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미쳤군요, 정말! 황녀한테 왜 손대는 건데요? 물론 예쁘긴 하지만요!”
“내가 아무리 미친 일을 할 때가 있다곤 하지만 그 평가는 심히 가혹하군. 물론 그 황녀는 확실히 아름답고, 재능도 풍부하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황제에게서 빼앗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게 아니면 어떤 이유인데요?”
“…사람은 말이지. 자신이 약할 때, 또 부족했을 때 하지 못했던 것이 기억에 오래 남곤 하지.”
사람들은 모두 부족할 때의 기억에 몸서리치게 된다. 특히 미성숙할 때 얻은 그 부족의 경험은 영혼에 새겨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깊게 새겨져 평생 본인을 괴롭힌다.
어린 시절 가난한 자가 장래에 돈에 사무치는 것처럼 베오날드는 벨릭스 폰 노이멀 아래에 있을 때 구하지 못했던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억, 사람을 도구로 보던 기억이 사무쳤기에 그는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자 했고, 결코 벨릭스 폰 노이멀이 갔던 길을 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이해가 되는 소리를 좀 하세요.”
“요점은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나를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강요는 하지 않겠다. 내키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다. 하나 나를 믿고 돕는다면 성공했을 때,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는 지불될 거라는 점만 기억해 둬라.”
“저, 저는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았기에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이디와 세인은 베오날드의 의지 어린 눈빛을 보고 그가 황녀에 대한 욕심이나 욕망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승낙했다.
어차피 이 둘은 베오날드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기도 했고, 죽더라도 그의 곁에서 죽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셀리나만은 말도 안 되는 걸 지켜보는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박을 하라는 건가요?”
“그래.”
“후우~ 좋아요. 하지만 위험성이 높아서 대가는 비쌀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세요.”
“역으로 기대해도 좋다.”
셀리나의 말에 베오날드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준 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나누기 시작했다.
우선 세인과 셀리나에겐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도시 외곽에 지어 둔 저택과 짐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중요한 서적이나 물건은 하이디까지 동원해서라도 수도 내에 알테리오를 머물게 하기 위해 마련한 ‘마탑’ 소유의 비밀 저택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럼 그동안 베오날드 님은?”
“나는 황궁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해야지.”
“황궁은… 보통의 방법으론 침투할 수 없을 거예요. 황실 기사들은 물론 마탑의 마법사들이 설치한 여러 결계들이 다중으로 쳐져 있을 테니까요.”
“나도 몰래 잠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애초에 난 암살자나 첩보원이 아니니 말이지. 내 방식대로 당당히 들어갈 방법을 찾을 거다.”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난 뒤, 베오날드는 우선 어떤 방법부터 사용할지 고민했다.
떠오른 것은 일단 케드론이나 발데리안 가문의 가주에게 이야기해서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황녀를 만날 명분이 부족했다.
정보를 얻고, 그녀의 의사를 듣기 위해선 만나서 짧게 이야기할 시간을 얻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역시 황제의 이목을 끌 재보나 메리트 혹은 성과가 있어야 했다.
‘우선 가주든 케드론 선배님이든 그쪽부터 떠봐야겠군.’
그리고 시종에게 물어서 현재 가주와 케드론의 위치를 확인했다.
가주는 현재 부재중이었으며 케드론이 곧 귀가한다고 했기에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베오날드는 그와 할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고, 그가 오자마자 아카데미의 일정과 행사에 대해 물었다.
“오자마자 무슨 질문을 하나 했더니만 호들갑 떨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아카데미의 행사? 기말고사 같은 당연한 걸 빼면… 보자, 조금 있으면 학생들 단합을 위한 칼레움 체육제가 있긴 하지.”
“체육… 제 말입니까?”
“학부의 전공 단위로 모여서 서로 경쟁하는 거지. 물론 자네는 심한 아웃사이더라서 전혀 모르고 있었겠지만.”
정말로 모르고 있었기에 할 말이 없는 베오날드는 멋쩍게 웃으면서 답할 뿐이었다.
이런 유의 단합 대회는 자신의 시대엔 전혀 없던 일이라 그는 계속해서 케드론에게 질문했다.
“하하하, 부끄럽네요. 그럼 귀족 학부분들도 같이하나요?”
“그럴 리가 없지. 평민과 귀족이 같이 뛰어노는 꼴도 말이 안 되지만, 애초에 ‘기사 전공’만 해도 신체 능력이 몇 배나 압도적인데 그럴 리가 있나? 그래서 귀족 학부는 몇 개 부문으로만 나누어서 사교적인 스포츠로 가문이나 동아리끼리 경쟁하네. 그리고 ‘기사 전공’은 관련 동아리가 유일하게 둘뿐, 우리 귀족 파벌의 ‘검의 정원’과 황실 파벌인 ‘검과 방패’가 있지.”
“오오오… 그렇다면 그 대회는 단순히 실력을 겨루고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정치의 일환이겠군요.”
“그렇지. 더불어 기사 전공 학생들에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이자 등용문이 되기도 하지. 왜, 관심 있나?”
“아주 관심이 있습니다.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좋은 기회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케드론을 따라다니면서 체육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사 전공’ 대전은 2개의 동아리가 총 세 가지 부문에서 승패를 가리는 것이었는데, 세 가지 부문은 토너먼트 마상 창 시합, 5 대 5 팀전 결투, 마지막은 검의 정원 동아리에서 100명, 검과 방패 동아리에서 100명이 참여해서 서로 싸우는 대전투였다.
“…무슨 그리 위험한 짓을……. 앞의 2개는 그렇다고 쳐도 100 대 100은 완전히 실제 전쟁 아닙니까? 죽을 위험이 커 보이는데요.”
“걱정 말게. 그걸 걱정해서 신관들도 붙어 있고, 철저히 규율로 강조하지만~ 역시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가끔 사상자가 나오기도 하네. 하지만 명예로운 자리이면서 포상도 크고, 난세를 극복할 인재를 기르는 것에 이보다 적합한 행사가 없기에 계속 유지되고 있지. 포상은 무려 황제 폐하가 직접 내려 주신다네. 하하핫.”
‘…정신 나간 짓은 500년 전이나 500년 후나 같구나.’
웃을 수 없는 베오날드. 하나 대략 어떤 행사인지는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500년 전, 난세가 아닌 통일 제국 시절에는 더욱 지루한 평화를 이겨 내기 위해, 그리고 싸울 곳이 없어진 기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심심하면 열렸고, 사상자 문제는 오히려 중앙의 권력 강화가 더 쉬워지니 리얼리티를 강조하자면서 더 강화했었다.
‘아무튼 차기 제국의 주요 권력자들이 될 귀족들이 부각될 행사이니 황제가 직접 포상하고 치하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음~ 이거 괜찮겠는데?’
그리고 황제가 직접 포상을 내린다는 것에 행사의 중요도가 높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써먹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주판을 튕긴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케드론에게 말을 건넸다.
“선배님, 그러면 당연히 그 로이드 크멜 회장님도 나오겠군요.”
“그렇지. 아~! 알겠군, 알겠어. 설욕을 하고 싶다는 거지?”
“이야기가 빠르시네요. 예. 신분 차이는 그렇다 쳐도… 역시 ‘검’으로 진 건 분하거든요.”
“후후후… 흠하하하하하핫! 좋은 배짱이다! 그렇지! 사내라면 그 정도 투지는 있어야지! 좋아! 네가 로이드 그 자식과 싸운 활약은 모두가 알 테니! 이의를 제기하는 놈은 없겠지. 가자! 지금 바로 검의 정원에 가입하러 가는 거다.”
‘역시 이 녀석도 케르웰의 후손 맞구나.’
외모는 어딜 봐도 쿨하고 깐깐해 보이는 미남이고, 본인도 그런 성향처럼 행동하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내면은 영락없는 발데리안 가문의 사람이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케드론을 베오날드는 어린 조카를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따라나섰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렇게 생각 말게. 어차피 이 체육제는 단순히 아카데미 학생들 간의 싸움이 아닌, 귀족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조금이라도 전력을 강화하면 좋으니까. 비록 반푼이라곤 해도 상급 기사 후보와 맞선 전투력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이 단합… 아니, 체육제에서 이겨야만 상대 파벌보다 우수한 걸 증명할 수 있고, 가문의 입지와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되니 말이죠?”
“그렇지. 나보다 잘 아는군. 그러니 반대할 멍청한 놈은 없을 거야. 만약 반대했다가 다시… 우리에게 검을 겨누면 어떻게 하냐고 설득하면 될 테니 말이야.”
씨익.
그렇게 미소 지은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말을 몰아 아카데미로 향했다.
한데 한창 달리는 중에 갑자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행차인가 싶었지만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것 같고, 무언가 공연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둘은 말을 천천히 몰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커스단이라도 온 걸까요?”
“글쎄,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말이지.”
“자자! 다들 줄을 서세요. 이번엔 특별히 저번의 2배! 2,000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넉넉히 사 가실 수 있습니다. 자자~ 오직 상회에서만 제조하고 공급하는 특제 미용 비누가 왔습니다! 지금 판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줄의 끝엔 덩치 좋은 일꾼들이 상자를 뜯어서 물건을 꺼내 거대한 가판대 위에 놓아두고 있었는데, 나온 것은 바로 분홍빛과 레몬 빛으로 빛나는 비누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케드론은 소란스러운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며 궁금해하는 베오날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게 요새 장안의 화제인 ‘미용 비누’인가 보군.”
“화제라니요?”
“아~ 나도 들은 건데, 저 새로 나온 비누가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세정 효과는 물론이고, 향기도 오래 남는 데다 피부에도 좋다나? 그래서 우리 집에서도 지금 여동생들이 구해 달라고 난리 치는 걸 들었네.”
‘…역시 저 상인 놈도 아주 멍청하진 않나 보군.’
베오날드는 데런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는 자신이 준 레시피로 만든 비누가 고작 비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난 뒤 제품을 완성, 직접 혹은 상단 여성들에게 사용해 보라고 준 다음 체험기를 들은 즉시 생산을 위한 설비를 마련하고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만든 다음 판매했을 것이다.
‘음,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말 그 자체군.’
“자자, 진정하시고. 한 사람에 최대 3개씩밖에 팔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에게도 양보하세요. 어휴~ 바쁘다, 바빠. 거기, 다른 사람 것을 빼앗지 마십시오! 손님들! 선 넘어오시면 안 됩니다.”
‘돈을 잘 쓸어 담고 있군. 하긴 미용에 대한 욕심은 시대와 세월을 가리지 않지. 뭐, 운도 좋았지만 말이야.’
예전에 저택을 마련하고 연금술 공부를 하며 수도를 오갔을 때, 이미 여러 상품과 상권에 대한 분석은 마친 지 오래였다.
본래 시대가 500년이나 지나면 분명 과거의 물건보다 좋은 것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지속적인 전쟁으로 후퇴해 버린 덕분에 자신의 도움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저런 비누가 대흥행하는 것이었다.
‘고작 좀 더 간단하게 비누를 제조하는 방법이랑 향과 미백, 보습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약초와 마력초의 배합을 알려 준 것뿐인데 말이지.’
제조법 자체는 연금술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의 그냥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 수 있는 레벨이었지만, 그 배합의 레시피가 특별했다.
특정한 약초와 마력초가 필요하고, 제작 과정에서 손이 좀 많이 가지만 그래도 나온 물건은 지금 이 수도에 유통되는 비누보다 질과 미용 면에서 압도적으로 효과가 남다른 건 확실했다.
“으음, 잠깐만 기다리게. 온 김에 나도 몇 개 사야겠군. 여동생들 선물용으로 말이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참… 웃긴 일이지. 애초에 저 비누는… 평민들 쓰라고 연구해서 만들어 낸 성과인데 말이지.’
사람들의 줄을 뚫고 비누를 사기 위해 떠나간 케드론을 보며 베오날드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평민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들기 쉽게 개선해서 뿌린 레시피인데, 오히려 500년이 지난 지금 특별한 비누 취급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귀족들도 사려고 애쓰는 게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