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좋아, 그럼 여기서 실력 테스트를 해 보는 수밖에 없지요. 기사가 아무리 부족하다고 한들 아무나 들일 순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회장님.”
“대부분 ‘검은 제복’의 경우 종자나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검은 제복’이 기사로 들어온다면 그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테스트를 하곤 합니다. 그 추천들이 진실인지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건 제가 확인했습니다.”
“아뇨. 그래도 역시 사람들에게 직접 실력을 보이는 게 나을 거라고 봅니다. 그의…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출신을 생각하면… 내부 분란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실력을 확인하면 좀 덜하겠지요.”
“…알겠습니다.”
철저한 논리에 따른 말을 하면서도 ‘불순물’, 부친의 혈통을 비방하는 말을 넌지시 하며 도발하는 회장이었지만, 전생에 전통 귀족이었던 베오날드도 이 점엔 공감하기 때문에 도발이 되지 않았다.
회장은 자신의 도발에 일절 감정의 동요가 없는 베오날드를 보고 놀라면서도 그를 절대 가입시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수작을 꾸몄다.
“어쨌든 실력 테스트를 해야 하니 밑의 대련장으로 가시지요. 저도 이 일만 정리하고 갈 테니, 먼저 가셔서 갑옷과 무기를 갖춰 주십시오. 저는 제가 입고 가지요. 아니면 자네, 스스로 물러날 텐가?”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 좋은 패기군. 그럼 밑에서 보세나.”
베오날드의 동의를 얻는 것으로 황녀의 반발을 눌러 버린 회장은 먼저 출발하라고 했고, 달리 방안이 없는 황녀는 어쩔 수 없이 베오날드를 데리고 내려가서 그가 이야기한 대련을 준비했다.
그러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오날드에게 말했다.
“어쩌죠. 원래 저렇지 않은데… 갑자기 저러네요.”
“아… 저는 이해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보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라는 것을 보면 제대로 한판 하자는 것 같네요.”
“그러게요. 게다가 보니 회장이 직접 나설 것 같은데 어쩌죠?”
“뭐, 기사 동아리의 회장인 만큼 보통은 아니겠죠. 상세한 정보나 주십시오.”
“예. 그는 이 칼레움 제국에서 가장 많은 기사를 보유한 가문인 ‘크멜 가문’의 후계자예요. 가주는 현재 크멜 공작으로 엄연히 황실 파벌인 가문이고, 제국 동북부를 책임지고 있죠.”
황녀는 차분히 상대에 대해 알려 주면서 베오날드를 일반적인 갑주와 무구가 보관된 무기고로 데려가 치수를 재고, 그에게 맞는 것을 내어 주었다.
발데리안 가문이 황실과 척을 지고 있다면 이들은 반대로 황실을 지지하는 무력 가문.
그리고 이 동아리의 회장은 그 가문의 후계자로 개인 무력은 이미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올랐다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상급 기사의 경지인데 아직 기사가 아니라는 건… 아~ 관록과 명성, 실적 때문에 심사를 못 통과하는 거군요.”
“예, 맞아요.”
상급 기사 같은 고위 기사는 가문, 영지 혹은 국가의 얼굴이기 때문에 심사가 엄격하고 빡빡했다.
중급 기사까지는 그래도 앞으로 세울 공훈과 명예를 생각해서 통과시켜 주는 경우가 있지만 상급 기사 이상, 특급 기사는 무위만이 아니라 그 무위에 맞는 실적과 관록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캘러메인 영지에 있는 말데로브 경이 정말 대단한 거지. 상급 기사가 되었는데도 캘러메인 영지에 충성하니 말이야.’
“방패는 혹시 쓰시나요? 원하는 무기는?”
“하나 받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검은 롱 소드면 좋겠네요. 후우~ 아무튼 요새 이상하게 싸울 일이 많군요. 아카데미에 공부하러 온 건데 말이죠. 기사도 아닌데… 하하하핫.”
“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런 게 아랫것의 숙명이고, 또 고난이 없으면 사는 게 재미가 없을 테니까요. 읏챠… 흠, 이거 기사분들이 쓰는 거 맞죠?”
“예. 뭔가 이상한가요?”
“아뇨. 그저 제 몸에 맞춘 게 아니라서 좀 어색할 뿐입니다. 으으음…….”
철컥! 철컥!
묵직하게 몸을 누르는 갑주를 느끼는 베오날드. 지방은 그렇다 쳐도 이곳 수도에서, 그것도 귀족 학부가 사용하는 기사 갑주인데 이 정도로밖에 못 만드나 싶었다.
그래도 수도라서 조금은 제철 기술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베오날드 강(鋼)으로 직접 만든 갑옷을 챙겨 올걸.’이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갑옷으로 모두 갈아입고 투구를 챙긴 그는 젤시 황녀의 안내를 받아서 대련장으로 향했다.
‘음… 대충 예상한 대로군.’
“…….”
“와아아아아!”
대련장 안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기사 동아리의 귀족들부터 시작해서 종자와 시종들까지 깡그리 몰려와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는데, 베오날드와 황녀가 등장하자 커다란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에게 시선이 몰렸다.
“이런 테스트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흔한 일입니다, 황녀 전하. 너무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게… 흔한 일이라고요?”
“그러니 여기서 응원해 주시길.”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한 그녀를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태연히 대련장 중앙으로 걸어가 자신을 바라보는 증오와 질투가 담긴 시선을 직면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악의에서 버티지 못하고 공포에 빠졌을 테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렇지. 이거지. 으으음~’
‘저 녀석이 황녀 전하께서 추천한 놈인가? 저 반반한 얼굴로 꼬신 게 딱 보이네.’
‘회장님이 처리한다고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기사가 모자라다곤 하지만 왜 저런 놈을 추천하는 거야?’
‘듣자 하니 캘러메인 백작가라곤 하지만 애비가 용병이라서 잡종이라면서?’
‘그러니 검은 제복으로 들어온 거겠지. 자기가 잡종인 게 창피하니까 말이야.’
‘검의 정원 쪽으로나 갈 것이지!’
‘회장님이 죽여 줬으면 좋겠네.’
들린다.
귀에 담겨 있진 않아도 입 모양만으로도 악의가 담겨 있는 것이 다 보인다.
그리고 그리운 기분이 든다.
옛날 백작가 시절에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 선정 방식으로 인해 귀족가에서 자신을 제대로 된 후계자 취급을 하지 않았던 기억.
황제의 곁에서 단숨에 권력의 중추로 치고 올라오는 자신을 견제하고, 죽이려 들던 귀족들의 시선.
500년이 지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인간의 사악함은 그대로였다.
“도망치지 않았군. 하긴 그 정도가 아니고선 황녀님에게 손댈 배짱도 없었을 테니.”
그리고 다가가는 자신의 반대편에서 마찬가지로 갑주로 무장한 회장이 나타났다.
녹색과 갈색이 아우러지고, 꽃과 나뭇잎이 세공되어 있는 화려한 갑옷. 가슴엔 잎이 가득한 굳건한 나무가 새겨진 문장이 보인다.
크멜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을 당당히 표시하는 갑옷. 옆에 세워진 약 길이 2미터가량의 츠바이헨더도 손잡이와 가드가 금으로 도금되고, 문양까지 새겨져 있어 매우 화려했다.
‘뭔가 수수하네. 보석도 안 쓰고……. 나름 제국 파벌 중 최고 아닌가? 어쨌든 그럼 어디, 악역 놀이나 해 볼까?’
말 그대로 동화책이나 전설에 나올 법한 젊은 기사의 모습. 대부분의 평민들과 일반 병사들은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눌려 버릴 모습이었지만, 베오날드의 눈엔 한없이 수수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최대한 재수 없게 미소 지은 채로 회장의 말에 대답했다.
“아~ 아직 손은 대지 않았습니다. 저도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죠.”
“…네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야 남자라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재능까지 넘치는 황녀 전하를 가만히 두는 게 오히려 남성으로서의 직무 유기가 아닐는지?”
능글맞게 황녀 전하를 노리는 놈팡이 연기를 적절하게 하자, 회장은 눈에 핏발이 서면서 진한 녹색 빛의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대는 자신을 이미 ‘적’으로 규정했기에 베오날드는 어설프게 둘러대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원하는 ‘적’의 이미지를 연기함으로써 감정적으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네노옴……!”
“왜 그리 화를 내시는지요? 아니지, 화날 만하겠군요. 회장님도 노리고 계셨을 테니까요.”
“나를 너 같은 속물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다릅니까? 테스트를 핑계 삼아서 절 혼내시는 것까진 이해해 드려도, 여기 쫘아악~ 모아 놓은 저 수많은 인파들, 딱 봐도 절 망신 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잖습니까? 그만큼 추잡스러운 질투심을 보인다는 건 황녀 전하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닥쳐라! 감히 나를 모욕해? 더 이상 지껄이면 테스트가 아니라, 이 자리를 결투의 장으로 삼겠다!”
‘자자, 여기까지만 해 둘까? 보통 상대는 아닌 것 같으니…….’
도발에 쉽게 넘어오는 건 둘째 치고, 역시 나름 기사 명가 출신이라는 건지 뿜어내는 오러의 투기가 보통이 아닌 것을 눈치챈 베오날드는 이쯤에서 슬쩍 물러났다.
일단 심리적으로 동요시킨 것만 해도 유리한 고지를 얻은 것이다.
곧 둘은 각자 자세를 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외적으로는 일단 ‘테스트’라는 명목이었지만, 저 불타는 회장의 눈은 절대 테스트로 끝낼 생각이 아닌 상황. 실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로이드 크멜. 위대한 검가(劍家) 크멜 가문의 후계자이자, 오우거 슬레이어, 제국 아카데미 ‘검과 방패’의 회장! 신명을 걸고 네놈을 시험하겠다!”
“베오날드 캘러메인입니다.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간다!”
콰아아아앙!
대련장 바닥의 석재가 깨지고 녹색 잔영을 남기며 회장, 로이드 크멜은 단숨에 베오날드에게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하나 베오날드는 자신이 화를 돋웠기에 이미 이럴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회장의 츠바이헨더가 높게 들려지는 걸 보고 어떤 공격을 할 거라는 것까지 파악, 즉시 몸을 돌려 피한 다음 역습을 할 생각을 했다.
‘역시 애들은 단순해.’
“크멜 가문 검법, ‘종형(終形)-나뭇잎은 다시 피어날지어다’.”
‘어?’
회장의 전신에 끓어오르던 녹색의 오러는 츠바이헨더에 모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거의 눈앞에서 그렇게 된 걸 보고서야 베오날드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상치 않은 오러의 양과 ‘종(終)’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
그렇다. 회장은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오러를 끌어 올려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검술 중 가장 강력한 것을 펼친 것이었다.
‘이 자식, 제정신인가? 무슨 시작부터… 아니면 설마?’
다가오는 녹색 오러의 파동 속에 베오날드는 회장이 살짝 미소 짓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상대를 동요하게 해서 단순한 수(手)를 뻗게 한다는 자신의 책략을 놈이 눈치챈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마치 베오날드의 도발에 넘어간 것처럼 분노해서 이성을 잃고 돌진한 걸로 보였지만, 그는 그 안에서 또 한 수를 넘어 계산한 것이었다.
‘…망했!’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베오날드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녹색 오러의 파동은 부채꼴로 퍼지면서 그를 덮치고 있었다.
상급 기사의 경지에 이른 자의 무위가 그대로 드러나며, 그의 공격에 휩쓸린 대련장 바닥의 석재는 모두 깨지고 태풍이나 해일에 휩쓸린 것 같은 흔적을 남긴다.
“콜록! 콜록! 이게 뭐야?”
“회장님, 무슨 시작부터 필살기를…….”
“아이고, 엉덩이야.”
“지금 저거 확실히 작렬한 것 같은데… 살아 있으려나?”
그리고 후폭풍에 휘말린 학생들은 각자 먼지를 털거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그들은 베오날드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돌과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이미 흙먼지 속에선 검은 그림자가 곧바로 움직이고 있었다.