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사람은 감성의 동물이다.’
제아무리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해도 결국 인간은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실수도 하고, 타인이 볼 때 절대 하지 않을 이상한 짓도 사람에 따라서는 서슴지 않고 해 버린다.
그 가문만을 위해서 미친 짓을 했던 벨릭스 폰 노이멀도 오페라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을 정도로 인간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벨릭스 그 개 같은 새끼 생각만 하면 평소랑 달라지고 말이지.’
“자! 마상 창 시합은 ‘검과 방패’ 동아리가 승리한 가운데! 과연 ‘검의 정원’ 동아리는 여기서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역전을 이루어 내서 승부를 ‘대합전’으로 미룰 것인가! 지금 그 승부인 단체 대련이 시작됩니다! 기사들 입장!”
‘그럼 어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연극을 시작해 볼까?’
사회자의 진행대로 소개가 모두 끝나고, 드디어 첫 대전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인사할 때 상대를 보니 예상대로 로이드 크멜은 이번 5 대 5 대전엔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곧바로 대전은 시작되었고, 검의 정원 측은 예정대로 베오날드가 선봉에 서기 위해 대전장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자 반대편에서 검과 방패 동아리의 대표가 올라왔다.
“흥, 검은 제복 따위가 잘도 이 자리에 섰군. 게다가 로이드 님의 평판을 깎이게 만들다니, 절대로 용서 못한다.”
‘크멜 가문 사람인가?’
갑주와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단 가슴에 로이드 크멜과 같은 문장이 그려진 휘장을 달고 있었기에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놓고 오만한 말투로 베오날드를 깔보면서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은 건 솔직히 베오날드 자신도 이해되는 것이라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오, 시작부터 뜨겁군요. 그럼 이제 전투를! 시작~ 하겠습니다!”
“로이드 님이 봐준 것이라는 걸 철저히 느끼게 해 주마!”
‘자, 그럼 최고의 쇼를 시작해 볼까?’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십식(十式)-쌍두사’.
그리고 베오날드는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검술 중 가장 강력하면서 화려한 절기, 쌍두사를 시전했다.
하나의 검 휘두름, 하나 날아오는 검광은 2개.
검술의 이름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크멜 가문의 기사는 대충 첫 검광에는 반응해서 오러로 막아 냈지만 동시에 막아 내지 못한 다른 검광이 투구를 갈라 버렸고, 그는 이마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이럴… 수가!”
‘좋아. 이걸로 하나.’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전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결정 난 승부. 강렬한 임팩트와 함께 보는 이들은 베오날드를 향해서 환호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주먹을 쥔 손을 들고 흔들며 투구를 벗고 미소를 띤 채 관중들에게 호응해 주었다.
엔터테인먼트의 기본. 초반에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 그다음 호응하면서 얼굴을 알리는 것이다.
“세상에! 저 다리온 경을 단 한순간에 쓰러뜨리다니!”
“베오날드… 라고 했던가? 로이드 회장과 겨루었다는 게 진짜였어?”
“세상에… 엄청 잘생겼네? 어머어머!”
“확실히 발데리안 가문에 의탁하고 있다던가? 백작가에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군요.”
관람석에 있는 귀족들은 화려한 스타트를 끊은 베오날드에 대해서 웅성거리면서도 환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모인 특별석에는 그를 돌보고 있는 발데리안 가문의 귀족들도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이 모이고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그들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저 기사는 분명 발데리안 부인 댁에서 머물고 있죠?”
“예. 호호호홋! 그렇죠. 지금 저희 가문에 머물며 은혜를 받고 있죠. 하지만 얼마나 기특한지 받기만 하는 아이는 아니더군요.”
“오? 그렇습니까?”
대단한 인물을 자신이 돌봐 주고 있다는 것만 해도 귀족의 명예는 오른다.
그 대단한 인물이 신세 지기 위해 고른 가문인 만큼 가치가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 귀족들은 손님 대접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그 가치를 지금 증명하고 있었고, 동시에 뿌려 둔 씨앗이 싹트는 중이었다.
“거짓말쟁이!”
“아냐. 이거 진짜 그리폰 깃털 맞는다니까! 저기 저 형아가 직접 태워 줬는걸? 봐. 엄청 세잖아.”
“우으으으!”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신경전을 하게 되고, 당연히 아이들은 자신들의 형이 되는 이들이 활약하는 아카데미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마찬가지로 발데리안 가문의 아이들은 베오날드의 활약과 함께 예전에 받은 그리폰 깃털로 만든 장신구를 자랑할 찬스가 온 것이었다.
당연히 자신만이 가진 귀한 것을 통해 우월감을 맛본 발데리안 가문 아이들은 어깨를 으쓱했고, 다른 가문의 아이들은 쉽게 얻기 힘든 그것을 보며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아아아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부모들에게 베오날드의 이름이 퍼져 나갔다.
심지어 지금 대전에서 활약하고 있기에 그 이름은 더 빠르고 깊게 그들의 머릿속에 박혔다.
그리고 우월감을 맛보고 싶은 건 어린아이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머릿결이라든가, 피부가… 상당히 좋아 보이십니다? 발데리안 부인, 뭔가 비법이 있으신지요?”
“호호홋! 그러니? 비법이야 있지. 하지만~ 쉽게 알려 주진 못하니까~ 비법이겠지?”
50대에 접어든 발데리안 부인은 베오날드가 만들어 준 샴푸와 비누의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우월감을 맛보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만들어 준 샴푸와 비누 덕분에 깨끗하게 관리된 머리카락과 피부는 세월의 흐름은 역전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나이대에서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식단까지 조율해 주니 평소 상태보다 좋아지는 건 당연, 대비 효과로 인해서 그녀는 한층 나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딸들의 미모도 나아지니 사방에서 비법을 물으러 몰려들었고, 딸들도 우월감을 맛보다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것도 다 저희 가문에 머무는 베오날드 님 덕분이랍니다. 후후후훗, 머릿결이 다르죠?”
“대체 그건 무슨?”
“이건 비밀인데~”
‘비밀인데~’ 하면서 푸는 정보엔 비밀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자연스럽게 이 흥행에 맞춰서 그의 이야기는 계속 화제가 되었고, 베오날드는 이것을 잘 활용하기 위해 두 번째 대전도 압도적으로 승리, 하나 세 번째 대전에서는 손목의 힘을 좀 빼고서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보기에도 5 대 5 대전일 경우 첫 번째, 두 번째는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낸 것 같기에 자연스러웠다.
“퍼딜라스 경! 반드시 이기게! 그 잡종에게 지지 마!”
“밀어붙여어어! 그러고도 크멜 가문의 문하생이냐!”
“역시 이래야지! 먼저 나간 애들은 방심했을 뿐이라고!”
‘좋아, 좋아. 슬슬 달아오르는군.’
캉! 챙!
사실은 지금 이 상대는 베오날드의 수준보다 훨씬 아래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그러지 않았다.
5명을 상대로 이기는 것도 이기는 거지만, 그걸로 어떤 스토리를 만드느냐가 지금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은 스스로가 쓴 연극의 주인공.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검을 휘둘러 사람들을 매료해야 하는 것이 임무였다.
“후욱… 후욱… 네노오오옴! 제법이구나! 검은 제복 주제에!”
‘아, 이 녀석, 너무 빨리 지치는데? 좀 더 분위기를 끌어 올려 줘야 할 텐데… 어쩔 수 없지. 네 번째, 다섯 번째 녀석은 기대해도 되려나?’
“크억!”
“시합 종료!”
상대가 좀 더 열심히 싸워서 위기감을 끌어 올려 줬으면 싶었던 베오날드는 결국 틈을 잡아 상대를 넘어뜨리고, 검을 겨누어서 시합을 끝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베오날드는 연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땀을 닦으면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는 척했다.
“후우~ 후우~ 후우우우~”
“베오날드! 괜찮은가? 무리 안 해도 되니 물러나도 좋네!”
“아뇨. 아닙니다! 선배님. 더 싸울 수 있습니다아아!”
힘든 모습을 보이자 자연스럽게 검의 정원 동아리의 대기석에 앉아 있던 케드론이 예상한 대사를 적절하게 날려 왔다.
그 말을 받아 베오날드는 힘을 내는 것처럼 신음을 내며 자세를 다시 잡고는 다음 상대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관객들이 들으라는 듯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예, 저는 지금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저번의 설욕을 되갚기 위해서라도! 다음 싸움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로이드 회장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상 창 시합에 나갔고, 대합전에 나가기 위해 이번 일대일 대전에선 무장을 푼 채로 대기석에 앉아 있는 상황. 갑자기 베오날드가 자신을 보자 적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그 알기 쉬운 반응에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해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애들은 솔직해서 좋다니까~ 하하핫.’
“저놈, 로이드 회장을 노려보고 있어.”
“즉, 혼자서 5명을 이기고 저번의 굴욕을 갚겠다는 건가?”
“오… 어떤 의미로는 기사답군.”
웅성웅성…….
스토리는 전부터 짜여 있었다.
로이드 회장과 일대일로 수십 합을 겨루어 패배한 귀족 출신이지만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인 재능 있는 기사 베오날드. 그리고 황녀와의 로맨스 의혹을 겪고, 이번 체육제에서 무용을 뽐내기 위해 나와서 힘들지만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 나간다.
아름다운 외모, 거기에 비극 같은 불운한 혈통과 뛰어난 재능,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넘은 사랑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기사, 찾아오는 각종 시련들!
“세상에, 정말?”
“어머! 세상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니?”
“그런데 지금 벌써 혼자서 셋이나 쓰러뜨렸다고요? 어머머머! 게다가 엄청 잘생기기까지?”
가상의 로맨스 소설로도 귀족가에 아주 잘 팔리는 소재들이 모인 최고의 상황이다.
그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면? 영화가 현실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다.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몰려 있는 시선과 환호를 느끼며 예정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생각하고 네 번째 상대를 맞이했다.
일부러 지쳐 가는 상황을 이겨 내려는 듯 땀을 닦으면서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혼자서 넷을 상대한다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제멋대로 설치는 것도 여기까지다!”
‘역시 자존심이 높아서 예상이 쉽군. 자, 그럼 클라이맥스로 올라가 볼까나~’
베오날드는 네 번째 상대와 검격을 조금 주고받은 다음, 마치 지쳐서 피할 수 있는 것도 못 피하는 척하다가 드디어 상대의 검이 투구를 스치고, 비껴 올려 맞도록 스스로 조절하고 땅을 구른 다음 일어난다.
관객들은 안타까운 신음과 비명을 내뱉으며 모두 베오날드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머리를 다쳤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거기에 힘들다는 듯한 거친 호흡 소리와 흐르는 피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모두 베오날드가 원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예정대로 지친 호흡을 회복하기 위해 물러나는 척 한 걸음 도망치며 위기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