대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 황제였다.

저렇게 겉으로는 웃고 좋아서 난리지만 돌아서면 서로를 비방하고,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서 뒤통수칠 궁리만 하는 놈들. 제국에 대한 충성심, 명예 같은 걸 방패 삼는 버러지들이 노는 꼴을 평생 보는 상황이다.

‘…그래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흠, 그런가? 그렇군.”

“호오? 거기서 그런 이야기가?”

“알았네. 이 연주회가 끝나면 바로 가겠네.”

음악회에 집중도 안 되는 판인데, 서로 X꼬를 빨며 떠드느라 바쁜 대귀족들에게 하나둘 기사들이 와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급한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인가? 황제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기묘하게도 대귀족들에게 전부 기사들이 와서 무언가 쑥덕거리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의미했고, 아래쪽 관객석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뭐지? 왜 다들 예의 없게 나가는 거지?’

아직 연주는 한창 진행 중인데, 아래쪽 관객석에 있는 학생과 귀족들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지휘자 빼고, 연주하는 학생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갑자기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황제도 이젠 뭔가 사고가 터진 거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레기온 경, 뭔가 일이 일어난 것 같으니 바로 상황을 알아보게.”

“예, 폐하.”

그는 즉시 자신을 호위하는 황실 기사단장인 레기온 경에게 상황을 알아보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약 5분여가 지난 뒤에 모든 의견을 종합한 레기온 경이 황제에게 다가와서 차분히 보고를 올렸다.

“폐하, 지금 소란스러운 것은 바로 기사 전공 학생들의 대전이 벌어진 곳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

“예. 그… 황제 폐하께서도 보셨던 베오날드라고 하는 자가 5인 대전에서 기사 넷을 연속으로 격파하고, 지금 다섯 번째 기사를 격파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흠, 혼자서… 다섯을? 역시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이렇게 소란스러울 일인가?”

제국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무(武)의 천재가 이변을 일으키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베오날드는 이미 레파르트 경의 추천이라는 보증수표가 달린 놈이라서 이 정도 기량이 있으면 오히려 놀라워할 게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황제였지만, 이건 그가 엔터테인먼트와 귀족들의 가십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내린 오판이었다.

“…폐하, 물론 그 사실 자체만으로는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만, 문제가 그… 그놈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스토리가 딸려 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토리?”

“…예. 그러니까 이게… 하나의 면만 볼 게 아니라, 너무 다각도로 연계된 사건이 맞물려서 벌어진 일이라서 설명이 복잡합니다, 폐하.”

레기온 경은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뛰어난 무력뿐만 아니라 지성도 겸비한 자였지만, 그 또한 이 사태를 한 번에 설명하기엔 난해할 정도로 일이 복잡하게 꼬여 있다고 먼저 말해 두었다.

그리고 여러 번 사건과 정보를 확인하고, 그다음 밖에 돌아다니는 소문과 귀족들이 부풀려 놓은 이야기,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다는 점, 거기에 황제가 벌인 일과 황녀와의 관계를 모조리 확인하고 돌아온 다음에야 베오날드의 싸움이 왜 인기가 있는지 간신히 끝맺음할 수 있었다.

“…그게 어째서 인기와 관련된다는 건가?”

최대한 세세히 설명했지만 그걸 황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또 별개의 문제다.

극단적인 계산과 합리만을 고집해 온 황제가 귀족들의 즐거움, 쾌락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그저 정치를 위한 수단이나 교류를 위한 조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한계. 레기온 경은 이 황제에게 이걸 이해시키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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