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 황제의 성격만 해도 벨릭스 폰 노이멀 같아서 호승심이 가슴에 불꽃처럼 타오르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압박해 주니 베오날드는 흥분으로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등산가는 산이 높고 어려울수록 불탄다고 하지 않던가?
베오날드 또한 벨릭스 폰 노이멀을 대신해서 쓰러뜨리는 만큼 강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투지로 불타오를 것 같았다.
‘내가 그것만 노릴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슬슬~ 제대로 해 볼까?’
“뭐가 그리 좋은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선배님. 설욕을 해서 승리할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베오날드는 케드론과 함께 말을 타고서 발데리안 가문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체육제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훈련하면서 서로 친숙해지기도 해서인지 부담 없이 대화를 계속 주고받았다.
“그렇군. 그나저나… 돌아가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부탁 말입니까? 뭐든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신세 지는 상황인데, 꺼릴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그, 철없는 동생들이 자네 그리폰을 만져 보고 싶다고… 에휴~”
“하하하하! 그게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다만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는지라 선배님과 병사 몇 명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발데리안 가문의 혈족을 해치게 되면 제가 더 면목이 없으니 말이죠.”
“알았다네. 기꺼이 그러지.”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가신이 되는 것을 제외하고 발데리안 가문 사람들과 친교를 늘리면 늘릴수록 베오날드에게 나쁠 게 없었기에 그는 기꺼이 가문 아이들에게 알테리오를 만지거나 타고 놀 수 있도록 허락했고, 발데리안 가문에 돌아가자마자 별도의 우리에서 자고 있는 알테리오를 보러 갔다.
삐이이이이잇!
이젠 완전히 성체가 된 알테리오는 한쪽 날개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누가 봐도 늠름한 그리폰의 모습이었기에 모두가 가슴 뛰는 외형이었지만, 여전히 베오날드 앞에선 어린 새끼처럼 행동하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래그래, 요새 많이 못 놀아 줘서 외로웠지? 아, 아직 다가오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 흥분한 상태라서… 발톱 보이시죠?”
“알고 있네.”
“우와아아아아~”
“엄청 멋있다아아~”
“형님, 저거 진짜 탈 수 있는 건가요?”
백색과 갈색 털, 노란 부리의 늠름한 얼굴에 날렵하고 잘빠진 고양잇과 짐승의 몸체.
위험종 몬스터이지만 그 멋진 외양 덕분에 일부 가문에선 문양으로까지 쓰는 그리폰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애교를 떠는 모습에 발데리안 가문의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나저나 우리에 있을 때도 봤을 텐데, 너무 과하게 흥분하는 거 아닙니까? 동생분들…….”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거의 못 봤을 테니 말이지.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타 보는 건 어떤가?”
“그러려고 했습니다. 잠시만요. 기왕 타는 거, 멋들어진 기분도 내야지 않겠습니까?”
철컥!
베오날드는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전쟁을 할 때 입었던 마갑을 꺼내 알테리오에게 입혔다.
그냥 있어도 늠름한 자태인데, 강렬해 보이는 강철의 갑주까지 걸치자 야성미는 좀 줄었지만 중장기병 특유의 무장한 멋이 합쳐져서 더욱 늠름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된 알테리오였다.
“그리고~ 읏챠~ 옳지, 알테리오~ 진정~ 진정. 자, 육포 먹고~ 옳지.”
“다시 봐도 정말 굉장하군. 그걸로 실제 전쟁터에도 나섰나?”
“예. 이 녀석을 숨겨 놨다가 적 기사들이 우회해서 아군 후방에 올 때, 측면에서 덮쳐서 적 기병들의 속도와 위력을 줄이는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아시다시피 본래 그리폰은 하늘에서 지상에 있는 말과 소를 노리잖습니까? 천적이기에 그 진심 어린 포효 소리만 들어도 적 기병의 말들이 놀라서 난리를 치죠.”
“아무튼… 슬슬 진정되었으면 부탁 좀 들어주겠나? 애들이 거의 죽을 지경으로 바라보는군.”
“알겠습니다, 선배님. 자, 천천히~ 천천히~ 알테리오~ 천천히~ 병사분들은 혹시 모르니 언제든 도련님들을 빼낼 수 있게 긴장해 주십시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안 되니 말입니다.”
베오날드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발데리안 가문의 아이들에게 그리폰 체험을 시켜 주면서 계속해서 친교를 쌓는데, 여기서 500년 전 베오날드 공작으로서 귀족 가문을 구워삶던 사교의 기술이 빛나고 있었다.
발데리안 가문 아이들에게 그리폰 체험은 물론이고 그는 특별한 선물까지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게 뭐예요? 깃털?”
“알테리오의 깃털로 만든 장식입니다. 도련님들이 나중에 검이나 갑옷을 마련하시게 되면 거기에 다시라고 만든 것이죠. 아시다시피 그리폰은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용맹한 몬스터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용맹이 깃들길 바라는 것이지요.”
“우와아아~”
알테리오를 키울 때부터 셀리나에게 선물하는 사이사이,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틈틈이 만들어 둔 것이다.
그리폰의 깃털이라는 점만 빼면 길거리에서 파는 흔한 장신구만도 못한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그리폰의 깃털이기에 가치가 압도적으로 상승했고, 발데리안 가문 아이들의 인심도 한 번에 얻어 냈다.
“아니면 지금 입으시는 옷에 다셔도 됩니다. 빼서 다시 검이나 갑옷에 달면 되니까요. 그럼~ 선배님, 저는 이 녀석 산책 좀 시켜 주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들어가면 분명 운동 부족이라서 돼지가 되어 버릴 것 같거든요. 또 한 번 뛰고 와야 얘도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알았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도 하나 줄 수 있나? 검에 달고 싶은데 말이야. 아, 아버님 것도 하나 더.”
“물론 가능하죠. 하지만 선배님 것과 가주님의 것은 보석과 금속을 좀 더 써서 제대로 된 걸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
“알았네. 기꺼이 기다리지.”
권력 투쟁과 영지 운영 또한 베오날드의 장기가 맞았지만 실제 베오날드가 황제를 등에 업고 통일 제국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바로 이런 면이었다.
상대가 만족하는 적절한 선물과 대접, 그리고 가끔은 부탁을 받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해서 얻은 인맥들로 권력을 조율하고 자신의 세력을 꾸리는 것. 특히나 연금술이라고 하는 전문 기술을 온갖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했다.
“이게 뭐죠?”
“식객으로 놀고먹는 것도 그래서 보답으로 만든 것입니다. 요새 샤남인이 운영하는 상회에서 파는 그 미용 비누보다 한 단계 좋은 것입니다.”
“이게요?”
“직접 써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제가 연금술에 조예가 좀 있어서 말이죠, 마님. 그리고 추가로 하나 더. 이건 샴푸라고 하는 머리카락에 쓰는 비누입니다. 그 머리 감을 때 쓰는 향유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조금씩 덜어서 거품을 낸 다음 머리카락에 쓸어내리듯 사용하시면 머릿결이 좋아질 겁니다.”
데런에게 준 비누 레시피는 그저 빙산의 일각. 대귀족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베오날드는 연금술 기술로 일반적인 물약은 물론 미용에 필요한 온갖 상품을 제조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했었다.
‘사람은… 결국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군. 아니지, 천년만년이 지나도 안 바뀌겠지. 한 번 했던 일을 또다시 하는 거니 훨씬 쉽군.’
비록 귀족 가문의 주인은 남성인 가장이었지만 밤과 침대, 그리고 후계자들의 주인은 대부분 여성이었기에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물품들을 독점하던 베오날드는 절대 권력자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게 또 데런 놈에게 접촉하는 변명이 되어 줘서 아주 고마웠지. 레시피를 알려 달라고 노래 부르는 것까지 리얼할 정도… 아니, 그건 진심이었겠지만.’
다만 이것들을 제작하기 위해서 또다시 데런의 비누 공장에 방문해야 했지만, 이것도 나름 황제의 눈을 속이는 좋은 방법이었다.
자신이 데런을 만나는 목적을 이것으로 위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연막으로 참 좋은 일이군. 자, 어디 감시자 양반, 머리 좀 아프게 놀아 보지?’
‘젠장할……!’
황실 첩보부 요원은 현재 베오날드를 관찰하면서 그가 가진 재능과 능력이 너무나 많은 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다.
단순히 체육제 우승을 노리는 줄만 알았는데, 분명 캘러메인 가문에서 쫓겨난 놈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 이상으로 귀족 가문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매우 능숙했던 것이다.
“대체 뭐 하는 놈이란 말인가? 이게 10대라고?”
10대 후반의 소년이 이런 재능과 기술, 지식을 모두 지닌 것만 해도 기가 찰 노릇. 지금 몸을 의탁하고 있는 발데리안 가문만 해도 이미 반쯤은 가문의 일원 같은 느낌으로 친하게 지내는 판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발데리안 가문도 엄연히 귀족 가문이기에 다른 귀족 가문과 만나는 무도회나 사교회 같은 행사에서 베오날드에게서 얻은 물건을 자랑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이런 귀족 간의 사교 영역은 첩보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사업을 무너뜨린다든가, 납치나 암살을 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지금 놈은 발데리안 가문의 가호를 받고 있고, 또 비누 사업은 황실 재정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황실에 말해서 사업을… 빼앗으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것도 힘들지. 다른 대귀족들에게도 황실만큼 상납을 하고 있으니…….’
데런은 생각이 있는 만큼 뇌물을 황실 한 곳에만 뿌려 두지 않았다.
골고루 뿌려 놔야 한쪽에서 칼을 겨누었을 때 다른 쪽을 불러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아주 현명하게도 발데리안 가문을 비롯해서 다른 귀족들에게도 돈을 뿌려 놨고, 여차할 경우 비호를 받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황제 폐하께서 정하실 일이지. 어우~ 이건 도저히 나 같은 일개 첩자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보고나 하자.’
결국 첩보원은 자신이 손댈 수준을 넘어선 일이 벌어지자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그는 아직도 베오날드의 진짜 비장의 카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며칠 뒤.
감시 속에서도 베오날드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사이 체육제의 날이 당도했다.
제국 수도에서 나름 큰 행사라서 일반인들은 보통 들어오지 못하는 아카데미도 오늘은 개방되었기에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왔다.
평민들은 평민 학부에서 열리는 경기를 보거나 각종 장사를 하러 왔고, 귀족들은 가문의 명예와 전공을 살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와 있었다.
귀족 학부의 경기엔 이곳에 자식들을 보내 놓은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기사 전공 내에서 둘로 나뉜 동아리이자 파벌의 대표인 ‘검의 정원’과 ‘검과 방패’ 동아리 간의 대전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인파들이 자리해 있었다.
칼레움 제국의 황제 또한 자국의 미래를 이끌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이 총출동하는 이 행사를 놓칠 수 없었기에 아카데미로 와서 황후와 다른 부인들을 비롯한 자식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서 곧 열리는 대결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단 하나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바로 황녀 젤시 칼레움의 자리였다.
‘…놈이 이 자리를 보면 얼마나 놀랄지 기대가 되는군. 허허.’
황제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첩보원의 제보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미 젤시를 바니로 백작의 영지로 보내 버린 지 오래였다.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노력하는 걸 보고 대단하다 여겼지만, 그래 봐야 이곳에 젤시 황녀가 없으면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헛수고한 것을 깨닫고 절망할 베오날드를 생각하며 황제는 귀족 학부의 기사 전공 선수들이 입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