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허어…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게다가 폐하, 놈은 데런이라는 샤남인이 운영하는 상단과도 접촉을 했습니다.”
“샤남인?”
“예.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그에게 다가가서 간을 봤었고, 지속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이상한 책을 나르거나 거점을 마련해 주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거기에 최근 유행하는 미용 비누 사업도 어쩌면 그 베오날드라는 자가 알려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놈이? 아, 그런 내용이 있긴 있었지.”
“예. 놈은 연금술 지식도 가지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게다가 그 데런이라는 자가 있는 상회는 전혀 연금술과 비누 제작에 관한 연고가 없는데, 갑자기 상품을 내놓은 걸 보면 확실합니다.”
황제는 첩보원의 설명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놈의 가치는 계속 올라가니, 황제는 불쾌감과 함께 자신의 계산과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후회, 더 화나는 것은 그놈이 자신을 갖고 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쾌함, 그리고 점점 높아져 가는 값어치에 이제라도 판단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으으으으응~”
“폐하?”
‘…되돌리려 해도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젤시를 미끼로, 근 수년간 바니로 백작에게서 받은 재보와 지원을 생각하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사 지금 그 모든 걸 돌려준다고 해도 그의 감정은 심히 상해 버리리라.
또한 이미 전갈도 보낸 만큼 이 사안을 엎어 버리면 바니로 백작뿐만 아니라, 자기 밑의 다른 귀족들의 반감도 커질 것이다.
“으으으으으으음!”
더욱 문제인 것은 어딘가 타협할 중간 지점을 찾고 싶은데, 안 찾아진다는 점이었다.
베오날드도 아깝고, 바니로 백작을 내칠 수도 없으니 둘 다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할 선을 내야 하는데, 낼 수가 없어서 곤란한 황제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지금 이대로 젤시 황녀를 바니로 백작에게 보내는 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2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못 건지는 경우가 있지. 그러니 우선 절대 놓쳐선 안 될 토끼를 잡는데…….”
하나 결정이 났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이제 그놈이 또 그 샤남인 상인과 무엇을 꾸미는지가 문제였는데, 혹시라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다른 무언가를 할지가 걱정이었지만 알 수 없는 것을 상상한들 나오지 않는다.
“자넨 놈이 뭘 하려고 상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나?”
결국 이럴 땐 다른 사람의 지혜를 빌려야만 한다.
황제가 자신이 지시를 내린 첩자에게 놈의 목적을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 답했다.
“음, 상인을 만났다고 한다면 역시… 돈 혹은 사업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그 비누의 제조법을 베오날드라고 하는 자가 줬다면 자신의 지분을 요구할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금이 있으면 마법 무구 같은 것을 사서 자신을 강화할 수 있겠지요. 크멜 가문의 후계자와 수십 합을 겨루어 냈다면 그런 요소가 복합적으로 들어간다면 이길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으으음, 계속 이야기해 보게. 다른 가정이라도 좋네.”
“예, 계속하겠습니다. 다른 가정을 해 보면 역시 사업을 도와서 수도의 상권을 휘어잡을 생각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아는 귀족 편을 통해서 황실에 들어오려는 수작을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계속해서 첩자가 이야기하는 온갖 방법들을 들으면서 막을 방법과 대책을 하나둘 체크하기 시작했다.
황성 경비와 젤시 황녀의 구속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상권 문제는 어차피 해결할 때쯤이면 이미 젤시는 바니로 백작의 품에 있을 테니 무시, 그다음 마법 무구와 대회 대처는 크멜 가문에 정보를 주는 걸로 일단 해내기로 했다.
“그리고 일정을 좀 당겨서 먼저 혼인시키기 위해 보내고 난 뒤에, 내가 차후에 바니로 백작 영지에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게 좋겠군. 으음… 이 정도면 될 것 같군. 자네는 그 친구 감시를 지속하게.”
“예.”
“후우우~ 할 일이 많은데, 이것에 시간을 너무 썼군. 발데리안 가문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그저 황실 기사들을 보내서 잡아들이면 그만. 그러면 잡아 두고 고문이든 회유든 해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도 되고, 정 안 되면 그냥 죽여서 후환을 없애도 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는 상상일 뿐이다.
‘아무튼 그 정도 인재라면 결국 적대하면 적대하는 대로 해가 될 것이다. 젤시를 보내는 게 확실해지면 다른 타협안이라든가 당근을 던져서 화해를 요청하자.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결코 계속될 수 없는 일이니…….’
제국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해야 한다가 그의 신조. 그것을 위해 적으로 두었던 베오날드를 아군으로 둘 수 있고, 아군으로 두었던 베오날드를 적으로도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게 황제였다.
그는 부디 제국의 미래에 먹구름이 끼지 않길 빌며 다른 사안들을 처리해 나갔다.
***
같은 시각, 젤시 황녀는 현재 자신의 방을 나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서 실질적인 연금 상태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혼인을 진행한다는 황제의 명에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어차피 올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이지?’
적어도 아카데미는 졸업하고 나서 할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너무나 조급하게 진행되는 혼약에 의아해졌다.
근래에 이변이라곤 드디어 또래이자 사람다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베오날드와 어울린 사실밖에 없었다.
비록 남성이라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흑심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거리를 두려 했던 자라서 평온하게 대화할 수 있었는데, 애초에 자신의 주변에 상시 감시를 깔아 놓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경계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였다.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베오날드와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녀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알 수 있었고, 이 황궁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지 더욱 크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주변에 시종, 메이드, 하인, 기사, 첩보부 사람 등등… 사람은 많았지만 마치 홀로 무인도에 있는 것 같은 고독함을 느끼는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어머?’
쿵쿵쿵, 철컥철컥철컥!
갑자기 자신의 방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은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혹시 황제 폐하나 황후가 찾아올 수 있기에 경계하면서 예를 갖출 준비를 했지만, 소란스럽기만 할 뿐이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궁금해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대고서 밖의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 때문에 사람이 늘어난 거지?’
“…전달 사항은 이상이다.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그 베오날드라는 놈이 지금 무슨 수작을 벌이려고 한다고 대장님이 전했다.”
“예. 그나저나 이거 완전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로맨스 스토리 같네요. 넘을 수 없는 신분과 혈통의 벽을 넘어서 사랑을 쟁취하는 거, 로망 아닙니까?”
“크흠! 웃을 일이 아니다. 황녀 전하를 빼앗기면 우리 목숨이 달아나게 될 거다. 그러니 철저히 감시해라.”
“예!”
‘이게 무슨 소리… 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기사들의 말을 해석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들의 말로는 베오날드가 지금 자신을 노리기 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수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에 대한 경비가 강화된 것으로 인해서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는데, 그녀로선 왜 베오날드가 자신을 노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는 분명 나에 대해 깊게 생각 안 할 텐데?’
수많은 귀족들의 구애를 받았던 그녀였기에 애정, 육욕 등등… 욕망에 찬 시선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베오날드의 경우 그저 자신의 미모에 감탄하는 정도뿐이었지, 보통 남성들이 보이던 반응은 일절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곧 사랑 같은 이유는 아니라는 건데,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오기 위해서 방법을 강구하고 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대체 무슨 이유로? 엄연히 칼레움 제국에 반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전설에 나오는 용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어도 이보다 덜 무모하리라.
심지어 그는 자신의 몸이나 지위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그럼 어째서 그가 제국과 맞서 가며 자신을 위해 싸우는 건가?
‘…어째서?’
그녀는 아직 베오날드의 개인사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그가 전생에 자신의 아버지였던 벨릭스 폰 노이멀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황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심과 극복을 위한 도전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젤시 황녀로서는 베오날드의 이 무모한 도전이 대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믿을 수 없어. 그러면 설마? 그 사람은… 순수하게 날 위해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는 동화책이나 성서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용감한 기사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괴물을 처치하고 마왕에게 도전하는 이야기, 성서 속의 성자가 신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고난과 역경, 악마의 유혹을 견디고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황제가 붙여 준 가정교사나 기사 모두 세상의 무서움과 냉혹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그녀가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만난 다른 귀족과 평민들도 대부분은 자신이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두근… 두근!
젤시 황녀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수하고 숭고한 인간의 선의와 사랑이 없다면 도저히 이런 짓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베오날드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카데미 수업은 불성실하게 받고, 자신이 황녀라는 걸 알면서도 예의만 차리고, 툴툴대고, 자신에게 관심 없어 하는데, 이렇게 움직인다는 건 정말 다른 의도 없이 자신을 돕기 위해서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말로 고결과 명예를 떠드는 이가 많지만, 진짜 보는 건 처음이야.’
물론 그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명예의 도구로 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위협에서나 그런 변명이 가능하지,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도전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심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만나고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 그리고 피어나는 열망. 황제와 황실의 인형이자 사고파는 도구가 아니라 그녀가 인간이라는 증거가 깨어났고,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게 한다.
만약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혹시라도 나중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당당히 마주 볼 수 없어진다는 것까지 깨달았을 때, 그녀의 눈빛은 의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며칠 뒤, 제국 아카데미.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감시가 붙어 있다는 것을 눈치 못 채더라도 이미 누군가 감시한다고 생각하고 행동과 발언을 조심히 하며 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일단 제국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면서 체육제의 단체전을 대비하는 훈련에 참여 중, 지급받은 갑옷과 검을 들고서 대열을 지키는 중이었다.
“밀리지 마라! 방진에서 밀리지 마! 등이 땅에 닿으면 실격이라는 걸 기억해 둬라!”
‘참 어이가 없지. 전쟁을 모방해 놓고, 무슨 제약이 이렇게 많은 건지.’
체육제의 기사 전공 단체전은 귀족 학부의 클라이맥스이면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였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상자는 물론, 경쟁 가문의 후계자를 이 시합 중에 몰래 죽이려고 하는 암투가 벌어졌기에 여러 제약이 붙어 있었다.
무기는 날을 세우지 않기, 둔기는 부서지기 쉬운 것으로 하기, 넘어진 자를 공격하지 않기 등등이 있었고, 패배 조건은 바로 등이 땅에 닿으면 곧바로 사망 처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귀하신 귀족 자제분들이고, 후계자들이라 조심해야 하는 건 알겠지만…….’
“아, 맞다. 황실의 지시로 안전을 위한 새로운 규칙이 추가되었다. 이번 체육제에선 마법 무구와 가문의 가보 같은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아카데미 정규 장비만 사용하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저기서도 수작을 부리는군.’
체육제에서 변수를 없애기 위한 황제의 수작에 베오날드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충 자신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티를 내 주는 게 고마웠던 그는 계속해서 긴장을 놓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