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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89화 (89/259)

[89화]

그리고 로이드 회장도 그 점을 어느 정도 눈치챈 건지, 이기긴 했음에도 상쾌함이나 기쁨은 전혀 없었다.

그저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 공포에서의 해방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 명승부를 펼쳐 승리한 그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그가 바라지 않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베오날드! 괜찮아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런… 젠장!’

젤시 황녀는 승패가 나자마자 달려오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베오날드를 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깨우려 했다.

로이드 회장이 더욱 불쾌한 눈으로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기절한 척 쓰러진 베오날드도 기껏 자신이 짜 놓은 판을 엎어 버리는 황녀의 눈치 없는 행동에 위장이 뒤틀릴 것 같았다.

‘하긴 자각을 못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겠지. 어쩐다? 이대로 계속 쓰러진 척을 하긴 글렀군.’

베오날드는 결국 끄응대는 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힘겹게 일어서는 척을 했다.

상당히 쪽팔린 상황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보다 더한 굴욕도 견딘 적이 있는 그에겐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분하다는 표정과 함께 허리를 깊게 숙이며 로이드 회장에게 말한다.

“제가 졌습니다! 역시 크멜 가문의 후계자다운 무위셨습니다! 그럼 저는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여기서 깔끔하게 물러나겠습니다. 이만!”

“아니, 잠…….”

‘이렇게 되면 여기선 쪽팔린 척하면서 튀기다!’

“베오날드!”

베오날드는 쪽팔린 척 얼굴을 가리고서 오러를 끌어 올려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다음 갑옷을 원래 있던 곳에 잽싸게 벗어 놓고, 혹시 수리비를 청구할까 봐 금화까지 내려놓는 섬세함을 보이는데, 그사이에 젤시 황녀가 자신을 쫓아왔다.

그녀는 엄청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았는데, 엄연히 그녀 때문에 판이 다 깨져서 이 난리를 치는 베오날드가 죄책감이 일어날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베오날드, 괜찮나요?”

“아, 괜찮습니다. 그냥 좀 머리가 띵한 거 빼고 말이죠. 아무튼 꼴사납게 졌으니, 이거 당분간은 여기 근처도 못 오겠네요. 하하하, 부끄러워서 말이죠.”

“제가 괜한 일을 저질러서 이렇게 된 것 같아 정말 죄송하네요.”

“아뇨. 황녀 전하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제가 약한 탓이죠. 그러니 너무 침울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더 강해지면 됩니다.”

베오날드는 멋쩍게 웃으면서 그녀를 위로한 뒤 그대로 검과 방패 동아리를 빠져나왔다.

하나 젤시 황녀는 미안한 얼굴로 계속 따라왔는데, 베오날드가 아무리 괜찮다고 이야기해도 그녀는 도저히 사죄를 멈추지 않았다.

“역시 신전에라도 가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아프지 않더라도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할 겁니다.”

‘아니, 치료는 내가 더 잘하는데… 신전 그 돌팔이 녀석들을 어떻게 믿어?’

물론 신전은 신성력 외에도 오랜 역사 동안 나름 환자들을 돌보는 노하우가 쌓여서 실질적으로 민간 병원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맞았다.

하나 베오날드는 엄연히 연금술을 이용한 의술로 황제의 병을 호전시켜 대신관을 밀어내고 주치의가 된 자다.

실증주의와 막대한 자본, 거기에 연금술의 힘 덕분에 의술로만 따져도 베오날드 쪽이 압도적으로 명의였다.

‘흠, 아무튼 그 회장인지 하는 녀석이 모은 사람들이 지금쯤 소문을 막 퍼뜨리고 있을 건데…….’

비록 지긴 했지만 베오날드가 이미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기사, 검술 명문가의 후계자와 수십 합 이상을 맞서며 버텼다는 사실 하나가 이미 사방으로 퍼졌을 것이다.

기사는 보통 인간과 병사를 초월한 그 강력한 무력으로 인해서 늘 부족했고, 난세엔 어느 귀족이든 기사를 모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베오날드는 천연 기사라는 면에서 저평가를 받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최소 중급 기사, 그리고 어쩌면 상급 기사의 포텐셜까지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퍼지게 되면 한산했던 베오날드의 저택 앞으로 온갖 귀족가의 인간들이 산더미처럼 몰려올 게 뻔했다.

‘결국 발데리안 가문의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나?’

물론 그들은 환영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반대쪽 파벌, 그것도 제국을 지탱하는 명문 기사 가문의 후계자와 수십 합을 겨룰 정도의 실력을 증명했으니 몸값을 올려야겠지만 말이다.

베오날드는 이리저리 계산하면서 학원을 나서는데, 황녀는 겁 없이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왔다.

“저기… 정말로 괜찮으니 더 안 따라오셔도 됩니다, 황녀 전하. 수도는 위험하니 말이죠. 저야 막 나가는 놈이고, 가치 없는 놈이라 상관없지만 호위도 없이 마음대로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보이진 않지만 이미 제 주변엔 황실 기사들을 비롯해서 호위가 붙어 있습니다. 지금도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절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하긴 그 철두철미해 보이는 황제가 가족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이 딸내미를 허투루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황녀를 데리고 다니면 안 그래도 지금 꼬인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꼬일 가능성이 컸으므로 베오날드는 그녀를 설득해서 돌려보내기로 했다.

“황녀 전하, 제 몸 상태는 걱정 안 하셔도 되니 일단 오늘은 여기서 서로 물러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그 대련장에서 같이 나온 것도 그렇고, 불필요한 오해가 쌓일 수 있으며 이는 황실의 안녕을 해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요?”

“남녀의 관계란 주변 사람들의 많은 오해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설사 건전한 친구의 관계라도 말이죠. 오해라든가 악의가 아니라,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녀 전하.”

“친구…….”

“아, 물론 친구 이상을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황녀 전하를 모시겠지만 말이죠. 하하핫. 그러면 다음에 뵙지요.”

친구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 건지 순간 멈칫하며 그 단어를 조용히 읊조리는 젤시 황녀였다.

자신과는 평생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그 단어가 의표를 찔렀기에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감동했지만, 밖으론 내색하지 않았기에 베오날드는 그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친구라…….”

새로이 정립해 준 인간관계에 그녀는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베오날드가 떠나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나 주변의 건물과 숲에 호위를 위해 숨어 있는 황실 기사단원과 황실 첩보부 요원들의 시선으로 보면 이제 누가 봐도 친구 사이가 아니라, 신분을 뛰어넘어 풋풋한 연애를 하는 연인의 광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뒤, 베오날드가 예상한 대로 그의 명성이 아카데미 전체를 넘어 수도권 전부에 퍼지고 말았다.

소문이라는 놈은 계속해서 살이 붙고, 심지어 대련 마지막에 도망치는 베오날드를 쫓는 황녀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니, 호사가들이 아주 좋아할 법한 그럴싸한 로맨스 연애담이 하나 완성되었다.

그래서 결국 베오날드는 이런 소문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인간들을 피해 외곽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나와 발데리안 가문을 찾아온 것이다.

발데라인 가문으로선 경쟁자인 크멜 가문 후계자의 명성을 한풀 꺾이게 만든 베오날드를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과연~ 황녀의 체면을 세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쪽으로 가서 엿 먹이고 돌아와 몸값을 올리고 들어오겠다는 생각이었군. 하하하, 그 로이드 놈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지은 건 내 생애 처음이었다네. 하하하하하하핫!”

얼마 전 황녀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인간들을 피해 결국 발데리안 가문에 몸을 의탁하기로 한 베오날드였고, 자신의 저택으로 온 그를 돌보게 된 케드론 발데리안은 베오날드를 반기면서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머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별채를 마련해 주지. 편안히 있게나. 다만 그리폰은 절대 마구간 근처로 못 오게 관리하고.”

“예, 걱정 마십시오.”

귀족 파벌이란 시대를 불문하고 서로를 혐오하고 견제하는 관계인데, 베오날드가 아주 시원하게 상대 파벌의 가문에 빅 엿을 먹이고 왔으니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발데리안 가문의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 베오날드 일행이었다.

‘뭐, 실제는 다르지만 지금은 발데리안 가문의 비호가 필요한 상황이니 그냥 좋게 넘어가자.’

“그나저나 왜 나까지 여기에…….”

“언제는 같은 일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 손님들과 황성의 인간들을 상대할 거냐? 거기에 첩자도 산더미같이 있으니 연구도 안 될 텐데.”

“하아~ 왜 자꾸 폭풍만 일으키시는 거예요? 도련님은?”

“내가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키는 게 아니다. 며칠 수업 빠지는 건 하이디와 세인에게 맡겨 뒀으니 걱정 없겠지.”

사정이 있을 경우 고용인에게 수업 내용을 전달해 달라고 하는 건 아카데미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고, 베오날드의 성적은 중상을 넘어서니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하이디에게 세인의 호위도 맡겼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마법사인 셀리나가 문제였는데, 저택에서 마법 연구나 하던 그녀는 갑자기 휘말려서 같이 대피해 왔기에 순수한 피해자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당분간 조용해질 때까지 하던 거나 마저 해야겠지. 아카데미에 출석하지 않아도 고서 해독, 검술 수련, 알테리오의 식량 사냥 등등… 할 건 많다. 아니면 마법 연구라도 도와줄까?”

“아, 그러면 좋아요.”

이렇게 베오날드는 다른 미뤄 둔 일을 하며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소문과 화제는 결국 잠자코 기다리면 식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가지 걱정이 그의 마음을 거슬리게 했다.

자신과의 연애담으로 한창 곤혹을 치르고 있을 젤시 황녀에 대한 것이었다.

‘음, 특별한 짓을 안 하고, 그냥 황궁에 유폐시키겠지? 그리고 그다음엔… 으음…….’

제국의 간신이자 권신으로서 황실을 장악해서 굴러가는 방식이나 마인드를 아주 잘 알기에 황제가 어떤 짓을 할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염문설이 나는 황족, 그것도 엄청 귀하고 비싸게 보낼 수 있는 여성의 경우 처리하는 방식은 동서고금 따질 거 없이 딱 하나뿐이었다.

***

칼레움 제국 황궁.

황제는 갑작스럽게 생긴 일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자신이 딸에게 베오날드를 감시하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러자마자 대형 사고가 터진 건지, 놀랄 지경이었다.

“끄으으으응…….”

우선 황녀 본인에게 이야기를 들은 결과, 그를 쉽게 감시하기 위해 아카데미 안에 있는 동아리인 ‘검과 방패’에 넣으려고 했고, 거기서 동아리 회장인 크멜 가문의 로이드가 테스트를 빌미로 대련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패배했으나 자신이 베오날드를 챙겼고, 그 뒤 아무 일 없이 돌아온 게 끝이라고 했다.

“정말 다른 일은 없었나?”

“예. 다른 일이 있었다면 저희가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군. 끙…….”

딸을 감시하던 황실 기사와 첩보부 요원에게서 들은 진술도 똑같았기에 황제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염문설을 들은 그동안 젤시 황녀를 노리던 귀족 가문들에서 단체로 항의하러 온 것이었다.

‘그거 때문에 난리가 났었지.’

그녀 하나를 얻기 위해 황실에 충성과 재물을 바치는 등등 갖은 노력을 했는데, 웬 시골에서 온 잡종 놈팡이와 놀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차라리 다른 명문 귀족 가문에게 낙점되었다면 그쪽이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쏟았겠지, 라든가 그냥 경쟁에서 밀렸다고 하면서 납득하겠지만, 근본도 미미한 잡종에게 빼앗기는 건 귀족들 모두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대련장에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끼어들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너무나 아깝구나……. 후우~ 너무 아까워.”

이번 일로 인해 황녀의 가치가 떨어져서 앞으로 뽑아먹을 수 있는 이익들이 날아간 걸 생각하자, 황제는 두통이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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