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와, 진짜 죽을 뻔했네.”
“살아… 있다고?”
“이거 아니었으면… 큰일 났겠죠.”
흙먼지 속에서 베오날드는 걸레짝이 된 방패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혹시 몰라서 하나 챙기긴 했는데, 이 판단으로 그는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살아난 셈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눈치채고, 자신도 오러를 끌어 올려 몸을 방어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할 수 있는 건 몸을 비틀거나 최대한 멀어져서 충격을 줄이는 것뿐이었는데, 그때 마침 등에 멘 방패가 한 번 완충제가 되어 준 것이었다.
“크으윽……! 운이 좋군.”
“운이라기보단 이것도 실력이죠. 한 수 더 준비했으니까요.”
두근두근두근!
말은 여유롭게 하고 있었지만 사실 베오날드도 이번만큼은 진짜 죽을 뻔한 위기였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넝마가 된 방패를 버리고 검을 겨누면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상급 기사급이시라고 하니… 가차 없이 갑니다!”
그리고 곧바로 복수를 위해 보랏빛 오러를 끌어 올려 달려들었다.
상대는 시작부터 큰 힘을 소모했기에 그가 숨을 고르기 전에 이 유리한 점을 살리기 위해 베오날드는 즉시 검을 휘둘렀다.
‘뭐야? 이거?’
채애앵!
베오날드의 오러가 깃든 검을 처음 받은 회장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문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상대는 분명 시골 촌뜨기에 ‘천연 기사’라고 했기에 가문에 내려오는 비전의 마나 호흡법을 익힌 자신보다 당연히 오러의 힘이 약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보랏빛 오러에 실린 검의 위력은 절대로 자신보다 약하지 않았다.
그는 뒤로 밀려나면서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뭐냐? 그 오러… 대체?”
“천연이라고 다 약하라는 법은 없죠.”
“크윽!”
챙강!
묵직하게 전신을 울려오는 베오날드의 검과 오러의 힘에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한 오러의 힘은 오직 자신과 같은 명문가의 후손들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인데!
천연 기사가 이런 힘을 낸다는 건 놀라운 일이기도 했지만, 이러다 정말 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내가 이런 놈에게 진다고?’
그동안 크멜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온 로이드 크멜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가정이었다.
물론 지금 상대하는 베오날드보다 강한 적들과 싸운 적도 많았다.
자신에게 붙은 이명인 ‘오우거 슬레이어’ 또한 오우거와 필사의 격전을 펼쳐서 얻은 것이었고, 또 무사 수행 때나 가문에서 굵직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참여해서 자신보다 더한 강자와도 검을 맞대곤 했다.
‘이따위… 잡종에게 내가? 진다고?’
그것들은 대부분 이름 있는 강자이거나 위험종 몬스터라서 패배해도 명예로운 싸움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하나 지금 눈앞에 있는 베오날드는?
제국 구석에서 기어 나온 촌놈, 마나 호흡법이나 검법과 아무 상관없는 가문, 게다가 용병의 피가 섞인 잡종. 어딜 봐도 자신에 비하면 하찮은 자인데, 그에게 진다면?
‘나락으로 떨어진다. 절대… 절대 질 수 없다. 이래서 내가 한 방에 끝내려고 했는데!’
원래 계획은 첫 수(手)에 베오날드를 날려 보낸 다음, 쓰러진 그에게 검을 겨누면서 ‘네놈 수준으론 우리 동아리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당당히 외치거나, 조금 소질이 있을 경우에는 그래도 힘의 격차를 알려 줘서 다시는 황녀 전하에게 찝쩍대지 못하게 밟아 버리는 것이었다.
‘절대… 절대 그렇게 될 순 없어!’
‘근성이 장난 아니군.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 상급 기사 후보지.’
“하아아아아앗!”
스르르릉! 챙!
베오날드의 검을 근성으로 밀어내고, 로이드 회장은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받아 내는 베오날드는 그가 조급해한다는 것을 눈치채는 동시에 잃을 것이 많은 자와 아닌 자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여기서 져도 딱히 잃을 것이 없다.
꼭 같은 동아리 내에서 그녀를 도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외부인으로서 도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평판은 이미 아래이니 손해가 없다.
‘젊음의 혈기가 그 계산을 어긋나게 하지. 물론 나도 방심했지만…….’
“젠장하아아알!”
‘그나저나 역시 보통은 아니군. 기사 명가 출신이라 그런지 바닥과 뿌리가 아주 탄탄해.’
채앵! 챙!
500년 전 크멜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 가꾸어진 가문의 일원이라서 그런지 실력은 매우 탄탄했다.
방금 전 필살기 격의 기술을 쓰느라 오러를 많이 썼음에도 굳건히 버티면서 베오날드의 공격을 받았고, 호흡을 진정시킨 다음 다시 반격해 들어왔다.
지면 얻을 불명예와 떨어질 자신의 평가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베오날드를 이겨야 했기 때문이다.
‘끄응… 하지만 이거 만만치 않군.’
“우오오! 크멜 가문 검법, ‘제3형(第三形)-비바람 속’!”
‘멘탈은 흔들었지만 전투 경험치가 높아서 그런가? 쳇!’
챙강!
큰 기술의 여파가 있을 땐 베오날드가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그것을 회복하자 베오날드를 향해 다시 역공세를 들어왔다.
베오날드 또한 이대로 방어만 해선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제대로 된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뭐야?”
틈을 노려 베는 척하며 다시 찌르기로 전환하는 뱀의 검이 로이드 회장의 목을 노리고 들어갔지만, 그는 지체 없이 몸을 숙이면서 뒤로 굴러서 간신히 피했다.
이상한 검법에 베오날드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다시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이, 이건?”
‘…500년이 지나도 우리 집 검술은 역시 거슬리나?’
‘노이멀식 검법’은 까놓고 말해서 비겁한 눈속임과 술수가 매우 많았다.
기사라기보단 암살자나 살수(殺手)에게 어울릴 법한 검술이라는 지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베는 척 찌르는 ‘살무사’, 멀리서 궤도를 꺾어서 공격하는 ‘아나콘다’와 ‘사이드와인더’, 움직이지 않는 척하며 베는 ‘붐슬랭’, 기어이 한 번 베는데 두 번을 베는 ‘쌍두사’까지.
베껴 만들면서도 결국 만드는 이의 성향이 들어가는 식으로 개선되다 보니, 본래 황실 검술과는 완전 달라진 노이멀식은 말 그대로 ‘뱀’과 같은 검술이었다.
“시시한 페인트 따윌!”
‘오, 근성 있네. 그럼 이건?’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칠식(七式)-붐슬랭’.
베오날드는 검을 잡고 멈춰서 자세를 취했다. 그다음 보랏빛 오러가 잠깐 일렁임과 동시에 아무 움직임 없이 보랏빛 검의 궤적이 로이드 회장을 베어 나갔다.
그러나 역시 명문가의 후예는 레벨이 달랐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감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낀 건지 그는 오러를 끌어 올려 그 검을 방어해 냈다.
“대체… 그건 무슨 검술이지? 도저히 기사의 검이라고 보기 힘들군. 간교하기 짝이 없어!”
“알려 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제가 크멜 가문의 검술에 대해 물으면 다 대답해 주실 겁니까? 천천히 풀어 보십시오. 아주~ 천천히 말이죠.”
“…이 망할 자식이!”
채앵! 카아앙!
이 대련은 어디까지나 테스트. 그리고 첫 공격이 그나마 들어간 것처럼 보이긴 해서 망정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평판이 내려가는 것은 오히려 로이드 회장 쪽이었다.
망신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관객을 너무 많이 부른 것이 역으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저거 왜 저렇게 되는 거야? 회장이 밀려?”
“멍청아, 봐주고 있는 거잖아. 테스트니까…….”
“그렇지만 처음에 쓴 거 위력을 생각하면 단번에 보낼 생각으로 보이지 않았나?”
“에이, 그래도 로이드 회장인데… 지겠어?”
“그나저나 저 잡종 녀석은… 역시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은 게 진짜인 것 같긴 하네. 잘 버티는 걸 보니.”
웅성웅성…….
일단 그가 모은 동아리 내의 관중들뿐만 아니라 소문이 퍼져서 그런지 주변의 다른 학생들과 또 라이벌 동아리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미 대련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끝나고 나면 결과야 어떻든 그 여파는 아카데미를 넘어 이 제국 수도 전역에 퍼질 터였다.
‘젠장! 젠장! 잡종 주제에! 시골 촌놈 주제에! 감히 나를! 감히 나르을!’
‘감정의 동요 덕에 수(手)가 단순해졌는데, 그래도 쓰러뜨리기가 힘드네. 후우~ 역시 나는 무재(武才)가 없나? 아니지, 경험 부족이… 겠지!’
전생에 베오날드는 연금술사, 귀족으로서의 활동으로 인해서 직접 결투한 경험이 없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붙는 일은 잘 없었고, 압도적으로 약한 상대를 처리하거나 계략과 기습을 통해서 마무리 짓는 용도로 사용하는 게 주였다.
그나마 하이디와의 대련 덕분에 아주 조금 경험이 쌓이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악의를 가진 적수와 싸우는 대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리저리 공격하는데도 넘어가질 않네. 저 가슴의 문양은 장식이 아니라는 건가!’
‘내가 이딴 놈 하나 이기지 못한다고? 오우거도 일대일로 쓰러뜨린 이 내가?’
‘심리적으로 우위를 잡고 있는데 이 정도면… 진짜 상급 기사와 일대일을 하면 완벽하게 지겠군.’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그러면 이제 얻을 것도 다 얻었으니 체면 좀 세워 드려야겠군.’
베오날드는 맞서는 공세의 형세를 조금씩 자신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실 상대는 지금 조급함이 넘치는 상황이라서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만큼 좀 더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보였지만, 베오날드는 이미 로이드 회장과 맞서서 오래 버텼다는 점 하나만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셈이었기 때문에 물러나고자 한 것이다.
‘이기면 이기는 대로… 이런 근육뇌 놈들이 찾아올 거고, 또 저놈이 힘이 빠질 때까지 이 대련이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지.’
너무 과열되는 것을 우려해서 중간에 선생이나 기사들이 와서 대련을 멈추면 그건 아예 이기느니만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불쾌한 감정만 더 쌓이고 끝나게 된다.
그러니 이쯤에서 로이드 회장에게 자연스럽게 져 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과정보단 결과에 주목하는 법이고, 또 승리자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슨 말을 해도 모든 과정이 합리화가 된다.
‘좋아, 지금!’
“우아아아아아아아!”
‘자연스럽게……!’
챙그랑!
분노에 가득 차 오러를 담아 휘두른 츠바이헨더를 막으면서 자신의 오러로 검을 깨뜨리고, 그대로 휘둘러지는 검에 가슴의 갑주 쪽을 베이면서 몸을 뒤로 날려 화려하게 땅을 구르면서 쓰러진다.
그러고 난 다음 분하다는 듯 용을 쓰며 일어나려고 발악하다가 힘이 다해 기절한 척 고개를 떨구고 쓰러진다.
“하아… 하아… 후우~ 후우우우우우~ 내 승리다.”
“와아아아아아아!”
불안감과 조급함에 휩싸인 채 싸우느라 베오날드가 연기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로이드 회장은 그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주먹을 들어 자신의 승리를 증명했다.
하나 로이드 회장은 승리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고, 베오날드는 로이드 회장과 수십 합을 겨루며 버텨 내었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기에 이득과 손해를 따지자면 실질적으로는 베오날드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