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95화 (95/259)

[95화]

그리고 체육제에서 서로의 기량을 겨룰 기사 전공의 학생들이 모두 입장하기 시작했다.

가슴엔 각자가 속한 동아리 문양, 어깨를 보호하는 견갑엔 가문의 문양을 새긴 두 무리가 등장했다.

베오날드도 당연히 이 무리에 끼어 있었는데, 그는 캘러메인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견갑에 가문 문양은 새기지 않았다.

‘그녀가… 없군.’

줄을 서서 입장한 베오날드는 경기장 바깥에 마련된 귀빈석을 바라보았다. 주요 행사라 다른 황족들은 모두 불려 왔지만 젤시 황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검과 방패’ 동아리 쪽 대열에 서 있나? 하고 고개를 돌려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왜 그러나? 긴장되나? 하하, 마음 편하게 하게. 훈련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흠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핫!”

그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황제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아주 크게, 크게! 정신이라도 나가 버린 것처럼 웃는 그를 바로 옆에 있던 케드론 발데리안은 물론 뒤쪽에 서 있는 다른 학생들까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혹시… 어디 아픈가?”

“아! 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 후우~ 아, 죄송합니다. 제 나름의 긴장을 푸는 방법이라서요.”

“그거 긴장 푸는 방법이었나? 하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본 베오날드는 급하게 변명을 했고, 다행히도 다들 조금 이상하게 여길 뿐 더 이상 파고들진 않았다.

하지만 미소를 참느라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어져서 그를 주시하는 황제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대체 저놈이 왜 웃는 거지? 그냥 미쳐 버린 것이 틀림없군.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것인가?’

순간적으로 의아했지만 다시금 자신이 한 조치를 점검한 결과 그는 절대로 꿀릴 수가 없었다.

상급 기사에 준하는 무력을 가진 황실 기사단원을 무려 6명이나 붙이고, 거기에 바니로 백작가의 병사와 기사들까지 붙어 있다.

제아무리 놈이 수도에서 온갖 발악을 했어도 절대로 젤시 황녀의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그러니 그저 저 웃음은 미치광이의 발작이나 다름없다고 여겨도 좋을 것이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냥 광대의 광소와 다를 게 없어.’

“폐하, 슬슬 축사를 할 시간입니다.”

“크흠, 알았네.”

선수들의 입장이 끝나고, 제국 아카데미의 체육제를 기념하는 축사를 하기 위해 황제는 일어섰다.

이제 베오날드에 대해선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그는 본래의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단상에 서서 증폭 마법이 인챈트된 유물 마이크에 대고 준비해 둔 연설을 읊었다.

‘아무 문제없겠지. 그래, 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저 인간의 생각이 너무 어리석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아. 미치겠군.’

베오날드와 황제의 생각이 엇갈리는 가운데 황제의 축사가 끝나고, 곧바로 체육제가 시작됐다.

귀족 학부 기사 전공의 유이한 2개의 동아리 대항전. 하지만 제국을 나누는 귀족들의 파벌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인 싸움이기에 ‘체육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비장함과 살벌함이 감돌고 있었다.

“보자, 첫 경기는 마상 창 시합. 정해진 대로 무장하고 준비해라! 새로이 정한 규칙 잊지 말고!”

“예! 회장님!”

“저기, 선배님, 전 마상 창 시합에 나가지 않으니 잠깐 고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와도 될는지요?”

“빨리 다녀오도록. 무슨 일이 생기면 대리 출전해야 하니까.”

첫 경기는 ‘마상 창 시합’으로, 이미 준비된 학생들은 무장을 하고 말을 이끌면서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각 동아리에서 8명씩 보내는 토너먼트전이었기에 꽤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만큼 베오날드가 무언가를 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관객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인, 셀리나, 하이디에게 다가가서 그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긴급한 상황이다. 하이디, 셀리나, 둘은 알테리오를 타고 곧장 데런에게 가라. 그리고 최근 수도를 떠난 대규모 행렬이 있는지 조사해서 그쪽을 쫓아가도록. 아무래도 황녀 전하는 지금 수도에 없는 것 같다.”

“그게 갑자기 무슨 지시죠?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지금 황녀 전하를 탈취하라는 건가요? 제정신이에요? 황실 기사단도 있을 텐데?”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황녀 전하의 행적은 쫓지만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든 것은 그녀 스스로의 의지에 달린 것이니~ 너희는 도움만 되어 주면 된다. 아무튼 얼른 출발해라. 이미… 며칠 분의 거리가 벌어졌을 거다. 밤낮 가리지 말고, 빨리 달려가라.”

하이디는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 셀리나를 끌고 곧장 출발했다.

이걸로 한 가지는 대응 완료. 이제 남은 건 여기서 멋들어지게 할 일을 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떠나는 둘을 확인하고, 세인에게도 별도의 지시를 내린 다음 곧장 검의 정원 동아리 대기실로 돌아갔다.

***

같은 시각, 수도에서 약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제국 남부 숲길.

칼레움 제국의 황제라는 작자도 아주 성격이 더러운 게, 베오날드가 알아차렸을 때 덧없는 희망에 매달리는 꼴을 보기 위해 일부러 체육제 전날에 젤시 황녀를 바니로 백작가에 보낸 것이었다.

황족을 호위하는 행렬답게 주변엔 황실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바니로 백작가와 수도의 병사들이 붙은 거대한 행렬. 젤시 황녀는 홀로 마차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계획하던 일을 시행할 시간을 노리는 중이었다.

‘가능하면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용기를 낸 그녀는 오늘 출발하기 전에 할 수 있는 한 홀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를 호위 중인 황실 기사만 6명에 그 종자와 병사들은 합쳐서 300명, 거기에 백작가의 병사 500명.’

그 외 각종 시종과 하인들까지 모두 합쳐서 1,800명에 달하는 인원들이 자신 하나를 백작가에 배달하기 위해 달라붙은 상황이다.

여기서 도망치려면 보통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불가능. 일단 혼자가 될 수 있어야 하지만, 이 마차 내부를 제외하면 어디든 혼자 도망갈 곳이 전혀 없었다.

‘…뭔가 방안이 없을까?’

그때 베오날드를 만나러 가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날부터 그녀는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도주에 필요한 기술을 얻고자 이리저리 대책을 강구했지만, 이미 황제가 자신을 고립시키고 시집보내려 한 시점에서 그 준비를 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허튼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미명하에 책 한 권조차 얻기 힘들 정도로 감시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카데미에 있는 내 소지품을 챙기러 간다는 핑계로 잠깐 몇 가지 물건을 구할 시간은 벌었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다는 걸 느끼는 그녀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의지를 가지고 준비했으면 모를까, 세상사라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고 어리석은 존재인지 그녀는 다시 깨닫게 되었다.

‘난 아무것도 아닌 인형이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진 않아.’

그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보다 더한 역경과 싸우고, 두려움에 맞서는 베오날드를 생각하며 용기를 내고자 했다.

차분하게, 급하게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틈을 찾기 위해 환경을 알아 가자고 생각한 그녀는 마차가 정차하길 기다렸다.

정차한 뒤에는 바니로 백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오가며 어떻게 해서든 도망칠 틈과 물건을 얻을 방안을 모색했다.

‘필요한 건 일단 갈아입을 옷과 말, 식량과 식수, 그리고 이런 작은 나이프가 아닌 제대로 된 무기. 무장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챙길 시간은 없어.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뭔가 사람들의 정신을 돌려놓을 큰 사건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그런 게 쉽게 생길 리 없었다.

게다가 바니로 백작가의 기사들은 몰라도 여기 자신을 호위하는 황실 기사 6명은 모두 상급 기사에 준하는 무력을 가졌고, 수많은 임무와 수라장을 거친 베테랑들이라 더더욱 틈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꼭 결혼식 전에 탈출하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야.’

그래,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기회는 반드시 온다.

그녀는 계속 의지를 불태우면서 이 구속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걸 해 나가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

제국 아카데미, 마상 창 시합장.

투콰앙!

마상 창 시합.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기사들이 무예를 펼칠 수 있는 무대.

마갑으로 무장한 말,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 거기에 마나 호흡법으로 강화되고, 오러까지 사용하는 그들이 기마술과 함께 펼치는 무용은 이 시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승리한 기사에겐 엄청난 명예와 보상이 따르니 기사 전공의 귀족 학생들은 자신이 빛나길 바라며 최선을 다했다.

“이번 대전의 승자는! 안넬스 가문의 후계자, 라인 경입니다. 이로써 4강 진출!”

“으음, 아쉽군. 자네가 그리폰으로 참여했으면 좋았을 텐데.”

“선수는 동시에 2개 종목까지밖에 참여 못하잖습니까?”

“그렇지.”

3개의 종목으로 겨루지만 다른 기사들에게 최대한 기회를 많이 주고 특정 무가(武家)의 독주를 막기 위해 걸린 일종의 참가 제한이었다.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단체 일대일 대전과 대합전에 참여하기 때문에 지금 마상 창 시합엔 참여하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베오날드가 그리폰 알테리오를 타고 나섰다면 엄청 인기를 끌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케드론이었다.

“갑자기 참여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리폰을 타고 나서면 솔직히 반칙이잖습니까? 하하핫.”

“인기는 끌었을 거 아닌가. 아무튼… 벌써 결승이로군.”

투콰아아아앙!

둘이 이야기하는 사이, 이미 4강은 끝나고 결승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합은 두 기마가 충돌할 때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승패가 갈리게 되고, 마상 창 시합의 승리자가 결정되었다.

가슴에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려진 갑옷을 입고 갑주로 무장한 늠름한 갈색 준마 위에 탄 기사가 부서진 랜스를 들고 사람들의 환호에 응하며 투구를 벗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바로 로이드 크멜. 검과 방패 동아리의 회장이자 명문 무가인 크멜 가문의 후계자로 마상 창 시합에서 우승함으로써 검과 방패 동아리가 먼저 1점을 쟁취하게 된 것이었다.

“로이드! 로이드! 로이드!”

“역시 크멜 가문의 후계자다워. 단 한 번도 스치지도 않고 이겨 버리다니!”

“와아아아아!”

“역시 로이드군. 아니꼽지만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저놈은 이제 단체 일대일 대전 아니면 대합전 중 하나에만 나온다는 건데…….”

“어느 쪽이든 제가 상대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단체 일대일 대전은 절 선봉으로 보내 주십시오.”

“경계해야 할 건 로이드만이 아닌데… 자신 있나? 5 대 5이니까… 설사 나온다고 해도 다른 기사 4명을 상대해야 할 텐데?”

단체 일대일 대전의 룰은 승자전. 이긴 자가 계속 싸워서 남은 적군이 없어질 때까지 겨루는 것이다.

이쪽이 더 시합이 흥미진진해지고, 결정적으로 5판으로 정해진 판수보다 더 많은 시합이 될 수도 있으며 정해진 상대와 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략성과 변수도 생기기에 생긴 룰이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가장 천한 제가 먼저 나가는 게 다른 귀족분들에게도 인상이 좋게 잡히지 않겠습니까?”

“알았네. 그 정도는 신경 써 주지.”

그렇게 케드론의 배려에 의해 단체 일대일 대전은 베오날드가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의 무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